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34
#633.
도착하다 (3)
“습하다, 습해.”
최연하는 손가락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언니, 화장 안 먹어요. 그러지 마세요.”
“화장 잘 먹이려다 내가 물 먹겠다.”
“너무 습해서 어쩔 수 없어요.”
“에휴.”
최연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정해야지. 얘들은 무슨 죄야.’
처음에는 이렇게 대규모로 스탭이 넘어올 계획은 아니었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촬영 한 번 할 때마다 스탭을 구름처럼 몰고 다닌다지만, 최연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급도 못 되거니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보니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중국 첫 촬영을 앞두고 중국 메이크업 팀의 화장을 받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한국 소속사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당장 메이크업 팀 꾸려 보내세요.”
부탁인지 명령인지 애매한 그 말로 인해 얘들이 여기까지 끌려왔다. 복장이야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하니 최대한 참아내겠지만, 메이크업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중국 메이크업 팀의 수준이 낮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감내할 수 있다면 최연하가 완벽주의자라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발라야 돼? 언니 얼굴이 스케치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안 돼요. 감독님이 화장이 너무 연하다고 불만이셨대요.”
“저 아저씨는 배경은 그림같이 뽑아내면서 왜 사람 얼굴은 떡칠을 못해서 안달이래? 촌스럽게.”
“중국이 좀 그런 경향이 있잖아요. 그리고 사극이니까요.”
“사극이면 덜 발라야지! 옛날에 화장품이 어디 있었다고.”
“어머? 언니, 중국 애들 경극하는 거 못 보셨어요? 얼굴을 아예 흰색으로 만들어 버리던데.”
“……옛날에는 다 그러고 다녔다는 거야? 설마?”
“모르죠. 옛날 서양에서도 얼굴 희게 만든다고 수은까지 발랐다잖아요. 사람이야 다 똑같은 거니까.”
“끔찍하네.”
정말 끔찍한 것 옛사람들의 진한 화장이 아니라, 그 화장을 답습해야 하는 최연하였다. 정확하게는 옛사람들의 취향을 맞추는 게 아니라 감독의 취향을 맞추는 거지만.
“내가 사극 다시 하면 사람이 아니다.”
“어머, 언니. 이번에 평가 좋아서 차기작도 같이하고 싶다 그랬다면서요?”
“현대물로 하라고 그래.”
최연하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차기작을 찍을 수나 있으면 좋게.’
중국과 한국 사이가 경색되고 중국 정부에서 한국인들의 자국 방송 출현을 규제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쉬쉬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피해를 보고 있는 동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마나 이 드라마의 감독은 워낙 힘이 있어서 이미 촬영을 반 넘게 마친 드라마의 출연진을 교체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지만, 다른 촬영장에서는 드라마를 찍던 배우가 갈려 나가는 사태마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차기작?
꿈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일개 감독. 정부의 의지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최연하에게도 이게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이번 드라마로 확실하게 본인을 각인시키지 못한다면, 중국 진출은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이미 소속사에서는 작품이 성공하더라도 계획한 상품 판매라든가, 방송 출연, CF들을 따내기 어려워져 수익이 반 이상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은 상태였다.
소속사 사장이 우는소리를 해 대기는 하지만, 최연하에게 있어서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중국에서 드라마를 찍는 이유는 중화권에 자신의 이름을 좀 더 알리기 위해서다. 같은 목적이라면 중화권 드라마 진출보다는 할리우드로 바로 진출하는 쪽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할리우드에서는 예쁜 동양인 여배우에 대한 수요가 딱히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건 동양인 여배우가 아니라 일본 여배우에 대한 수요였다. 정확히는 일본인 역할을 맡아줄 동양인 여배우에 대한 수요였다. 그게 아니면 중국인이든가.
최근에야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도 한국인 캐릭터를 넣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최연하가 원하는 배역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돌아갈 수밖에.
결국 모든 사정을 감안하면, 최연하는 이 배역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단 한 작품만으로 그녀의 이름을 완벽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연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말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언니, 끝났어요. 촬영장 들어가실게요.”
“응. 알았어.”
생각에 빠져 있던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을 하고, 의상을 갖춰 입은 다음에 다시 화장을 다듬는 지루한 과정이 모두 끝났다.
아마도 여배우들이 다들 성깔 있고, 까칠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이 분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서 두어 시간이 넘는 분장을 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촬영 때문에 입어야 하는 옷이 거의 이불 수준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뒤쪽으로 잡아줘.”
‘죽겠네, 진짜.’
가뜩이나 습도도 높은데 두껍고 늘어지는 의상을 입고 있으려니, 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다. 뒤쪽으로 두 명이 붙어서 의상을 잡고, 앞쪽에서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붙어서 연신 그녀의 이마에 파우더를 찍어 바르고 있었다.
살짝 현기증이 인다.
‘소금이라도 좀 먹어야 하나?’
체중이 너무 줄어서 이제는 건강까지 해칠 지경이다. 살과의 전쟁은 결국 여배우라면 피할 수 없는 전쟁이다. 문제는 지금 그녀가 그 전쟁에서 과도하게 이겼다는 점이었다.
“언니, 조심하세요.”
“괜찮아.”
최연하가 살짝 휘청인다 싶어 보이자, 그녀를 부축하던 이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최연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예, 언니.”
