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25
#624.
구박받다 (4)
“아, 죽겠다!”
최연하는 호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파에 엎어졌다.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노곤노곤하다.
‘습해 죽겠네.’
손을 뻗어 에어컨 리모컨을 잡은 최연하가 전원 버튼을 연타했다.
중앙 난방 시스템이 최연하가 원하는 시원함을 전혀 만들어주지 못해서 직접 사다 설치한 에어컨이었다. 에어컨 설치는 안 된다고 울상을 짓는 호텔 측에다 이거 놔두고 갈 거라는 말로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
물론 허락을 얻어낸 것은 최연하가 아니라 한은솔이었지만 말이다.
이곳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최고급 룸을 잡았음에도 손님을 지나가는 개 보듯 하는 저 호텔리어들도 짜증이 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습기도 짜증이 났다.
음식은 입에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라면으로 때운 지도 몇 달이 됐다.
그러니 체중이 쭉쭉 줄어들 수밖에.
‘저 멍청이 놈은 내가 일부러 이러고 있는 줄 알겠지.’
그녀가 맡은 배역은 병약하다. 초반에는 활달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병이 진행되어 초췌해지는 캐릭이다. 멍청한 한은솔이나 감독은 그녀가 캐릭터에 맞춰서 점점 체중을 관리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네요.”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이라느니,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는 자세라느니, 번듯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실제로 최연하가 거의 먹지 못해서 체중이 극단적으로 줄고 있다고 하면 얼굴이 새파래지겠지.
적어도 한은솔 쪽은 말이야.
‘피곤하다니까.’
너무 진지한 쪽도 상대하기 힘들다. 아마 최연하가 정말로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은솔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지금도 바쁜 주제에 한국으로 가서 음식을 공수한다고 난리를 치겠지. 제대로 될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아, 입장 곤란하네.”
최연하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욕실로 걸어가 욕조에 물을 틀었다.
물을 다 받는 데 한참 걸리겠지. 그사이에 뭐라도 좀 먹어야 할까?
최연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인이 먹는 것에 이리 예민한 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패스트푸드든 뭐든 잘도 먹어 치웠는데……. 한 번씩은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이러다가 여배우로서의 생명이 끊기는 게 아닐까 걱정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필사적인 자기 관리로 체중이 불어나는 것만은 막아왔지만 말이다.
어쩌면 여기는 천국일지도 모른다. 딱히 관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체중이 줄어들다니. 지금껏 수도 없이 꿈꿔온 세상이다. 물론 꿈과 현실은 생각 이상으로 달랐지만.
“이것도 내일까지만 하면…….”
일단 내일까지 촬영이 끝나면 고궁 촬영분은 한동안 안녕이다. 이제는 밖에서 촬영할 수 있으니 컨테이너든 뭐든 마음껏 쓸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일은 없는 법이다.
RRRR.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최연하가 고개를 돌렸다. 소파 위에 대충 던져 둔 휴대폰까지 다가간 최연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액정을 바라보았다.
한은솔.
액정에 찍힌 이름을 확인하자 최연하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아, 진짜 싫다.’
한은솔이 싫은 게 아니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한은솔의 전화가 싫은 것이다. 그 녀석도 이제 일을 마무리했으니 쉬고 싶을 것이다. 그런 놈이 별다른 일도 없이 자신에게 전화를 할 리가 없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라는 건 대체로…….
최여하는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저…… 누나, 감독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그런데?”
[오늘 촬영분이랑 어제 촬영분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찍는다네요. 복장이 영 별로라는데…….]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도 난감함이 느껴졌다. 이 감독은 이상하게 완벽주의자라 마음에 들지 않는 컷이 나왔다 싶으면 그 신만 다시 찍는 게 아니라 그 앞과 뒤를 모두 바꿔 버렸다.
소위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처음 이 감독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할 때는 완벽주의자라는 소문과 커리어에 만족했는데, 그게 이렇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이야.
“이틀 치?”
[예. 이틀 치요.]한은솔 역시 난감할 것이다. 최연하가 이곳에서 벗어나는 걸 얼마나 원하는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소식을 전해 들은 최연하가 얼마나 날뛸지 걱정하고 있겠지만…….
“알았어.”
[예? 누나, 괜찮아요?]“그래, 괜찮다. 쉬어.”
[어? 누나?]최연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좋은 쪽으로 일이 흐를 리가 없었다. 항상 이쯤이면 된다 싶을 때 한 방 더 들어오는 게 인생이니까.
짜증을 내고 싶은 심정은 끝도 없지만, 적어도 그 대상이 한은솔은 아니었다. 한은솔도 사람이다. 그녀가 내는 짜증을 모두 받아내다가는 스트레스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요즘 보니 머리도 빠지는 것 같던데 말이다.
“어휴, 진짜.”
고개를 들어 천정을 한참 바라보던 최연하가 몸을 돌려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식욕이고 뭐고 싹 사라졌다. 그냥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을 뿐이다.
옷을 벗어 세탁통에 던져 넣은 최연하가 가볍게 샤워를 하고는 욕조로 들어갔다.
찰방.
따뜻한 물이 발에 닿으니 몸이 노곤해진다. 욕조 깊숙하게 몸을 담근 최연하가 목을 뒤로 젖혔다.
‘피곤해.’
단순히 몸이 피곤한 게 아니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더 심했다. 작은 일에도 자꾸 날카로워진다. 최근에는 주변 사람이 말하는 게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쪽으로든 한계가 찾아왔다.
“바보.”
이럴 때 한 번 와주면 좋을 텐데.
뭔가를 바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럴 때는 원망하게 된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잠깐 있어주기만 해도 이 피로가 모두 가실 것 같은데.
