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24
#623.
구박받다 (3)
부우우웅.
한은솔은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흔들리면 안 돼.’
오늘은 마녀의 기분이 최악으로 떨어진 날이다. 이런 날은 도로의 덜컹거림조차도 그녀를 자극할 수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덜컹거림이지만, 그런 걸 이해해 줄 사람이 아니다. 결국 한은솔은 비포장도로를 흔들리지 않게 달리면서 최연하가 짜증을 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운전을 하는 신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뭐야! 왜 이리 좌우로 흔들어! 똑바로 운전 안 해?”
와, 이걸로도 안 되나?
구박하기로 마음먹은 상대에게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한은솔이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가고 있는 건데요.”
“너, 지금 말대답 하는 거야?”
“와! 누나, 지금 성격 진짜 나빠 보여요.”
“뭐 어때! 사실인데.”
“솔직하고 쿨한 게 이렇게까지 나빠 보일 수 있다니.”
‘나는 원래 성격이 더러우니 이래도 괜찮다’라는 무적의 논리가 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니가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으면 내가 오늘 이런 일을 당할 이유도 없었잖아. 그 느끼한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는데, 뭘 했기에 그놈 하나 마크 못하고 풀어놓는 거야? 너는 아웃이야! 아웃!”
‘히이이익!’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한은솔은 액셀을 조금 더 세게 밟는 것으로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한 탈출을 서둘렀다.
호텔! 호텔까지만 가면 된다!
호텔에 가서 저 마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면 일차적으로는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중국까지 따라와서는!’
중국에 오면 힘들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립무원이 된 최연하의 히스테리가 자신을 괴롭힐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까지 서슴없이 따라올 수 있던 이유는 이번 일을 무사히 마치게 되면 그의 커리어가 수직상승할 수 있을 거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저 최연하를 데리고 중국 오지까지 들어가서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치고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평생 동안 이 업계에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중국 오지로 배우를 끌고 가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일인데, 그 배우가 최연하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2년 동안 최연하의 매니저로 버티면서 업계의 신화를 쌓아가고 있는 그의 커리어에 커다란 방점 하나가 찍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최연하가 글로벌 배우로 입지를 다져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고, 설사 드라마가 망한다고 해도 그의 노고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살살 몰라고, 인마!”
“그럼 천천히 가도 돼요?”
“천천히는 뭔 천천히야! 너, 내 휴식 시간 1초라도 줄어들면 모가지 잘라 버릴 거야!”
‘내가 차라리 군대를 다시 가고 말지.’
최연하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극한의 스트레스와 짜증으로 중무장한 최연하는 마치 휴가 잘린 말년 병장처럼 꼬장을 부리고 있었다. 나름 빡센 군대에서 빡세게 군 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한은솔도 재입대의 충동을 느낄 만큼 말이다.
“아아아악! 짜증 나!”
그리고 이제는 제 스스로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악까지 하고 있었다.
최연하가 멀쩡(?)할 때도 매니저계의 북파 공작원이라는 평가를 받던 한은솔이건만, 이제는 숫제 외계인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아줌마…… 오늘따라 왜 저리 열 받았지?’
물론 류웨이가 사람 속을 벅벅 긁어놓기는 했지만, 그건 항상 있는 일이 아니던가. 저리 화를 낼 정도는 아닐 텐데?
남들이야 최연하가 화를 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되묻겠지만, 오랫동안 최연하를 겪어온 한은솔은 알 수 있었다.
최연하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화를 내는 데는 이유가 너무도 분명하다. 그 이유라는 것이 남한테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고 쪼잔해서 보통은 다른 이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최연하가 내는 짜증의 원인은 한은솔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오라고 하면 빨딱빨딱 와야 할 거 아냐!”
“…….”
거…….
도무지 알 수 없던 이유를 알아낸 한은솔은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강진호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한은솔이었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한국과 중국이 뭐 그리 멀다고 저리 말하는데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단 말인가.
강진호가 희생하여 얼굴 한 번만 비춰주면 모두가 편할 텐데.
“멀었어?”
“다, 다 왔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호텔 건물을 보며 한은솔이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귀국하면 다른 자리 알아봐야지.’
쾅!
‘문 부서지겠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처세의 기본이다. 상대가 얼굴에 ‘지금 나 건드리면 너는 오늘 현실에도 지옥이 강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최연하라면 더더욱.
호텔 로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최연하의 뒤를 따르며 한은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촬영은 언제 끝나는 거야?’
끝나지 않는 해외파병을 나온 기분이었다. 그나마 해외파병이면 적과 싸우면 그만이지만, 이 지옥 같은 임무는 아군의 공격을 버텨야 한다. 그것도 무저항으로.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또각또각.
최연하의 힐이 호텔의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며 나는 저 소리.
다른 이들에게는 어찌 들릴지 모르지만, 한은솔에게는 저 소리는 천사의 노랫소리와 다름없었다. 길고 긴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소리니까.
