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27
#626.
실감하다 (1)
강진호는 이 세상으로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과거의 삶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다.
중원에서의 삶은 그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앗아갔다. 원하지 않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에 치러야 한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렇기에 강진호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천 번의 선택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이 생을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과거의 삶을 조금, 아주 조금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아니시에이팅이 터지고 있었다.
그냥 욕을 하려면 욕을 하면 그만이지, 왜 꼭 시작할 때는 저 ‘아니’가 붙는단 말인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불어볼 자신은 없었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넥타이가 돌아간 줄도 모른 채 열을 올리는 조규민을 상대로 그런 질문을 할 자신은 없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면서 어떻게 지금 중국에 간단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는 선후가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는 강진호 씨는 조금 무관심한 면이 있어도 일의 선후는 확실하게 구분하시는 분이셨는데, 어떻게 지금!”
강진호는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랬지.’
그의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한때는 세상 만물들이 그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강진호의 표정이 조금만 좋지 않아도 온 마교가 공포에 떨었고, 천하가 숨을 죽였다.
명실상부한 마교의 이인자인 청마조차도 강진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언행을 조심할 정도였다.
잘못에 대한 질책?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었다.
잘못이라는 것은 법도와 법칙, 그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동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원에서의 강진호는 그 법도와 법칙을 정하는 존재였다.
붉은 것도 강진호가 푸르다 말하면 푸른 것이 된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에게 잘잘못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랬는데…….’
“듣고 계십니까, 강진호 씨?”
“……네, 듣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 있는데!”
“…….”
아아, 옛날이여.
강진호의 얼굴에 회한이 어렸다.
물론 예전의 삶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어느 한쪽을 백 프로 선택한다는 것이 어느 한쪽이 백 프로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금만!
아주 조금의 존중만!
“듣고 계십니까? 예?”
“……네.”
강진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한다.
황정후 회장이 참여한 이후로 재단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참 좋은 일이지만, 계획이 빨리 진행된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믿을 만한 인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이 빨리 진행된다는 것은 기존의 인력에게 그 업무가 과도하게 몰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그 기존의 인력이라는 게…….
“저 죽겠다구요!”
이 사람이다.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과 거칠어진 피부만으로도 조규민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럼 안 하면 될 텐데.
“뭐라구요?”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마음이라도 읽나?
강진호는 눈가를 문질렀다.
평소였다면 강진호도 이런 불만을 웃는 낯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짜증을 내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죽을 것 같다.’
어제 받은 대미지가 너무 심했다.
어설픈 정색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작전상 후퇴를 시도한 어머니와 동생은 강진호가 실수를 하자마자 굶주린 피라냐처럼 강진호를 후려쳤다. 물론 말로 말이다.
새벽까지 너덜너덜하게 털린 강진호는 말하다 지친 두 사람이 회복을 시도하는 틈을 타 방으로 도주했다. 그 와중에 화장실에 가는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아버지는 냉정하게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배신이다.’
가족 간의 정이 우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여하튼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멘탈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굳건하다고 믿어온 스스로의 정신이 자잘한 공격의 연타에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동료란 건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강진호는 조규민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했다.
이 사람이 예전에 이사장 대리로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는데, 이 사람은 실무자보다는 뭔가 사람에게 설교를 하고, 구박을 하는 역할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육사를 갔으면 좋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저 입에서 ‘중대장은 여러분에게 실망했다’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강진호 씨가 여기에 계신다고 해서 제 일을 덜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든, 명분적으로든 이건 강진호 씨가 할 일은 아니니까요. 일을 나누면 일이 더 불어나는 사태가 터질 수도 있다는 걸 저도 압니다. 예, 압니다.”
“…….”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사람이 이리 괴로워하고 있으면 적어도 같이 괴로운 척이라도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중국? 중구우우욱?”
아무래도 한중 관계가 많이 경색되긴 한 모양이었다.
조규민도 그렇고, 어머니와 강은영도 그렇고, 중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만으로 저리 정색을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끄응.”
조규민이 자리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다.
딱히 괴롭힌 것도 없는데 패잔병 같은 그 모습을 보자 양심이 쿡쿡 쑤셔오기 시작했다.
‘이현수라도 지원해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새삼 주변에 믿을 만한 사무직이 드물다는 것을 실감하는 강진호였다.
