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40
#639.
재회하다 (4)
“후우.”
최연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나는 절대 아프리카는 못 갈 거야.”
한동안 여배우들 사이에서 오지로 가 봉사 활동을 하는 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하면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봉사를 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먹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연하는 그 광경을 비웃었다.
정말 걱정이 되면 돈을 줄 것이지.
한국에서는 명품 백으로 벽을 장식하고 살면서 거기 가서 애들에게 죽 좀 떠먹여 주는 걸로 생색이나 내고 있다고 말이다.
그 배우들이 평소 들고 다니는 백 하나면 한 마을의 아이들을 한 달 동안은 먹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졌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물론 당연하게 최연하는 배알이 뒤틀렸다. 그래서 매니저를 들볶아서 아프리카로 갈 채비를 마쳤다. 워낙 변덕이 심해서 출발 일정까지 잡아놓고 취소했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 일정을 취소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이 이국의 땅에서 그녀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것은 한국과 별 차이가 없는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집이 아니다 보니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샤워 시설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속옷을 입고 가운으로 몸을 감싼 최연하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헐…….”
생생한 민낯을 본 최연하가 입을 쩌억 벌렸다.
“다, 다크 서클?”
그녀가 누군가.
한국이 인정하는 피부 미녀 아닌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피부와 억! 소리 나는 돈을 피부과와 피부 관리실에 들이부은 그녀의 야심 찬 결과물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수분감, 유분감, 탄력…….
그 모든 부분이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이러다 주름 생기겠어.”
안 된다.
주름이라니, 최연하가 주름이라니!
주름은 나이가 들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이치 같은 것이지만,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싶은 최연하였다.
더구나 지금 그녀는 아름다워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이 얼굴로도 안 꼬셔지는 남자를 주름 생긴 얼굴로 어떻게 꼬시란 말인가.
“하, 한국에 갔다 올까?”
피부 관리라도 받으면 좀 낫지 않을까?
이왕 이렇게 된 것, 나 도저히 이 기분으로는 촬영 못하겠다고 강짜를 부리고는 휴가를 받아볼까?
며칠 정도만 휴가를 받으면 그동안은 그녀가 출연하지 않는 다른 분량을 촬영하면 될 텐데.
“미쳤어.”
최연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멘탈이 무너지니 별생각이 다 든다. 그래 버리면 지금까지 그녀가 욕해온 직업 정신 없는 배우들과 뭐가 다른가.
그녀에게 있어서 촬영과 연기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강진호에게 걸맞은 대배우가 되겠다고 중국까지 날아온 판인데, 겨우 피부 좀 상했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니. 이 무슨…….
“겨우가 아니니까 그렇지!”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결코 2순위로 밀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1순위다. 그 1순위를 위해서라면 웬만한 것은 다 포기할 수 있다.
“패, 팩이라도 해야겠어.”
한국으로 가는 건 무리지만, 여기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이건 직업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여배우다. 그것도 얼굴 하나로 먹고사는 전형적인 외모형 여배우다. 그런데 외모가 망가지면 어쩌자는 건가.
머릿속으로 팩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구상한 최연하가 전화기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디리리릭.
“……어?”
최연하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문이 열리는 소리다.
하지만 결코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기도 했다. 호텔의 문은 밖에서 열 수 없다. 유일하게 밖에서 문을 열 수 있게 만드는 키는 지금 그녀에게 있었다.
한은솔조차 그녀의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얌전히 벨을 누르고 그녀가 문을 열어주는 걸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문이 열린다고?
등골을 타고 서늘한 냉기가 올라오는 기분이다. 최연하는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커 보이는 화장품을 움켜잡았다.
이게 무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맨손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찾았다.
‘어디야.’
필요할 때는 꼭 없다. 꼭!
아차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휴대폰은 지금 욕조에 올려져 있다. 밖으로 나올 때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하지?’
가장 좋은 대처는 휴대폰으로 한은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럼 한은솔이 바로 달려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에는 휴대폰이 없다.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가려고 하니, 그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방만 커서는.
입술을 질끈 깨문 최연하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침착하자.’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딱히 다른 소리가 더 들린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녀의 방이 너무 조용해서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린 걸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도어락에 오류가 났거나.
생각해 보면 방문 앞에 경호원이 있지 않은가.
도어락 울리는 소리도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 누군가 경호원은 제끼고 문을 열었다면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떠올린 최연하가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었다.
