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33
#632.
도착하다 (2)
“한 잔 더.”
“…….”
장다징의 얼굴이 조금씩 질려가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드시는 거지?’
바토르의 앞에 와인 병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와인 잔이 아니라 와인 병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바토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와인을 요청했다. 진짜 일등석도 아니고, 이런 화물칸을 개조해 만든 일등석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들의 서비스는 장다징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와인을 들고 오는 게 아니라 와인 리스트를 들고 오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바토르는 ‘적당히 맛이 있는 걸로. 물론 독할수록 좋아.’라는 패기 넘치는 주문으로 그런 승무원들을 상대했다.
‘다 마실 거면 그런 주문 마시라구요.’
그건 비치된 와인 중에 무언가를 골라 마실 때나 의미가 있는 주문이었다. ‘남은 와인 다 가져와’를 외치는 사람이 할 주문이 아니란 말이다.
“바, 바토르 님.”
“음?”
바토르가 천천히 와인 잔에 든 와인을 흔들며 장다징을 돌아보았다.
“적당히 드시는 게…….”
“아아, 알고 있다.”
바토르가 빙긋 웃었다.
“적진에 간다는 긴장감을 풀지 말라는 거겠지. 걱정할 것 없다. 조절해서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요?’
보통 사람이었다면, 저 병이 진짜 병이 아니라 손가락만 한 미니어처였어도 인사불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걸 다 퍼먹고도……. 하기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륙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와인을 스무 병째 비우고 있는 이를 말려야 하는가, 아니면 내버려 둬야 하는가. 이건 무척이나 난제였다.
장다징이 구원을 바라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가닿은 곳은 물론 강진호의 자리였다.
‘자리 깔았네, 자리 깔았어.’
강진호는 이제 비행 정도는 익숙하다는 것처럼 자리를 완전 눕혀 담요까지 덮고 누워 있었다. 누가 보면 마일리지를 산처럼 쌓은 전문 여행가인 줄 알 것이다.
장다징이 알기로 강진호는 이전에 비행기를 탄 적이 한 번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저런 적응력이라니.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뜨려 놔도 낙타 잡아먹고 살아남을 사람이었다.
장다징은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강함이라는 건 상대적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국이라는 땅에서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물론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그들을 상대할 무인이 많지는 않겠지만, 쪽수 앞에 장사 없다는 건 고래로 증명된 사실이 아닌가. 중국에 들어왔다는 게 들킨다면 홍왕계가 개 떼처럼 몰려올 테고, 그럼 결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적진의 후방에 잠입하는 특수부대원처럼 비장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저 태연함은 뭐란 말인가.
바토르는 단풍여행 갔다가 버스에서 맥주 까는 아저씨 같고, 강진호는 휴가 나온 군인 같았다.
‘관광 가는 게 아닌데…….’
눈 세 개인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눈 두 개인 사람이 가면 병신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강진호와 바토르가 저리 평온하니 괜히 안달복달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때, 주인? 한잔하겠나?”
“괜찮다.”
강진호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바토르의 제안을 거절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모양이군.”
“딱히.”
과거에는 강진호도 꽤나 술을 입에 댔다.
하지만 굳이 운기를 하지 않아도 육체의 정화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독주를 한 말씩 퍼부어도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도 않으면서 술을 즐긴 이유는 그저 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함이지만, 술을 마시며 그리워할 이가 없어진 지금은 굳이 술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취하지 않으니까.”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니다. 그 향과 맛을 즐기는 거지. 분위기도 괜찮고.”
“……가끔 느끼는 건데, 너는 몸과 말이 별로 맞아떨어지는 않는 것 같다.”
장다징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 공감.’
겉으로 보는 바토르는 무식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꽤나 섬세한 남자였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상식도 굉장히 뛰어난 축에 속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지.”
“와인 병이나 치우고 그런 말을 하지.”
“내 몸을 생각해라. 주인의 몸으로 환산하면 이제 겨우 한 병 비운 것에 불과하지. 이 정도는 상식적이라고.”
강진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상식이라…….
그래, 그렇게 따지면 상식적이긴 하지.
“그런데 기내식은 주나?”
승무원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는 좀 많이 먹는데,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흐음, 준비가 철저하군. 그 이현수라는 놈도 생각 외로 쓸 만해.”
실제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건 이현수가 아니라 조규민이지만, 강진호는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바토르의 입장에서는 조규민이나 이현수나 별다른 관심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주인.”
“음?”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뭘?”
“중국에 가는 목적 말이야.”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날 사람이 있다.”
“만날 사람이라…….”
바토르가 불만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하는 일이라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는 없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뭔가 일이 정리되는 듯싶었지만…….
들썩.
장다징이 묘한 눈으로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몸을 돌린 바토르가 눈에 띌 정도로 들썩이고 있었다.
‘잘 안 참아지는 모양인데.’
저렇게 생각하는 걸 온몸으로 발산하는 사람이라니. 어쩐지 유쾌한 느낌이었다.
“큭!”
