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47
#646.
치료하다 (1)
‘말미잘.’
최연하는 원독에 찬 눈으로 강진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재활용도 안 되는, 젖은 쓰레기 같은 인간!’
최연하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차라리 강진호가 도리도 모르는 짐승처럼 그녀를 덮쳤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최연하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처박다 못해서 삽으로 구덩이를 파 지하에 묻어버렸다.
‘이 얼굴값도 못하는 등신!’
가장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순간적으로나마 최연하를 지옥 같은 설레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니 망정이지, 누구라도 하나 이 사태를 알았더라면 최연하는 건물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다리가 자꾸 움찔거린다.
수십 번을 걷어찬 것으로도 아직 부족한 모양이다.
“으…….”
최연하가 신음성을 내자 강진호의 뒤통수가 움찔한다.
‘잠도 안 자면서 끝까지 그러고 있단 말이지?’
알고 있다.
강진호가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걸. 이건 그냥 자기 혼자 오해한 최연하의 잘못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저질렀다.
눈치가 없는 죄.
분위기를 읽지 못한 죄.
때로 그 죄는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가 되는 법이다.
‘내가! 이 내가!’
그녀가 누군가.
최연하다.
한국에서라면 그녀의 이름 앞에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최연하는 최연하고,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모든 사람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런데 그런 최연하가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뭐? 촬영이 어쩌고 저째?
“말미잘…….”
강진호의 뒤통수가 움찔한다.
필사적으로 최연하를 외면하고 있는 강진호를 보고 있으니, 화가 살짝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반면에…….
‘이 사람은 내가 왜 열 받았는지도 모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도 터졌다.
짜증과 즐거움이 동시에 뒤죽박죽 섞여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에이, 진짜.’
최연하는 결국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고 말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도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마음은 크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솔직한 ‘감사’였다.
강진호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 그녀는 그 미친놈의 손에 죽었거나, 스스로 죽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늦긴 했지만, 너무 늦지는 않았다.
사실 만약 강진호가 이전에 왔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오늘 일을 막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영화도 아니고…….’
언제나 상상은 현실을 이길 수 없는 법이라지만, 이 완벽한 타이밍에 도착해 그녀를 지켜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고마움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서 그렇지.
그래서일까?
이 무서운 일을 겪었음에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은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강진호를 보고 있으려니, 우스우면서도 듬직하다.
잠이 몰려온다.
‘제대로 잔 게 언제였더라?’
중국에 온 이후로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몸은 계속 나빠지고 피곤에 찌들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푹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자면서도 몇 번을 깨고,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잠이 몰려온다. 마치 한국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이 앞에 있어서일까?
최연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우스우니까.
조금 전까지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할까 안달복달하던 자신이 강진호의 등을 보며 안심하고 잠에 빠져든다는 게 너무 우습고 재미있다.
‘뭔가 따뜻한 게…….’
이상한 느낌이다. 강진호에게서 따뜻한 뭔가가 흘러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나, 이 사람 정말 좋아하는구나.’
확실히 인정하지 못한 마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자 편안해진다. 천천히 눈을 감은 최연하가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흠…….”
강진호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효과가 있었군.’
이대로는 밤새도록 뒤통수에 눈빛의 죽창이 꽂히는 걸 참아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기를 흘려보내 재우는 걸 시도했다. 지난한 일이지만, 마침내 강진호는 최연하를 재우는 데 성공했다.
가만히 앞으로 다가간 강진호가 조심스레 최연하의 수혈을 눌렀다.
이제 한동안은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강진호의 눈이 예리하게 최연하의 몸을 살폈다.
생각대로다.
‘엉망이군.’
강진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이 몸을 하고도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당장 최연하가 쓰려져 병원에 실려 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만큼이나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게다가…….
‘탁기.’
그녀의 머리 언저리에 탁기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을 겪었으니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것이다.
강진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연기가 어떤 의미인지 강진호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몸이 이 상태인데도 촬영을 강행하겠다는 건 과한 욕심이었다.
스스로가 바로 서야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나도 같았겠지.’
최연하에게 있어서 연기가 강진호에게 있어서의 가족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강진호 역시 가족에게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지금 강진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녀를 좀 더 편하게 해주는 것.
강진호가 가만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수혈을 짚기는 했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제대로 수혈을 짚으려면 강한 기운을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최연하의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다. 강진호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대 위에 오른 강진호가 최연하가 덮은 이불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이상하게 손끝이 살짝 떨리는 느낌이다.
