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3
#62.
입학하다 (6)
“응?”
“업히라고.”
“……아냐. 나 그냥 걸어갈게.”
“그냥 업혀. 시간만 끈다.”
“아니.”
“자꾸 같은 말 하게 만들지 마.”
“으응.”
한세연이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업혀왔다.
강진호는 한세연을 업고는 한세연의 집을 향해 걸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남의 차 뒤에 타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강진호였다.
한세연 하나 업었다고 강진호가 부담을 느낄 리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업는 강진호의 입장과 업히는 한세연의 입장은 엄연히 달랐다.
“안 무거워?”
“별로.”
“진짜 안 무거워?”
“그래.”
한세연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이었다.
“맞다. 너 힘세지.”
“그래.”
강진호는 한세연의 의미 없는 물음에 대답해 주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미안해할 거라면 처음부터 이러지를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시는 얘랑 술은 안 마셔야겠어.’
교훈 하나를 얻는 날이었다.
한세연은 가만히 강진호의 등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낮게 속삭였다.
“나 대학에서 남자 친구 사귈 거야.”
“그래.”
“잘생기고 멋진 남자로 사귀어서 재미있게 지내보려고.”
“그래라.”
잠시 침묵이 둘 사이를 오갔다.
한세연이 잠들었나 싶은 강진호가 그녀의 기색을 파악하려고 할 찰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 말이 그것밖에는 없어?”
“그럼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좋은 남자 만나라?”
“……고마워.”
한세연의 고개가 어깨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추워?”
“아니.”
“흠…….”
강진호는 말없이 걸었다.
떠는 것을 보니 추위를 타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밤에는 날씨가 쌀쌀하다. 추위나 더위를 잘 느끼지 못하는 강진호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 어서 그녀를 집에다 데려다 주는 게 맞았다.
한세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그녀의 고개가 올라오기 전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질주하듯 앞으로 나갔다.
공기가 떨려서 눈치챌까 봐 내공으로 다가오는 바람까지 제어했다.
“으음…….”
이상한 기색을 느낀 듯 한세연이 움찔하자 은근슬쩍 속도를 줄인 강진호가 기색이 옅어지자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하자 어느새 한세연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 왔어.”
“응?”
한세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그녀의 집 앞이었다.
이상하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언제 이곳에 도착했단 말인가.
“내, 내가 졸았나 봐.”
“그래.”
“여기까지 나 업고 온 거야? 무거웠지?”
“아니.”
“미안. 나 내려줘.”
강진호는 말없이 한세연을 내려놓았다.
한세연은 조금 비틀거리더니, 이내 똑바로 서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힘들었지?”
“별로.”
“만날 별로래.”
한세연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미안.”
“뭐가?”
“그냥 괜히 짜증내서 미안해. 내가 속이 좁았어. 원래 안 그러는데……. 진짜 미안해.”
“……나한테 짜증낸 거였냐?”
“말을 말아야지.”
한세연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더니, 다짐을 굳힌 듯 자세를 바로 했다.
“강진호 씨?”
“음?”
“오늘 정말 죄송했습니다. 속 좁은 저를 이해해 주세요.”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며 강진호가 당황했다. 이 여자가 오늘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고마워.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
강진호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야.”
“또 왜?”
한세연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갑자기 강진호의 품에 뛰어들다시피 안겨왔다.
“왜?”
한세연은 잠시 동안 그렇게 있더니, 몸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강진호 씨.”
“응?”
“집에 가다가 넘어져서 코나 깨지세요.”
“……뭐?”
“잘 가라!”
한세연은 그 말을 남기고는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여자는 알 수가 없어.”
솔직한 심경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강진호를 맞았다.
“너 술 먹었니?”
“그렇게 보이나요?”
강진호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남아 있는 알콜을 내공으로 모조리 날려 버린 다음인데도 그런 기색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얼굴은 멀쩡한데 술 냄새가 나는구나.”
“술집에 가기는 했는데, 저는 얼마 안 마셨어요.”
열다섯 병.
얼마 안 마시기는 했다. 취하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강진호가 마신 술의 양을 어머니가 아는 날에는 집안에 술고래가 났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끝도 없이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그래? 그래, 대학생이라고 만취해서 돌아다니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것도 없다. 너야 나랑 네 아빠 피를 받아 술도 얼마 못 마실 테니, 자제해.”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들은 오늘부로 주신이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오늘도 열다섯 병을 먹고 왔습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강진호는 죄책감을 느꼈다.
“밥은?”
“먹고 왔어요.”
“대학은 좀 어떠니?”