확인만 해보면 된다, 확인만…….
한 걸음, 한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다.
‘긴장할 것 없다니까.’
이게 다 한은솔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렇다.
여기는 호텔이고, 경호원까지 배치가 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 이곳으로 들어온다는 말인가.
“씨!”
최연하가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걸었다. 겁을 집어먹은 자기 모습에 대한 반발이었다. 현관으로 다가간 최연하의 눈에 굳게 닫혀 있는 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아아…….”
새어 나오는 한숨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다.
그리고 문은 닫혀 있다.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꽤나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잘못 들었거나, 옆방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거겠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일인데, 신경이 워낙 날카롭다 보니 이렇게 오버하게 된 것이다.
“신경쇠약 걸리겠어.”
최연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예쁘군.”
상상해 보라.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귓가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든다면?
마치 뱀의 혀가 와닿는 것처럼 끈적하고 축축한, 그리고 서늘한 무언가가 와닿는다면?
반응은 다들 똑같을 것이다.
최연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몸을 던졌다.
콰당!
그녀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격하게 울렸다. 채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최연하가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양아치 하나가 서 있었다.
“아으…….”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녀의 머리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아깝군, 아까워. 진짜 아까워.”
양아치는 중국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최연하는 이게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만약 이게 그녀의 상상이라면 저 한국 놈처럼 생긴 양아치가 중국어로 말할 리가 없으니까.
“누, 누구야!”
“거기다 똑똑하군. 중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중국어 발음이 꽤나 좋아. 적절한 단어 선택도 마음에 들고 말이야. 그 병신에게 넘기기에는 너무 좋은 여자군.”
머리에 이성이라는 것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최연하가 바닥을 집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양아치는 지금 그녀의 행동을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쓰러져 있는 것보다는 서 있는 것이 대응하기에 더 낫다.
“당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침착함을 찾는 것도 빨라. 흐음…… 이거, 고민되는군.”
양아치, 궈리친은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앞주머니에 걸었다.
“나가! 당장 나가! 아니면 소리 지를 거야!”
“이건 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너무 빤한 패턴이야. 조금은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음, 아냐. 정정하지. 이런 상황에서 그 독기 어린 눈빛을 보여주는 건 색달랐어.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궈리친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자, 네가 똑똑하다면 내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겠지? 힌트를 주자면, 매우 전형적인 대사로 되돌려 줄 생각이야. 자, 내가 뭐라고 할까?”
미친놈이다.
저 미친놈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소리 질러봐야 소용없다?”
“정답. 아주 좋군.”
궈리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똑똑한 여자다. 아니면 배우라서 이런 시퀸스에 익숙하든가.
“너…….”
최연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익숙한 느낌.
예전에 한 번 받아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여유가 넘친다. 마치 그녀는 이미 자신의 손 위에 올려져 있고, 무슨 발악을 하더라도 달아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최연하는 눈앞의 남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마 지금 소리를 지르며 문으로 뛴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다시 잡힐 것이다. 호신술로 단련된 경호원을 소리 없이 제압한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그녀가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상황이 파악되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벌벌 떨면서 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목적이 뭐죠?”
“음?”
궈리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필요한 게 뭔지 말해봐요. 돈이면 돈, 다른 거면 다른 거라고.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내가 상대할 수 있으니까.”
“하하하핫!”
궈리친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여자로군. 되레 나한테 묻는단 말이지? 대단해.”
궈리친의 눈에 호의가 담겼다.
확실히 이 여자는 그 병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이 여자가 그 병신을 경멸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수준도 안 맞는 놈이 자꾸 들이대니 화가 났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말이야…….”
궈리친이 천천히 최연하에게 다가갔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최연하의 멱살을 잡아 아래로 내리눌렀다.
“아악!”
갑작스레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에 최연하가 비명을 질렀다. 아래로 내리눌려진 최연하가 고개를 들어 독기 어린 눈으로 궈리친을 노려보았다.
“나는 건방진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다 합격이었는데, 취향에서 어긋났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사람에게는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너는 그 병신에게 넘겨야겠군. 내가 먼저 일을 치르면 그놈이 길길이 날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뱀처럼 웃는 궈리친의 얼굴을 본 최연하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도와줘!’
그녀의 뇌리에 강진호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 걱정 없는 듯 바보처럼 웃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