“너희도 알다시피 언니랑 병약한 컨셉이랑은 어울리지 않잖아. 그렇지?”
“……그렇죠.”
실생활에서 최연하는 병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여전사 쪽이 더 어울렸다.
“내가 이런 배역 맡고 있다 보니 너희가 좀 착각하는 모양인데, 언니 그리 약한 여자 아니니까 오버하지 말자. 알았지?”
“네.”
최연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최연하가 안 보이는 곳이면 뒷담화를 늘어놓기 바쁜 애들이 걱정할 정도면, 그녀의 상태가 안 좋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살면서 이런 경험 언제 해보겠어. 좋은 경험 해보는 거지. 덕분에 체중계 안 올라가 봐도 되잖아.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네, 언니. 촬영 끝나고 한국 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언니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촬영하는 걸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 유난 떤다고 욕만 먹을걸? 아서라. 요즘 악플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건 그래요.”
최연하는 최대한 주변 사람들에게 편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한국에서라면 몇 번이나 투정을 부렸을 테지만, 이곳은 외국이다. 그녀 때문에 타국까지 따라와 고생을 하는 스탭들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었다.
분장을 하는 곳을 나오자 따가운 햇살이 그녀를 후려친다.
‘죽겠네.’
햇빛에 조금만 노출되어 있어도 일사병으로 쓰러질 것 같은 날씨였다. 그런 날에 이런 복장까지 하고 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가서 선풍기 가져와! 휴대용, 빨리!”
“네!”
한은솔이 소리를 치자 로드 매니저가 달리기 시작했다.
“누나, 조금만 버텨요. 촬영 그렇게 길지 않다고 했으니까.”
“누가 보면 네가 감독인 줄 알겠다. 야, 그만 나대. 사람들이 욕해.”
“누나 걱정되니까 그러죠.”
“유난 떨지 마. 나만 이러고 있냐?”
“예.”
“……그래?”
최연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궁 배역을 맡은 다른 배우들도 요란한 차림을 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최연하처럼 몇 겹을 껴입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머, 쟤 미쳤나 봐. 왜 저래?”
최연하의 눈에 치마를 까뒤집고 있는 여배우들이 들어왔다. 속바지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민망한 모습이 아닌가.
“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거죠.”
“나는 차라리 쪄 죽으련다.”
최연하가 고개를 젓자 한은솔이 매니저가 가져온 휴대용 선풍기를 틀더니, 최연하의 치마를 잡아 들췄다.
“야!”
그리고 최연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은솔을 걷어차 날려 버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미쳤어? 어디 손을 넣어!”
바닥을 구른 한은솔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안에다 넣어야 조금이라도 시원할 거 아니에요! 치마가 몇 겹이고, 그 안에 바지까지 입었으면서! 그게 뭐 어떻다고!”
“안 돼, 인마! 메이크업 애들 줘. 어디 개념 없이 여자 치마 안에 손을 넣으려고.”
“이상한 데서 조신하다니까.”
한은솔이 투덜거리며 휴대용 선풍기를 건넸다. 선풍기 몇 개가 치마 안으로 사라졌다. 저런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냐마는,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저 앞쪽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감독을 본 최연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변태 같은 자식.’
능력은 인정한다.
그 특유의 미장센으로 할리우드에서까지 유명한 감독이니까. 하지만 그 미장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배우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직접 실감을 하니 좋게만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분야는 결과가 전분데.
“촬영 준비하시랍니다.”
“후우.”
최연하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대사가 중국어다 보니 촬영 전에 몇 번이고 되새기게 된다. 한은솔은 말하기도 전에 촬영 분량 대본을 펴 들고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저 능글맞은 놈을 계속 매니저로 쓰는 거다.
“좋아.”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촬영 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좋다. 힘들고 짜증 나는 일도 많지만, 돈을 번다는 건 다 그런 거니까. 촬영 한 번 하는 걸로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돈을 벌어들이는데, 어디 건방지게 힘들다 소리를 하겠는가.
여기까지는 다 괜찮다.
저 썩을 놈이 징그럽게 웃으며 걸어 들어오는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참자. 얼마 안 남았다.’
상대 배우와 사이가 나빠도 프로는 사랑에 빠진 얼굴을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저 사이가 나쁜 정도가 아니라 혐오할 정도라고 해도 대배우라면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 상대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최연하는 몇 번이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오늘 그녀가 찍어야 하는 장면은 포옹신이다.
남자 주인공은 점점 약해져 가는 여자 주인공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기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장면.
‘역겨워 죽겠네, 진짜.’
생각 같아서는 촬영이고 뭐고 저 짜증 나는 면상을 갈겨 버리고 싶었다.
특히나…….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정말 반해 버릴 것 같습니다.”
저딴 말을 지껄이는 입은 야구방망이로 후려쳐도 개운할 것 같지 않았다. 트럭으로 밀어버리고 싶다.
‘성격 다 버리겠네, 진짜.’
최연하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안 그래도 성격파탄자 소리를 듣는데, 여기서 성격이 더 나빠지면 정말 시집가는 것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예전이면 몰라도 이제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문제다.
“닥치고 촬영이나 하죠.”
“원하신다면.”
류웨이의 느끼한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촬영 개시 신호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