결국은 참아내지 못했는지 바토르가 몸을 격하게 다시 돌렸다.
“주인, 내가 주인을 위해서 한마디만 하겠다.”
“……뭘?”
바토르의 얼굴은 비장했다. 너무도 비장해서 강진호조차 움찔했을 정도다.
“물론 주인의 입장은 이해한다. 그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지.”
도대체 저 ‘그것’은 무엇일까? 강진호의 얼굴에 불안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니,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물론 인간에게 있어서 번식 행위는 중요하다!”
“버, 번식 행위?”
강진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좋은 단어 다 놔두고 이게 무슨 단어 선택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번식 행위를 위한 상대자 역시 중요하겠지! 과거의 군왕들이 배우자를 꼼꼼히 고른 것 역시 그 일환 아닌가! 하지만 주인! 지금은 여색을 탐할 때가 아니다. 그것도 내게 거짓말을 해 가며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것은…….”
“아니…… 오해가 있다, 오해가!”
강진호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 번식…… 빌어먹을.”
살아생전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또 처음 경험해 본 강진호가 결국 입에 욕지기를 담고 말았다.
“배우자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다.”
“목적지와 주인의 말이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물론 겸사겸사 들르는 거긴 하지만…….”
강진호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식은땀이 배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목적이 있는 쪽은 그쪽이 아니다.”
“그럼?”
“지금쯤 나를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만나러 가는 거지.”
“목 빠지게라…….”
바토르가 뭔가 알아챘다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
“그들을 모은 건가?”
“자의는 아니었지만.”
“하나 주인…….”
바토르가 잠시 망설였다.
“마공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주인에게 패한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주인을 제외한 마인들은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것들이다.”
“어떤 점에서?”
“여러모로 그렇다.”
딱히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생각을 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정수를 잃어버린 마공은 저급한 삼류 무학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마공을 익힌다는 것은 인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아니, 빤한 결말을 각오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무학을 익히는 자들이 어떤 존재들이겠는가.
끝의 끝까지 몰린 이들이다. 그들이 마공이 아닌 다른 무학을 배울 수 있었다면 결코 마공을 익히지 않았을 것이다.
“마공 때문에 저열해진 자들이라면 교화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저열하기에 마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교화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바뀌지 않으니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그 많은 마인들을 교화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진호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진호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렇겠지.”
“그럼에도 그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건가?”
“교화할 필요가 없으니까.”
“음?”
바토르가 흠칫했다. 강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싸늘하게 들렸다.
“나는 그들에게 구원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온당히 그들이 내가 바쳐야 할 것은 받아내는 존재일 뿐이지. 만약 그들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버릴 뿐이다. 그리고 성격적인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아. 손과 발이 있다면 되는 일이다.”
“……고약하군.”
이럴 때면 강진호가 누구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 역시 한 번씩은 잊게 되는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평소의 강진호와 무인 강진호의 갭이 너무 심하니까.
‘이자는 마왕이다.’
상징적인 말이 아니다. 강진호는 이 세상에서 마왕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였다. 이제는 사장되어 버린 마공의 종주이자 마공이 부활할 열쇠를 쥔 존재였으니까.
“주인, 하나 물어도 되겠나?”
“얼마든지.”
“주인은 귀환자겠지?”
“너희 말로는 그렇더군.”
“그럼 지금의 주인과 과거의 주인을 비교한다면 어떠한가?”
“비교라…….”
강진호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십 년.”
“십 년?”
“지금처럼 강해진다면 앞으로 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되찾으려면 말이지.”
바토르의 얼굴이 질려갔다.
‘십 년이라고?’
반쯤 강하다느니, 몇 배는 강했다느니, 그런 어설픈 비교로는 받을 수 없는 현실감이다. 강진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속도로 십 년?
“……진짜 마왕이었나?”
“어쩌면 과거의 역사를 아는 이라면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무림사는 대부분이 실전되었으니까. 마교에 대한 일은 그저 전설처럼 떠내려 오고 있을 뿐이다. 천마라든가.”
“그런가?”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천시적종이라 하지.”
“천시적종?”
“천마에서 시작하여 적마에서 끝난다. 그래서 천시적종이다. 훗날에도 마교는 이어지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교주에 자리에 오른 이가 나오지 않았지.”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랬나?’
마교의 후예와 다시 만났음에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마교가 쇠락한 것은 알았지만, 강진호의 이후에 명예 교주조차 내지 못했을 줄이야.
거꾸로 생각하면 그렇기에 지금처럼 몰락했겠지. 그 강대하고 또 강대하던 마교가 말이다.
그와 청마는 마교 전력의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둘을 동시에 잃었으니 지리멸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다시 시작되겠군.”
“다시?”
강진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에게서 끝난 것은 나에게서 시작한다.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기분에 바토르가 몸을 떨었다.
‘어쩌면 나는 터무니없는 인간을 주인으로 모신 걸지도 모르겠군.’
그 사실이 떨떠름하면서도 더없이 유쾌한 바토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