강진호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딱히 다를 것이 없다고 해야 할까, 다르긴 한데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첫날인데 뭘 알겠니.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네.”
“후회는 안 하니?”
“무슨 후회요?”
“더 좋은 대학도 갈 수 있었잖아. 한국대라든가.”
어머니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말은 안 했지만, 백현정은 은근히 아들이 한국대에 가기를 바란 모양이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한국대가 아니라 재경대를 택하기는 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한국대가 가지는 위상이 훨씬 더 높았다.
“가까우니까요.”
“너 정말 가까워서 재경대 간 거야? 황정후 회장님 때문이 아니고?”
“이유가 더 있기는 하지만요.”
박유민이 한국대에 갈 수 없으니, 같이 갈 수 있는 재경대로 갔다고 하면 화를 내시려나?
강진호에게 대학이라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일반적인 회사에 취업해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에 대학이란 간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을 굳이 가야 하는가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식의 학업에 투자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대학을 간 것이다.
그러니 그 이상은 관심이 없을 수밖에.
“진호야.”
“예.”
“요즘 보면 네가 내 아들이기는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때가 많구나. 네가 컸다는 거겠지.”
강진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백현정이 그에게 어색함을 느낀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의 강진호를 완벽히 연기할 수 없는 이상 필연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상황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
“다 그렇게 큰다고는 하더구나. 그래도 엄마는 좀 아쉽다.”
“……네.”
백현정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손사래를 쳤다.
“그래, 얼른 씻어.”
“아버지는요?”
“네 아버지 곧 가게 문 닫고 들어오실 거다. 요즘 장사가 잘되시는지 퇴근이 좀 늦구나.”
“마감 시간이야 빤할 텐데.”
“마감 시간 좀 늦췄어. 손님이 계속 들어오는데 일찍 가게 문을 닫는 것도 문제이지 않니.”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쉴 때는 쫌 쉬셔야죠.”
“천성이 그런 사람인데 어쩌겠니.”
하기야 아버지는 부지런함을 빼면 시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니까. 돈방석에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일을 쉴 사람이 아니었다.
“은영이는요?”
“그 계집애는 요즘엔 엄마도 얼굴 보기 힘들다. 뭔 연습을 그리한다고. 데뷔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던데…….”
강진호는 어머니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걱정되세요?”
“걱정이라…… 진호야.”
“예.”
“엄마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살면 좋겠다 싶어서 딱히 이래라저래라 말은 안 해.”
“예, 알고 있어요.”
“은영이가 연예인 된다고 기획사 오디션 합격했다는 소리 들었을 때도 그 어린것이 공부 제쳐 두고 노래나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다니까 내버려 뒀어.”
“예.”
백현정은 가만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자식 얼굴도 못 보고 그 어린 게 그 고생을 하는 걸 보고 있자니 과연 내가 잘한 건가 싶다.”
“…….”
“데뷔해도 뜨지 못하고 사라지는 그룹이 부지기수라는데, 잘될지. 이제 와서 그렇게 되어버리면 다시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가 될 텐데.”
“늦진 않아요.”
“그래도…….”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잘할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잘할 겁니다. 어머니 딸이잖아요. 제 동생이구요.”
“그래.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자꾸 잔걱정이 많아지는구나.”
어머니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강진호는 가슴속에서 짜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웬만하면 화가 나지 않는 강진호인데, 어머니의 표정 변화 하나에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가족의 정이라는 게 그저 머릿속에서만 있는 건 아니구나.’
너무나 오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제는 그런 게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강진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무심했어.’
그러고 보니 그가 강은영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그의 삶을 되찾고 행복을 찾는 데 있어서 강은영의 행복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런 중요성에 비해 강은영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했다.
강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할 일이 많았다.
적응도 바빴다.
그런 것만으로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의 삶뿐 아니라 가족의 삶도 중요하다.
그들의 행복 없이는 강진호의 행복도 없는 것이다.
강진호는 샤워기 물을 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대화를 해봐야겠어.”
강진호는 처음으로 오빠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부모님에 대한 것과는 다른 감정.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마교에서 부하들을 뒤에 두고 나서서 싸운 적은 많지만, 그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좀 더 효율적으로 희생을 줄이려고 했을 뿐.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보호다. 오랜 세월 동안 강진호에게는 없던 감정이다.
‘변한 건가?’
아니면 되찾았다고 해야 하나?
강진호는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이제 강진호는 이 세계에 처음 돌아왔을 때의 그 적천마존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강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나쁘진 않아.’
어느 세계든 살아간다는 것은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반쯤 이 세계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강진호에게 앞으로의 삶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즐거울지도 모른다.
강진호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