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36
#635.
도착하다 (5)
‘속이 시원하긴 한데…….’
밴을 모는 한은솔의 표정은 개운하지 못했다. 일을 벌일 당시에는 화가 너무 치밀어 올라서 최연하를 말리지 않았지만, 막상 일이 다 끝나 버리니 미묘한 허탈함과 불안함이 몰려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 룸미러를 살폈다. 최연하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멘탈 하나는…….’
우려와 달리 최연하는 무척이나 개운하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얼굴에 어려 있던 불만과 짜증이 싹 날아갔다는 듯 말이다.
“누나.”
“응?”
“안 불안해요?”
“불안? 왜?”
“…….”
저건 배워야 한다.
최연하와 같은 마인드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삶에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당장 오늘 밤에 잠이 드는 사람 중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비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1억 명은 될 텐데 말이다.
“류웨이, 그 재수 없는 놈이야 언젠가 한 번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감독하고 대립각 세운 건 좀 걱정이에요.”
“응.”
“감독은 만만하지 않잖아요.”
“응.”
“……누나, 제 말 듣고 있어요?”
“응?”
한은솔은 핸들을 꽉 움켜잡았다.
‘참자. 나는 지금 운전 중이다.’
참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최연하에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누나, 어쩌면 진짜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니까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네?”
최연하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안해하는 한은솔과는 다르게 목소리에 여유가 가득하다.
“이미 저지른 일인데, 지금 와서 달달댄다고 뭐가 바뀌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지들이 뭘 어쩔 건데? 죽일 거야, 살릴 거야?”
“하차하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진짜 손해배상 청구하면 어떻게 해요?”
“하라고 해.”
“누나!”
“시끄러, 인마. 소리 지르지 마.”
최연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사내자식이 간이 콩알만 해 가지고.”
“누나, 배상비 어마어마해요.”
“나 돈 많아.”
“그걸 이런 데다 쓰겠다구요?”
“이런 데다 안 쓰면 어디다 쓰는데?”
“헐…….”
최연하가 옆자리에 놓여 있는 초콜릿을 까서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내가 여기 돈 벌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깟 돈 아까워서 설설 기어야 해? 돈? 달라면 주면 그만이지. 재산 싹 털어주고 다시 벌면 그만 아냐.”
“누나 그건 걸크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런 것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그 새끼들, 고소도 못해.”
“왜요?”
“소송하면 내가 왜 그랬는지 증언해야 하잖아.”
“아…….”
한은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소송을 하면 재판이 열릴 것이고, 최연하가 왜 촬영을 거부했는지 증언해야 한다. 다른 여배우라면 민망해서라도 증언을 꺼릴 수 있겠지만, 최연하는 아니다.
저 새끼가 촬영을 핑계로 내 엉덩이를 주무르려 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사람이 바로 최연하다.
‘손해배상으로 해결이 안 될 수준이겠네.’
류웨이의 인기를 생각하면 앞으로 벌어들일 돈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번 일로 이미지가 손상된다면, 앞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데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감독이 이 악물고 최연하에게 손해를 끼치려 든다면, 최연하가 아니라 류웨이가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벌이신 거예요? 대단한데?”
“아니. 눈 돌아가서 아무 생각 없이 질렀는데?”
“……그게 더 대단하네요.”
와드득, 와드득.
최연하가 초콜릿을 강하게 깨물었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니 식욕까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리 가만히 있을까요? 중국 애들은 체면을 중시한다고 하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한 걸 그냥 넘기려고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알아서 하라지 뭐.”
“누나.”
“뭔 소린지 알아. 그런데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이상한 짓 하면 짐 싸서 한국 가버릴 거야.”
한은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책이 있는 듯 없다.
‘정상적으로 나와주면 좋을 텐데.’
한국이라면 이런 일로 소송이 벌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아니, 한국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
드러난 곳에서 정상적으로 항의를 해준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의향이 있지만, 저쪽에서 그렇게 나와준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치안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단 며칠 동안은 호텔에서 나가지 마세요.”
“내가 언제 나가는 거 봤어?”
“혹시나 싶어서요.”
“별걱정을 다 한다. 나도 대책 없는 여자 아냐. 몸 사릴 줄은 알아. 걱정하지 마. 너랑 같이 움직이는 것 아니면 호텔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예.”
한은솔이 조금은 불안한 시선으로 휴대폰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직 연락이 없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몰라 경호원을 좀 더 충원해 달라고 했다. 현지에서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지만, 이왕이면 한국인으로 배치하고 싶었다. 이건 그의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좀 조심하세요.”
“알았다니까.”
최연하의 대답을 듣고도 한은솔은 개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국이 이래서 좋다니까.’
외국으로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나는 한은솔이었다.
* * *
“그 미친년이!”