이현수라도 보내줄 수 있었다면 조규민의 부담이 반으로 줄었겠지만…….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이현수도 조규민의 처지와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장로들을 숙청한 덕분에 그들이 맡고 있던 일이 모조리 이현수에게로 몰렸다. 장로들이 하는 일이라 해봐야 고양이 손 하나 더한 정도이지만, 그 고양이 손의 수가 묵직하게 모이니 그것도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현수는 새로이 조직을 정비하는 와중에 장로들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축재한 재산을 회수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업무량을 따진다면 조규민이 형님이라 불러야 할 수준으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교육 인원들이 모일 때까지 할 일이 없어진 나이트 위긴스와 옆에 있다 괜히 붙잡혀 온 엘레나까자 한 팔 거들고 나서서 과로사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해야 할까?’
타이밍이 좀 이상하다.
미루고 미뤄온 일을 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가는 건데…… 하필 타이밍이 이래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에게 일을 미친 듯이 밀어 넣고 휴양이라도 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강진호가 한국에 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왜 가시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만…….”
조규민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중국에서 할 일을 알고 있다고!
거의 호러 영화 수준이었다.
괜히 움찔한 강진호가 은근히 조규민의 시선을 피했다.
“……가셔야 한다니 보내는 드리겠습니다. 여기!”
조규민이 품 안에서 봉투를 꺼내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항공권입니다. 그쪽으로 가시면 이번에도 저희 지부에서 가이드가 나올 겁니다.”
“아니, 그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항공권도 제가 예매하면 되는데…….”
괜히 말을 꺼내서 바쁜 사람에게 쓸데없는 일까지 시켰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뇨. 뭐…….”
조규민이 피식 웃었다.
“엄살 한 번 부려봤습니다. 사실 강진호 씨도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죠. 전역하신 이후로 쉬는 날들이 없었으니, 큰일 마친 김에 쉬고 오시겠다는 마음을 모르는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닌데요.
안 가면 맞아 죽을까 봐 가는 건데요.
휴식이라니, 그게 무슨 남의 맘도 모르는 소리이십니까!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 그가 하는 변명이 어디 변명이겠는가. 사람 약 올리는 거지.
“일은 잘되어가고 계십니까?”
강진호가 은근히 말을 돌렸다.
조규민은 강진호의 의도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당해준다는 듯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잘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게 잘된다고 해서 뭔가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안 된다고 해서 잘못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저 뭐랄까…….”
조규민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강진호는 조규민이 보는 곳이 벽 몇 개를 건너뛴 회장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도저도, 불도저도…… 어느 정도로 해야지. 옛날 불도저는 브레이크도 없답니까?”
“예?”
“하루하루 사람을 얼마나 들볶으시는지……. 이러다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와, 이사님들이 하는 일도 없이 대접받는 것 같아서 불만이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 양반들이 회장님이 젊은 시절에 이걸 다 버티던 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존경심이 그냥 무럭무럭…….”
“…….”
조규민이 치를 떨었다.
“열정을 되찾으신 건 좋은데, 그 열정에 제가 타 죽게 생겼어요.”
“열정을 되찾았다니, 좋은 소식이네요.”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아닙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여하튼.”
조규민이 헛기침을 했다. 이제 정리를 할 모양이었다.
“가시는 길에 불편함 없도록 준비해 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수행했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따라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당장 당면한 일만 정리하고 나면 빨리 뒤따라가겠습니다.”
“……네?”
강진호가 당황하여 말했다.
“굳이 안 오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럴 수는 없죠. 강진호 씨를 해외에 혼자 보내는 건 모시는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닙니다.”
“아니, 굳이…….”
“강진호 씨.”
“예?”
“……저 좀 데리고 가주세요.”
조규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회장님 곁에서 딱 일주일만 떨어져 있고 싶습니다. 일이 바쁘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가 진짜 말라 죽겠어요. 어제 지시한 걸 오늘 아침에 확인하더니 일이 처리가 안 됐다고 구박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좀 심하지 않습니까? 담당 부서 창구도 안 올라갔는데 저더러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힘내세요.”
“그러니까 좀! 제발 좀! 같이 가야 한다고 회장님한테 좀!”
“……예.”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그런데…….”
“예?”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조규민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의욕을 되찾은 황정후 회장은 자신의 방식대로 서류를 프린트해서 확인하고, 그 서류들은 다시 고스란히 조규민에게 내려오고 있었다.
일부러 쌓은 것처럼 치솟아 있는 서류의 탑을 본 강진호가 안쓰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일이 끝나기는 하나요?”
“…….”
“돌아오기 전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콧날을 쥐어잡는 조규민을 보며 강진호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나중에 휴가라도 보내줘야지.’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