물론 최연하가 자신의 호텔 방에 들어간 이후에도 자잘한 심부름들을 해줘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에 비한다면 말이다.
“아, 오늘 여기 공기 왜 이래?”
멀쩡한 공기 탓까지 시작됐다.
이쯤 되면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단순히 한은솔이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대로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최연하가 언젠가는 제대로 폭발하고 말 것이다.
‘안 되지. 그건 정말 안 되지.’
한국에서라면 최연하가 폭발한다고 해도 어찌어찌 무마할 수 있다. 아무리 SNS가 발달된 사회라고는 하지만 여자 연예인에 대한 악성 루머는 언제나 넘쳐 난다. 제대로 기사화되지 않는 이상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일단은 가십으로 취급되기 마련이니까.
연예계 기자들에게 두루두루 뿌려놓은 선물과 뇌물이 있으니, 웬만큼 커다란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기사화만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아무리 한은솔과 소속사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다고 해도 중국의 기자들을 모두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고를 치는 순간 기사가 뿜어져 나올 것이고, 최연하의 이미지는 박살이 날 것이다.
‘게다가 중국이잖아.’
안에서 새는 바가지야 밖에서도 새기 마련이지만, 이왕 바가지가 샐 것이라면 안에서 새는 게 낫다. 적어도 국가 망신은 당하지 않을 테니까.
저 여자는 전혀 그런 자각이 없겠지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듣는 것만으로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최연하는 한국 대표 여배우로 중국에 와 있는 것이다. 사고를 친다면 단순히 그녀 하나의 망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애국심이 넘친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라 망신만은 피하고 싶은 한은솔이었다.
“어…… 어머!”
‘이런 것 하지 말라고!’
망신을 피하기 위한 제일조건은 사고가 날 만한 여지를 차단하는 것이다. 호텔 로비에서 자국 팬과 조우하는 것 같은, 그런 여지 말이다.
최연하를 보고 이쪽으로 주춤주춤 다가서고 있는 이들은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다. 아마 이쪽으로 관광을 온 모양이다.
“최연하 씨 아니세요?”
한은솔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최연하의 기분이 최악인 지금 저 접근을 차단해야 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슬쩍 최연하의 눈치를 살핀 한은솔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최연하 씨 맞으시구나? 너무 반가워요! 죄송한데,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사진 같이 찍으실래요?”
이미 최연하는 프로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다가가 셀카를 같이 찍자고 제안하는 최연하였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지랄 맞은 성격으로는 당당하게 국가대표를 자부할 수 있는 최연하가 지금까지 커다란 구설수 없이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팬서비스였다.
최연하의 성격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져도 직접 최연하를 만나서 좀 과하다 싶은 팬서비스를 받은 팬들이 헛소리라며 무마를 시켜준 것이다.
물론 그건 과도한 팬심으로 인한 실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업계 관계자를 대하는 최연하와 팬을 대하는 최연하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보라.
그냥 대충 사인을 해서 보내면 될 일이건만, 최연하는 굳이 셀카를 몇 번이고 다시 찍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요리조리 앵글을 돌리고 있다.
저건 지금 자기가 잘 나오게 사진을 찍는 게 아니다.
가엽게도 최연하와 함께 사진을 찍는 형벌을 받는 불쌍한 오징어들이 그나마 사람답게 나올 수 있는 각도를 찾고 있는 것이다.
사진 하나 찍어주는 것도 귀찮아하는 연예인이 많은데, 최연하급 정도 되는 사람이 저런 일을 해주는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최연하의 모든 사업적 가식들을 지켜봐 온 한은솔조차도 감탄을 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저게 가식이 아니라는 게 더욱 대단한 거지만.’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다.
한 번은 최연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렇게 일일이 팬들을 상대해 주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그때, 최연하가 말한 대답을 한은솔은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힘드냐고? 당연히 힘들지, 멍청아. 피곤해 죽겠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상대해 주는 게 얼마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인 줄 알아? 나도 못 본 척 무시하고 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냐. 게다가 일 끝나고라면 또 괜찮지. 쉬는 날에 얼굴 가리고 놀러 나갔는데 또 귀신같이 알아보고 와서 사인해 달라는 사람이 있을 때면 온 세상 CCTV가 나만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애들이 공황장애 걸리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최연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야, 내가 솔직히 성격이 좋아, 머리가 좋아? 잘난 것 하나 없어. 오로지 얼굴 하나 반반한 것뿐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쁘다고 좋게 봐주지 않으면 밥도 못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무슨 말이냐고? 나 예쁘다고 사인 받고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팬들이 없으면 나는 굶어 죽어. 그 사람들 덕분에 내가 광고 찍고 드라마 나가면서 먹고살잖아. 사람은 원래 돈 주는 사람에게는 잘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몇 번이고 포즈를 고쳐 잡으며 셀카를 찍는 최연하를 보며 한은솔은 피식 웃고 말았다.
대단한 사람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