심호흡을 한 강진호가 최연하가 입고 있는 가운을 좌우로 밀어냈다.
‘지금 일어나면 십 년 동안 욕 퍼먹겠군.’
오해가 발생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최연하의 안색을 살펴 완전히 잠이 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강진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댔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원장 수녀님을 치료할 때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 세계로 돌아온 직후에 말이다.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린 강진호가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집중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최연하의 아랫배에 자신의 손을 단단히 밀착시킨 강진호가 천천히 기운을 밀어 넣었다.
움찔.
아랫배로 뜨거운 기운이 들어가자 최연하의 몸이 들썩한다. 하지만 지금 깨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강진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영양 결핍을 강진호가 해결할 수는 없다.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랜 결핍으로 인해 제대로 배출되지 않은 탁기를 제거하는 것 정도다. 탁기가 쌓여 순환이 막혀 버린 기운이 제대로 돌기만 해도 건강은 회복될 것이다. 그런 후에는 저 머리에 가득한 탁기들도 뽑아내야겠지.
심호흡을 한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힘차게 최연하의 몸을 달린다.
과거와 다르게 지금의 강진호에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강한 기운에 최연하의 몸이 다칠까를 걱정해야 한다.
‘만약 그때, 지금 같은 힘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원장 수녀님을 치료할 때, 강진호가 지금과 같은 수준에 올라 있었더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원장 수녀님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
하나 후회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후회가 아니라 미련이다.
조금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중요한 건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상황이 생기더라도 언제나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강진호에게 있어서의 대비는 결국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의 주변 사람들의 손을 놓지 않도록 말이다.
우우우웅.
최연하의 몸을 씻어 내린 기운들이 머리로 몰려들었다.
‘천천히…….’
머리와 몸은 다르다. 몸이라고 해서 막 다뤄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다룰 때는 몸을 다룰 때의 몇 배나 되는 섬세함이 요구된다.
강진호는 최연하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기운을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기운을 느리게 만드는 것은 빠르게 만드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강진호는 딱히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강해졌다.
예전보다 훨씬 더.
전력을 다한 수련이 아니더라도,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수련이 아니더라도 강진호는 빠르게 예전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직은 요원하지만,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현세에 적천마존의 강림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연하의 머릿속에 떠돌던 탁기를 모조리 빨아낸 강진호가 기운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천천히 기운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전에 밀어 넣은 기운이 탁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의 기운들은 최연하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한 것들이다.
자신의 기운을 적당히 뿌려 최연하의 육체를 활성시킨 강진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최연하의 아랫배에서 손을 떼고 가운을 여며주었다.
‘이제 일단 들켜도 살해당할 일은 없겠지.’
왠지 웃음이 난다.
어머니 외에는 딱히 두려울 것이 없던 강진호이지만, 이제는 무서운 사람이 하나 더 생겨 버렸다. 그저 맞춰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 무섭다. 여러모로 말이다.
최연하의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 강진호가 천천히 걸어 나와 전면 창 바로 앞에 섰다.
보통 사람은 통과하기 힘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강진호가 외벽을 타고 옥상으로 올랐다. 옥상에 내려선 강진호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위험했어.’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안일하고 오만했다.
일이 벌어지고 나면 늦다.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정보와 경호.
그 두 가지를 확실하게 충원해야 한다.
강진호는 고개를 내려 아직 네온사인이 채 사라지지 않은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중국.
중원은 그에게 자유로움을 준다.
그를 가로막고 있던 제약들이 이곳에만 오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알게 해주어야겠지.
그의 것을 탐하려 한 죄가 얼마나 큰지, 그의 사람을 욕보이려 한 죄가 얼마나 큰지 말이다.
우득.
강진호의 주먹에서 뼈 마찰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최연하를 바라볼 때와는 사람이 백팔십 도 달라진 듯 차가워진 얼굴로 강진호가 미소 지었다.
지금 그의 눈에 띈 것은 두 사람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두 사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후환은 남기지 않아.’
비록 그게 최연하의 뜻에 반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일지라도…… 강진호는 자신의 원칙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알게 될 것이다.
이 중원의 땅도 곧.
강진호가…….
적천마존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왔음을 말이다.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강진호가 필터까지 태운 담배를 튕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