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19
#618.
대면하다 (3)
‘시작했나?’
지휘를 넘기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이현수의 눈에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강진호와 이중걸의 모습이 보였다.
이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이 된다.
긴장할 일도 아니건만, 긴장이 된다.
객관적으로 평하자면, 이중걸은 강진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딱히 변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현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중걸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일까 봐?
그게 아니다.
이 싸움은 전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지금껏 한국의 무인계를 대표해 온 이중걸과 앞으로 한국의 무인계를 대표해야 할 강진호가 맞붙는 승부다.
결과가 빤하더라도 마음을 놓고 볼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이제야 여기까지 왔군.’
처음 강진호를 따르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현수는 언젠가는 이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이중걸은 범이다.
늙었다고 해서 풀을 뜯을 리는 없다. 노쇠한 호랑이는 결국 젊은 호랑이의 발톱에 찢겨 죽기 마련이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었다.
‘강진호를 젊은 호랑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지만.’
나이로 따진다면 오히려 이중걸보다 연상이다. 육체가 젊을 뿐이다.
이현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겁다.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많은 이들이 있음에도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이중걸이었다.
이중걸의 움직임은 더없이 진중했고, 또한 격렬했다.
여기에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강하다.
이현수가 이중걸에게 느낀 인상은 확고했다. 강하다. 그리고 빠르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말이다.
강진호와 바토르, 그리고 나이트 위긴스를 제외한다면, 총회에 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저 고령에도 이중걸은 영활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아무리 이중걸이 빠르게 움직이고 강하게 후려쳐도 강진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강진호는 너무도 수월하게 이중걸의 모든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마치 후회 없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라는 듯 말이다.
목숨을 건 싸움임에도 마치 지도 대련과 같은 느낌이 났다.
조금은 서글프다.
언젠가는 모두가 후대에 밀려 사라진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살아생전에 그 자리를 놓지 않던 이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결과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밀려나는 이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저 자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의 이중걸처럼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끌어모아 저항해야 하는 걸까?
언젠가는 이현수도 저런 상황에 처할 날이 올 것이다.
더 이상은 내가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날.
그때, 이현수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이 어쩌면 지금 이 승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현수는 긴장을 풀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통하지 않는다.
혼신의 조공이 너무도 쉽게 막힌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 것도 아니다. 저 방어를 뚫고 강진호의 얼굴에 혼신의 일격을 작렬시킨다고 해도 과연 타격이나 줄 수 있을까 싶다.
마치 아이와 어른이 싸우는 것 같다.
‘이 나이에 아이가 된 기분이라니.’
이것도 신기한 경험이다.
옛 기억이 아련하게 난다.
아직 그가 어리던 시절에 스승과 대련을 할 때면 이런 기분이었다.
태산같이 크고 강인하던 스승에게는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상쾌할 정도로 공격을 퍼붓고 나면 스승은 그의 머리에 가볍게 일격을 먹이고는 대련을 종료하고는 했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시간이 흐르며 스승이 그의 공격을 힘겹게 막기 시작했고, 마침내 스승을 이기는 날이 왔다.
그때, 스승이 지은 미소 속에 숨어 있던 한 줄기 씁쓸함.
‘이해하는 날이 와버렸군.’
후대가 선대를 추월하는 것은 모든 선대의 바람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아니, 아니다.
선대는 추월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언제나 먼저 걸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추월당하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이중걸은 강렬한 일권을 날리며 강진호를 응시했다. 그의 혼신을 다한 일권이 강진호의 손에 가볍게 튕겨 나간다.
‘나의 삶은 가치 있었나?’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남겨진 이름이란 건 결국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가 진정으로 남기고 싶어 한 것은 무엇인가.
자식마저 돌보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살아온 그의 삶은 대체 무엇을 남겼단 말인가.
이중걸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강진호 역시 굳이 그를 쫓지 않았다.
이미 승부는 났다. 싸우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풀이에 다름없는 그의 마지막 싸움에 불만 없이 어울려 준 강진호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얼마든지.”
“……총회는 어찌 될까?”
이중걸의 얼굴에 회한이 묻어났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여기니, 그 생각밖에 나지 않는군.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총회가 자식인 모양이야. 죽은 자식 놈이나 손녀도 걸리지 않는데, 총회가 마음에 걸리는군. 대답해 주게나, 강진호. 총회는 어찌 되는가?”