류웨이가 책상을 마구 걷어찼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이 바닥으로 마구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류웨이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
“진정하시지요, 형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빌어먹을!”
망신이다.
그것도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된 망신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한단 말인가.
“으아아아아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들어 벽으로 던져 버린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전화기가 부서져 사방으로 파편이 튕겨 나갔다. 류웨이는 한참이나 씩씩대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눈이 한둘이었냐고!”
중요한 이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 그런 망신을 당했다면 어찌 참아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너무도 많았다.
그 장면 이후로 이어질 대규모 제관 신 때문에 후궁 역을 맡은 엑스트라들도 다들 분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고, 워낙 중요한 신이다 보니 스탭이란 스탭은 모조리 다 불려 나온 상황이었다. 촬영 신을 지켜보는 이들만 해도 백 명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 앞에서 정강이를 차이다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망할 빵즈 년! 오냐오냐해 주니까 주제도 모르고!”
얼굴 예쁜 것 하나 때문에 그 지랄 맞은 성질머리까지 감수해 주고 있었는데, 이런 대형 사고를 치다니.
“갈아 마셔 버리겠어.”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이상 체면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좋게좋게 침대까지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 여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찼다.
“감독은 뭐래?”
“화가 엄청 난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망신당하기로 따지면 나보다 더할 테니까.”
헐리웃에서도 감독으로 모셔 가려고 안달인 사람이다. 그런 양반이 국내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여배우에게 망신을 당했으니, 한동안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됐어.’
아무리 류웨이라고 하더라도 감독과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었다. 영향력이 다른 것이다. 지금 류웨이의 인기를 감안하면 감독과 날을 세운다고 해도 자생이야 가능할 테지만, 입지가 줄어드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최연하가 미친 짓을 해준 덕분에 감독 눈치를 보지 않고 일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연락을 해야겠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질질 끌 건 없었다.
차라리 오늘 밤에 모든 것을 끝내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 열이 식기 전에 말이야.’
그 여자의 얼굴에는 마성이 있다.
류웨이가 좋은 사람은 아니잖은가. 그동안 한 번씩 작업을 칠 때마다 돌아오는 경멸과 날카로운 말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박살을 내버리겠다고 촬영장으로 향하지만, 최연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짜증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는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작업을 하면 결국에는 넘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그가 노린 여자들은 결국 두세 번을 넘기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겼으니까.
하지만 오늘 일로 확실해졌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 최연하를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방법이라도 써야 하는 것이다.
“휴대폰 가지고 와.”
“예.”
매니저가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그의 휴대폰을 빼서 건넸다.
“나가.”
“예!”
방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확인한 류웨이가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음이 가고 나서야 전화가 연결된다.
[웬일이신가, 전화를 다 주시고. 우리 형님께서 몸이 달으신 모양인데?]“오늘 밤에 처리해.”
[오늘? 오늘은 좀 바쁜데.]“빌어먹을! 네가 바쁠 일이 뭐가 있어, 이 새끼야! 수고비 두둑하게 챙겨 줄 테니까, 처리하라고!”
[뭐, 우리 형님이 그렇게 급하시다면 나도 일정을 변경해 드려야지. 그런데 말이야, 형님.]“뭐.”
[내가 명령이라 편의를 봐드리고 있기는 한데, 한 번씩 나를 종처럼 대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조심하는 게 좋아. 우리가 또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안 그래?]“…….”
류웨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제야 실감이 난다,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마, 말을 함부로 한 것은 미안하다. 너무 열이 받아서.”
[그렇다고 사과할 건 없어. 사과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심부름 값이나 좀 챙겨 주면 고맙겠는데? 위에는 말하지 말고.]“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두둑하게 준비할 테니까.”
[그럼 밤에 뵙지. 근처에 와 있으라고. 전화할 테니까.]“알았다.”
뚝, 하고 전화가 끊긴다.
류웨이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
솔직히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흑사회에서 붙여준 놈이 아니라면 절대 저런 섬뜩한 인간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저놈들은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러니 그가 시킨 일도 완벽하게 해낼 것이다.
“내 아래 깔려서 무슨 표정을 짓는지 제대로 봐주지. 그 얼굴도 아름답겠지만.”
한결 기분이 좋아진 류웨이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 * *
중국 청두, 솽류 국제공항.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배경으로 비행기 한 기가 조용히 착륙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는 일반적인 여객기가 가는 쪽으로 향하지 않고 공항 깊숙한 곳에 있는 화물칸으로 향했다.
흔하디흔한 광경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느릿하게 멈춰 선 비행기에 게이트가 설치된다. 게이트가 완전히 설치되고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어쩌면 지금 현재 중국의 무인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내가 천천히 비행기에서 내렸다.
“중국은 오랜만이군.”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야.”
누군가의 불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