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18
#617.
대면하다 (2)
“무너지는군.”
이중걸은 창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너진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딱히 억울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오르는 노화를 감당하기가 힘들 지경이었지만, 어느 순간 분노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쌓아 올리는 데는 끊임없는 노력과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 무너지는 순간이라는 것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고통을 부여하는 법.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이중걸의 패착이었다.
‘되레 시원할 정도군.’
정말 처절하게 무너진다.
물론 강진호의 경고를 받은 이들이 이곳을 빠져나가긴 했다. 반수 이상이 빠져나갔으니, 이 전력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없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았다고 해서 딱히 상황이 달라졌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강진호가 이끌고 온 이들의 능력은 압도적이다.
저들이 저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이중걸은 모든 걸 포기하고 초야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중걸이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을 잘 안다.
산속에 산다고 해서 그가 초야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결국 끝도 없이 권력을 탐하게 만들어진 인간이었다.
강진호의 능력이 그의 생각 이상이라면, 그 강진호를 잡아내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게 이중걸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적당히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중걸이 고개를 돌렸다. 장로들이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곧 들이닥칠 겁니다.”
“준비할 게 뭐가 있는가.”
이중걸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는 데는 준비가 필요해도, 죽는 데는 준비가 필요 없지. 죽고 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르는데, 뭘 준비하겠나.”
“손녀와 전화라도 하시죠.”
“일없네.”
이중걸이 피식 웃었다.
“신파는 질색이야. 게다가 그 녀석에게만은 강했던 할애비로 남고 싶네. 자식들에게 그러지 못했으니까.”
“아직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됐네.”
이중걸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쓸데없는 이야기다.
과거야 아무려면 어떤가.
“산삼주 좀 넉넉하게 담아둘 걸 그랬어. 입가심도 못했구만.”
“거, 소주라니까요.”
“산삼주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자네들 중 누가 퍼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저승 가서도 범인은 꼭 찾을 걸세.”
이중걸이 이를 갈았다.
“거, 쪼잔하시기는.”
장로들의 표정이 밝았다.
‘겉으로만 그런 거겠지.’
누가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 그저 필사적으로 버틸 뿐이다.
죽음뿐만이 아니다.
저들의 칼날 아래 쓰러져 가는 이들은 그들의 아들이자 제자였다. 친인이 무참히 쓰러지고 있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잔인한 사람 같으니.”
이중걸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강진호는 강하다.
그리고 잔인하다.
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픈 타입이었다.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이리되니 새삼 실감이 난다. 그가 어떤 이를 상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자, 어깨 펴게. 도착한 것 같구만.”
쾅!
이중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튕겨 나갔다. 그런 후에 마기를 줄줄이 뿜어 대는 이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크르르!”
이성을 겨우 잡고 있는 듯한 마인들이 이중걸을 발견하자마자 살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갈!”
이중걸의 고함 소리가 터졌다.
내공을 잔뜩 실은 사자후에 마인들이 움찔한다.
‘파사의 공능이 있는 사자후로도 완전히 밀어낼 수는 없구나.’
한국 정공의 정통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중걸조차 저 마인들의 정신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껄끄러운 것을 본 것처럼 물러나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너희가 나설 곳이 아니다. 강진호를 데리고 와라.”
강진호의 이름이 나오자 마인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후우우우.”
이명환이 얼굴을 주물렀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손으로 말이다.
“진정해라. 저 말이 맞다. 우리 역할은 여기까지야.”
이명환의 말에 마인들이 숨을 골랐다. 뿜어져 나오던 마기가 천천히 회수되고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으윽.”
“죽겠네.”
그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한 인원을 상대하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전신을 흠뻑 적시고 있는 피 중 반은 자신들의 것이었다. 마기를 걷어내고 나자 정신이 명료해졌고, 그만큼이나 고통이 심해진다.
“쯧쯧, 미련한 것들.”
이중걸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정공이 아닌 무학은 반드시 육체에 부담을 남기게 된다. 지금은 그저 강해졌다는 것에 취해 모든 것이 좋게 느껴지겠지만, 곧 너희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조들이 마공을 배척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충고 고맙군.”
강진호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산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이지, 이제 죽을 사람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야.”
“후후후, 그도 그렇지.”
이중걸이 강진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느낌이군.’
증오스러워야 한다.
강진호의 살을 씹어 먹고 싶어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증오라는 감정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반갑기까지 하다.
뭐라고 할까…….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후계자.
