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13
#612.
자극하다 (2)
“약하기 때문이라고?”
조 이사는 조금 나른하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이 확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납득하고 싶지 않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강하다면 모든 것을 빼앗아도 된다는 말인가?”
“피차 협객 흉내는 내지 마십시다, 조 이사님.”
이현수가 이죽였다.
“총회가 한국을 집어삼킬 수 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중걸이 인화 정책을 펼쳐서? 아니면 남다른 대의가 있었기 때문에? 천만에요. 그냥 강했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총회의 초기에 당신들이 어떻게 몸을 불렸는지 잊지는 않았겠죠? 독립운동이라도 했습니까? 그 혼란한 시기에 다른 문파들을 공격하여 잡아먹고 또 잡아먹어 마지막에 선 것뿐이잖습니까.”
“…….”
“당신들이 해온 방식입니다. 내분이냐, 외분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결국 당신들은 강했기에 총회를 세울 수 있었고, 이제는 약하기에 빼앗기는 것뿐입니다. 그게 세상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조 이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현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도 반박할 수가 없다.
“사람이란 참 이상하단 말입니다. 자신들이 빼앗는 입장일 때는 세상은 힘이 전부라고 외치면서, 막상 자기들이 빼앗길 때가 되어서는 도리를 찾고 정의를 찾아대죠. 묻겠는데, 과거 당신들이 다른 문파를 짓밟고 총회를 세울 때, 그들의 사정과 정의를 생각했습니까?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현수가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그 비웃음이 조 이사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네 말이 맞다.”
아무리 포장한다고 한들 세상은 약육강식.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 약육강식이지.”
조 이사가 가만히 이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나 묻겠다.”
“얼마든지요.”
“네가 이래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
“…….”
“그 목록이란 건 거짓말이겠지? 네가 굳이 나의 협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제대로 발본색원하지 못하고 이중걸의 목만을 치는 상황이 총회의 미래에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아니냐?”
“흐음.”
이현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네 말대로다. 약육강식이지. 그래서 나는 아직 우리가 너희보다 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다. 어차피 이리 당할 거라면 죽을 각오로 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우리가 더 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지.”
이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이 마음먹고 멍청하게 굴겠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나를 납득시켜 봐라.”
“음, 납득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왜 강진호여야 하느냐. 어째서! 나는 아직 이중걸이 강진호에 비해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 무인으로서 이중걸은 무인 강진호를 당할 수 없겠지. 하지만 조직의 장이라는 것은 강한 것만으로는 안 되는 법. 나는 조직의 장으로는 이중걸이 강진호보다 몇 배는 더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강진호에게 이중걸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말해봐라. 네가 말한 그 잘난 약육강식 외에는 답이 없느냐?”
이현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조 이사님.”
“…….”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수십 가지는 더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약속부터 해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납득시키면 그때는 우리에게 협조하겠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조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하지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너는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할 거다.”
“그야 당연하지요.”
유들유들하게 웃은 이현수가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뭐, 그리 복잡한 이유도 아닙니다. 아주 간단하죠. 쉽게 말해…….”
이현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 * *
“시간이라 했나?”
“예.”
“시간, 시간이라……. 그것 정말 뼈아픈 이유로군. 정말로…….”
이중걸이 허탈하게 웃었다.
시간, 시간이라…….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가 그랬습니다. 지금의 강진호는 확실히 이중걸보다 못한 면이 있다고, 지금 당장은 이중걸이 총회를 다스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지금의 총회가 과거의 총회에 비해 강해지고 있는 이유는 강진호 개인의 강함에 기반한 것이지, 조직이 발전해 나가기 때문은 아니라고.”
“그렇지…….”
“하지만 회주님.”
조 이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침통한, 그리고 분통한.
“총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회주님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지요. 적당한 후계자를 길러내는 데도 실패했고, 시스템을 갖춰 총회가 스스로 발전하게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이대로 우리가 승리한다면…… 회주님이 계시는 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회주님이 돌아가시면 총회는 나락으로 추락하겠죠.”
이중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사후라, 사후…….
언제 그런 것을 생각했던가.
이제는 스스로의 능력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까지도 안심할 수 있어야 그가 중용될 수 있단 말인가.
허탈한 이야기였다.
“그게 자네의 이유인가?”
“결국 시대는 흐릅니다.”
조 이사는 처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은 바뀌고, 시대는 변해가는 겁니다. 회주님, 우리는 낡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젊은이들보다 나은 면이 있다고 우길 수 있지요.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 년 뒤에는 어떻겠습니까?”
“…….”
“십 년 뒤에는요?”
빤한 물음이었다.
“저는 회주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회주님을 이리 궁지로 내몬 강진호의 능력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둘의 능력이 비슷하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젊음. 그 지독하고도 증오스러운, 그리고 사무치게 가지고 싶은 것이 그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래, 그랬군.”
젊음.
빌어먹을 젊음.