여전히 혼자 있는 호텔 방에서 잠드는 것은 무섭다. 때때로 눈을 감으면 그 어두웠던 터널 아래가 생각나니까. 불을 켜놓고 자는 방법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다가 정말 우울증이라도 찾아오지 않을까 무섭…….
RRRR.
전화기가 울리자 최연하가 액정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연결하며 귀에 댔다.
“알았다고! 그냥 촬영한다고! 나 괜찮으니까…….”
[잘 들어가신 모양이군요.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혹시 지금 샤워 중? 영상 통화라도 해보고 싶은데, 실례겠죠? 후후.]“…….”
최연하는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 액정을 확인했다.
액정에는 당당히 ‘버터’라고 적혀 있었다.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어쩌자고 확인도 안 하고 통화를 눌렀단 말인가.
[감격이라도 했나요? 말이 없네요. 아까 말씀드린 일 때문에 전화를 드렸는데, 어떠신가요? 호텔 방이 영 적적하실 텐데, 말씀드린 별장에 가보실 생각은 없나요. 제가 연하 씨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이 새끼야아아아아!”
최연하가 전화기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 할 거 아냐! 눌린 버터처럼 생긴 게 누굴 꼬시겠다고 수작질이야! 내가 백팔 번을 다시 태어나도 너 같은 놈이랑 말 섞을 일 없어! 전화하지 마! 차단할 거니까,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뚝!
전화를 끊어버린 최연하가 수건 받이에 전화를 집어 던졌다. 전화가 몇 번 더 울리는 것을 본 최연하가 얼굴을 움켜잡았다.
“으아아아아아! 강진호오오오오! 이번에도 안 오면 내가 찾아가서 목을 물어뜯어 버릴 거야아아아아아아아!”
분위기도 잡을 사람이 잡는 것이다. 최연하에게는 무리였다.
* * *
“썩을 년.”
류웨이가 험악한 얼굴로 전화기를 집어 던져 버렸다.
갑자기 방언처럼 터져 나온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 뜻이 곱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어조만으로 욕이라는 것은 충분히 전해졌으니까.
“소국 년이 감히 콧대를 세우다니.”
류웨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누구인가.
중화권 최고 스타 반열에 오른 류웨이다. 그런데 그를 이런 식으로 천대하다니.
그것도 중국인도 아니라 한낱 제후국에서 온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설쳐 대고 있지 않은가.
얼굴만 반반하지 않았으면 벌써 본때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지?”
“오빠, 왜 그래? 기분 좀 풀어.”
“자, 여기 한잔하고.”
류웨이가 자신의 앞으로 들이밀어진 술잔을 후려쳤다.
“다 꺼져! 이 망할 년들아!”
“꺄악!”
술잔이 테이블을 덮치며 술병이 엎어지고 사방으로 술이 튄다.
“오, 오빠.”
“꺼지라고 했어!”
류웨이의 눈치를 보던 여자들이 풀죽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갔다.
“제길.”
류웨이가 쓰러진 술병을 움켜잡아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나름 예쁘다는 것들만 불러들였는데, 최연하를 보던 눈에는 도무지 들어차지 못했다.
‘예쁘긴 더럽게 예쁘지.’
그만큼 예쁘지 않았더라면 하찮은 빵즈 따위에게 신경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년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하차할 생각까지 했으니까.
감독의 영향력이 막대하지 않았더라면 배역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우 미팅 자리에서 망신을 줘 내쫓을 생각까지 했는데, 설마 저런 얼굴을 가진 여자가 나올 줄이야.
처음 마주치는 그 순간부터 넋이 나가 버렸다. 아름답다는 말에 대한 완벽한 용례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런데…….
“감히.”
감히 자신의 앞에서도 도도할 줄이야.
중국의 잘나가는 여배우들도 그의 연락처를 따내기 위해서 안달복달한다. 그런데 제까짓 게 뭐라고 콧대를 세운단 말인가.
튕기는 것 정도는 받아줄 수 있다.
너무 쉬운 여자는 재미가 없는 법이니까.
튕기는 여자를 꼬셔서 함락시킬 때의 즐거움은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별미가 아닌가.
그런데 저 여자는 지금 튕기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류웨이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자신이 뭐가 부족한가.
매너가 부족한가, 그게 아니면 재산이 부족한가.
중화권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는 자신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류웨이가 술병을 아래로 내려쳤다.
‘이러다가 정말 일 한 번 벌이겠어.’
좋은 얼굴로, 순진한 얼굴로 상대해 주는 것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잘 꾸며진 매너가 무너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촬영이 끝나갈수록 초조해지고 있었다.
“거,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형님?”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를 보며 류웨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가. 잠깐 혼자 있고 싶다.”
“거, 형님답지 않으십니다.”
“뭐?”
“그깟 한국 년 하나 뭐가 대수라고 이런 모습까지 보이십니까?”
“……너, 이 새끼?”
“에이,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형님한테 무슨 불편한 일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해결하는 게 저희 역할 아닙니까?”
“…….”
류웨이가 그의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흑사회.
중국 연예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흑사회와의 끈이 필수적이다. 이놈은 그가 연관되어 있는 흑사회에서 나온 놈이었다.
“뭘 어쩌겠다는 거냐?”
“형님은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그년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드리면 될 것 아닙니까?”
“…….”
“그게 우리 특기이지요.”
음흉하게 웃는 놈을 보며 류웨이가 눈을 빛냈다.
‘그래. 그깟 빵즈 년.’
어차피 결혼까지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방식이 무슨 상관인가.
“너무 거칠게는 하지 마라.”
“저 부드러운 남잡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웃으며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류웨이가 아무 말 없이 술병을 움켜잡았다.
가지면 그만이다.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하지만 류웨이는 몰랐다.
세상에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말이다.
그걸 알지 못한 게 류웨이의 가장 큰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