강진호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도 떳떳하게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황적으로 본다면 강진호는 이중걸의 원수이자 후계자였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물려받을 이이기도 했다. 이중걸은 강진호에게 느껴지는 이중적인 감정에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느라 수고했네.”
“딱히 힘들지는 않았어.”
“그래, 그랬겠지.”
강진호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거의 손을 쓴 것이 없다는 뜻이다.
‘겨우 백 명 남짓한 이들에게 모두 무너졌다는 건가?’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난 적은 없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쌓아 올린 것은 적어도 모래성이라 폄하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세력이 약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강한 것이다.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이제 한국은 온전히 자네의 손에 들어가겠군.”
강진호는 대답 없이 이중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제 원하는 것을 이루니 기분이 어떤가?”
“내가 원한 게 아니지.”
“정말인가?”
이중걸이 미묘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리 생각했지. 자네가 물러 터졌다고 말이야. 만약 내가 자네였다면, 절대 나를 살려두지 않았을 걸세. 그런데 자네는 나를 살려두더군. 그때 생각했지. 이 사람이 보이는 것만큼 강단이 있지는 않구나. 그런데…….”
이중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자네, 인간 백정이더군.”
“…….”
“지금까지 자네와 적대한 이들이 맞이한 결과는 둘 중 하나였지. 죽거나, 아니면 자네의 개가 되거나. 아주 간명한 선택지지. 그런데 그중 딱 둘이 거기에서 벗어나 있지. 그게 누군지 아는가?”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중걸도 딱히 강진호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나와 김석일일세. 김석일은 사고였다 치지. 아니, 그놈은 오히려 죽음보다 더 못한 꼴을 당했지. 그만큼이나 고통을 주다 놓쳤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나는 다르단 말이지.”
이중걸이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내가 필요한 것처럼 말했네. 하지만 나를 활용하려 들지 않았지. 내가 자네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던 것처럼 애초에 자네도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거야. 그렇지 않나?”
이중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었다.
“나는 그런 거지. 벌레 소굴에 놓여 있는 미끼 같은 것. 그저 거기에 두는 것만으로 벌레가 꼬이지. 그리고 모인 벌레에 살충제를 뿌려 버리면 집 안이 깨끗해지지. 그렇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
“그렇다고 하면 마음이 편해지나?”
“진실을 알고 싶은 것뿐이다.”
“진실은 하나지.”
강진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했다면, 결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나는 네게 뭔가를 요구한 적이 없어. 상황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일을 꾸민 것은 너지. 그게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해서 남 탓하는 건 적당히 해.”
“남 탓이라…….”
“그래, 남 탓. 더 분명히 말해줄까? 그게 불만이었으면 내게 왔으면 그만이야. 나도 뭔가를 맡고 싶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해결될 일이었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없어야 가능한 거니까.”
이중걸이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우리는 공존이 불가능했다는 거군.”
“가능했어. 네가 욕심을 버렸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그게 모든 일의 원인이야.”
“욕심이라…….”
이중걸이 한숨을 쉬었다.
“할 말은 많네. 하고 싶은 말은 쌓여 있지.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남길 말은?”
“이보게, 강진호.”
이중걸이 가만히 강진호를 보고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이 굴지 말게. 그래도 나도 무인이란 말이지. 자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순순히 목을 뺄 생각도 없어.”
“알고 있어. 그래도 유언은 들어줘야지.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야.”
강진호는 이중걸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만한 조직을 이끌어보지 않은 자는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알지 못한다.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총회를 만들고 운영해 온 이중걸을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를 인정하겠는가.
무인으로서가 아니다.
인간 이중걸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길이 다르기에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이중걸에게 딱히 악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손녀는 죄가 없어.”
“알았다.”
강진호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에서 이중걸은 이현주가 차별받을 일은 없을 거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이 풍진세상 즐겁게 잘 놀았으면 됐다. 어떻게 해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강진호는 눈물 콧물을 빼며 빈다고 해서 살려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단호하게 목을 쳐버릴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오게. 신분이니 뭐니 그런 건 다 버리세. 마지막은 무인으로서 죽고 싶네. 자네는 지금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최고의 무인이겠지. 그래, 죽는다면 자네의 손에 죽는 게 영광스럽지.”
강진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진 그의 주먹에서 먹물 같은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죽음에 영광 같은 건 없어. 죽음은 죽음일 뿐이지.”
“……그런가.”
“걱정할 것 없어. 확실하게 죽여주지. 이제 더 이상은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