그 젊음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계획도, 신뢰하던 수하도, 그리고…….
‘이제는 목숨까지인가?’
이중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네. 가보게나.”
“회주님.”
“그럼 이미 준비를 해뒀겠지. 전하게. 나를 따르지 않을 이들은 모두 떠나라고. 그럼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
“……회주님.”
“이 사람아.”
이중걸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은 아니야. 지금도 억지로 화를 참아내고 있다네.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추한 꼴을 보이지 않게 해주게. 부탁하겠네.”
조남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지금 이중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좋게 포장하고 대의를 앞세운다고 한들 그는 그저 배신자일 뿐이었다.
조남평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절을 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중걸에 등에 대고 말이다. 가만히 절을 마친 조남평이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다 잃었구나.’
이중걸은 가만히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숲 너머에 아마 강진호가 있을 것이다.
‘악연이지, 악연이야.’
강진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이중걸은 별 무리 없이 한국의 무인계를 자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쉬운 것은 없다. 강진호가 아니더라도 김석일을 상대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석일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었겠지.
한국의 무인계를 일통하고 그가 원하던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손에 한 줌.
겨우 남아 있던 가능성이 지금 그의 손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꽉 쥐고 있다고 한들 언젠가는 그의 손 밖으로 흘러 버리는 모래처럼.
“밖에 누구 있는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몇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뭘 하고 있는가, 어서 도망가지 않고.”
“도망이라니……. 회주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도망쳐서 어디로 가라는 말입니까. 집에 가봐야 자식 놈들이랑 며느리밖에 없는데. 저는 저놈들보다 그놈들이 더 무섭습니다. 아이고, 여기서 도망가면 앞으로는 집에만 박혀 살아야 할 텐데,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저도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느니, 그냥 여기 있을랍니다. 쫓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중걸이 피식 웃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네.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가게.”
“거, 말은 바로 합시다. 회주님은 개똥밭에 구르실 겁니까?”
“나야 못하지.”
“거 보십쇼. 본인도 못하는 걸 남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회주님이 인망을 못 얻은 겁니다.”
“맞지, 맞아!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좀 너무하잖습니까. 명령도 명령 같은 걸 내려야지. 뭐? 영남회에 잠입해서 김석일이 뭐하는지 좀 알아보고 오라고? 에라이, 내가 그때 맞은 칼 때문에 아직도 비만 오면 옆구리가 시려서 잠을 못 잡니다.”
“그래도 용케 하긴 했나 보네?”
“까라면 까야지. 예전에는 다 그러지 않았는가.”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장로들을 보며 이중걸이 쓰게 웃었다.
‘상갓집 같군.’
하기야.
원래 그랬지.
정말 슬퍼할 일이 있으면 되레 떠들어 댔지. 슬프다고 우는 놈이 하나라도 있으면 다들 울어버릴까 봐 말이다.
기나긴 분쟁에 잃은 동료가 몇이던가.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울지 않았다. 그저 술 한잔 나누고 밤새도록 왁자지껄 떠들어 댔을 뿐이다.
한 순배, 또 한 순배.
술과 함께 시름도 함께 넘겨 버렸다. 슬픔도 함께 넘겨 버렸다.
그래, 그랬다.
그럼 오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잔하실까?”
“적을 앞에 두고 한잔하자 소리가 나옵니까?”
“노망이 드셨네, 노망이 드셨어.”
“거, 뭐 어때. 한 잔씩이면.”
이중걸의 말에 다들 웃어버렸다.
“거, 회주 찬장에 산삼주 숨겨놓은 거 알고 있습니다.”
“봤는가?”
“그거, 진짜 산삼주인지도 모릅니다.”
“뭔 소린가. 내가 직접 담근 걸세. 정말 산삼주일세.”
“그게 아니라 어느 놈이 몰래 빼 먹고 소주 채워 넣은 건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아직까지 남았을 것 같습니까?”
“뭐? 이 빌어먹을 놈들.”
“크흐흐, 산삼주면 어떻고, 소주면 어떻습니까. 마지막 잔이면 소주가 더 나을 수도 있죠. 가져오십시오. 한 잔씩 하십시다. 딱 한 잔씩.”
이중걸은 웃었다.
더없이 슬프게, 그리고 더없이 기쁘게.
산삼주를 꺼내와 한 잔씩 따른 이중걸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
“마지막이 이래서 안타깝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네. 이제 남은 건 멋지게 죽는 거지.”
조용하다.
장로들의 시선이 이중걸에게로 선명하게 꽂히고 있었다.
아아, 그랬지.
예전에도 이랬다.
싸구려 탁주 한 잔을 꺼내놓고 우리 멋지게 죽자고 소리쳤다.
젊은 혈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에.
그렇게 한 순배.
또 한 순배.
“한잔하세. 저승에서 염왕이 더 좋은 술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이중걸은 눈을 감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초라하게 죽지는 않는다.
‘오너라, 강진호. 노장이 어찌 죽는지 보여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