가만히 이중걸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내가 몸담은 곳에서 실패했다.”
강진호의 말에 이중걸의 눈이 깊어졌다.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총회는 강해질 테니까.”
“그런가…….”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적이지만 이 남자는 신뢰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중걸이 그토록 지독하게 주위를 억눌러 온 것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중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이보게, 강진호.”
“말해.”
“회주 자리에 앉게.”
“…….”
이중걸은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지위를 유지하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네. 방 회주에게도 그리 좋은 게 아닐세. 차라리 담백하게 자네의 입장을 인정하고 당당히 회주가 되게나. 그래야 총회의 아이들도 안심할 게 아닌가.”
“생각해 보지.”
“그리고 부탁함세. 내 밑에 있던 이들을 차별하지 말아주게나. 내가 함께하자고 하면 그들은 어쩔 수 없었던 게야. 부탁하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부탁하지.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이 뭔지는 알고 있네. 그래, 강해져야지. 중국도, 일본도 호시탐탐 한국을 노리고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지. 결국 어떤 불만이 있더라도 자네는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킬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네. 다만, 한국 무학의 명맥을 끊지는 말아주게.”
“약속하지.”
“그래. 그럼 그걸로 됐네.”
모든 걸 내려놓고 나면 이리 마음이 편한 것을 왜 그리 손에서 놓지 못해 아등바등했다는 말인가.
‘고개를 돌리면 피안인 것을.’
죽음은 두렵다.
다리가 덜덜 떨려올 만큼 말이다.
하지만 이중걸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만큼 어떻게 죽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이 그 평생의 지론이었다. 이제는 그의 삶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오게.”
이중걸이 양팔을 벌렸다.
강진호가 가만히 이중걸을 바라보다가 우수를 들어 올렸다. 그의 우수에 먹물 같은 마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움직이려던 강진호가 멈칫했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다.”
그처럼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강진호도 모른다, 사후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몇 번이고 죽어보았지만, 단 한 번도 죽어보지 못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남겨진 것들은 살아가지. 총회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당신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긴장으로 가득 찬 이중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의 얼굴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의외로 좋은 면도 있는 남자로군.”
“그럼.”
그때, 이중걸이 작게 뭐라고 속삭였다.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숨에 이중걸을 향해 날아들었다.
둘의 눈이 서로 마주친다.
그러고는…….
투웅!
강진호의 우수가 이중걸의 가슴에 정확히 와닿았다. 커다란 가죽 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중걸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강진호가 그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물러서자, 이중걸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깨끗하다.
옷조차 상하지 않았다.
‘시체는 깨끗하게 남기겠군.’
얼떨떨해하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아마도 강진호가 혹시 그를 살려주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겠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을.
가슴에서 느껴지는 둔통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이다. 심혈관이 끊어진 이가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부탁하겠네.”
“걱정할 것 없어.”
이중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의 육체가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털썩.
싸늘한 소리.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라기에는 너무도 싸늘하기만 한 소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이중걸을 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회주!”
“회주님!”
이를 악물고 상황을 응시하던 장로들이 이중걸에게로 달려들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이중걸은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으으으…….”
낮은 흐느낌.
원망의 눈초리.
익숙하다.
하지만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다.
“정리해. 돌아간다.”
강진호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야, 이놈아! 우리도 죽이고 가라!”
“회주! 회주님! 어흐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강진호는 결코 빠르지 않게 걸어 저택을 빠져나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현수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강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총회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집으로 가지.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예. 그럼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부탁한다.”
강진호는 천천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군.’
정리해야 할 이를 정리했는데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다른 법이니까.
저택을 나서자 장내를 정리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진호에게로 쏠렸다. 강진호를 발견한 이들이 황급하게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주 자리에 앉게.”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다.
총회에서 한발 물러서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니라고 해도 모두가 그리 생각한다면,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켜보는 이들을 지나 산을 내려가는 길에 접어든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탁하겠네.”
강진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조금 전보다 한층 더 회색으로 뒤덮인 것 같은 저택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후세계라는 게 있다면…….
이중걸의 영혼은 저곳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면 이미 이 곳을 떠난 뒷일까?
“걱정할 것 없어.”
강진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이중걸에게 보내는 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