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50
#649.
치료하다 (4)
“내가 너에게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최연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깔끔했다.
한 점 의혹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교과서적인 말투의 해명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들린다는 점은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그냥 강진호 씨가 와서 좀 무섭기도 하고, 이 사람 숙소도 애매해서 같이 잤을 뿐이야.”
“같이 잤다구요?”
“그거 말고! 그거!”
한은솔의 반문에 최연하가 악을 썼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진짜로!”
“……누나.”
“그래, 은솔아.”
한은솔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만하세요. 추해요. 젊은 남녀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변명을 하고 그러세요? 제가 누나 매니저인데, 설마 소문이라도 내겠어요?”
“아니라고! 아니라고오!”
최연하는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억울해! 너무 억울해!’
사실 한은솔이 오해하든 말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신하게 보이는 데 미련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억울하다.
뭔가 하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최소한 뽀뽀라도 했으면 이렇게나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손만 잡고 잘게’도 아니다. 손도 안 잡고 잤는데 이런 오해를 받으면 누구라도 빡 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네?”
얼떨결에 촬영장으로 향하는 밴에 동승하게 된 강진호가 지금 이 대화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아아아아아!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아!”
강진호의 치료로 최연하는 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최연하가 되찾은 활력이 자신을 핍박하는 방향으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강진호가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돌리자, 최연하가 세상의 모든 억울함을 담아서 한은솔을 보며 소리쳤다.
“야! 너, 나 못 믿어?”
“믿죠.”
“그런데 왜 이래?”
“재밌으니까요.”
“응?”
한은솔이 피식 웃었다.
“천하의 최연하가 그런 일로 우길 리가 없죠.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 그렇지?”
최연하가 우쭐한 듯 배를 살짝 내밀자 한은솔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그는 최연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최연하는 이런 사소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단지 한은솔을 놀라게 한 것은 최연하가 강진호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한은솔은 아직 최연하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최연하는 일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다. 한은솔은 지금까지 최연하의 집뿐 아니라 그녀의 호텔 객실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아침에 최연하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말했을 때, 한은솔이 놀란 이유가 바로 그 점이다.
그런데 강진호는 최연하의 객실에서 잠까지 자고 나온 것이다. 이거만 봐도 최연하가 강진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차라리 두 사람이 어떤 호텔에서 관계를 맺고 나왔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가 최연하의 사적 영역에 거침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위로가 안 된다구요, 누나.’
한은솔이 운전을 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이런 식으로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이미 미련은 버렸다. 경쟁 상대가 강진호여서가 아니다. 설사 강진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최연하는 결코 그를 남자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미련이 없을 수밖에. 그런데…….
쿵!
“야! 운전 살살 안 해? 오늘따라 왜 돌이란 돌은 다 밟고 가?”
“오늘따라 돌이 많네요.”
“매번 가던 길인데 오늘따라 돌이 많다는 게 말이 돼?”
“공사라도 했나 보죠.”
심통이 난다.
뭔가 배가 아프다. 그것도 꽤나 많이.
아랫배가 쿡쿡 쑤시는 느낌에 한은솔은 비포장도로 여기저기의 움푹한 구덩이로 바퀴를 밀어 넣었다.
쿵! 쿵!
“야! 너, 이럴 거야?”
“고의가 아니라니까요.”
오늘은 최악의 드라이버가 되기로 다짐한 한은솔이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허리를 부여잡은 최연하가 도끼눈을 떴지만, 한은솔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너, 너는 나중에 보자, 나중에.”
“그러게 왜 이런 날 촬영장 나오자고 하셨어요. 그냥 오늘은 쉬면 좋잖아요.”
“사람이 그게 아냐. 쉰다고 해도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해야지, 전화 한 통 하고 쉬어버리면 그게 무슨 싸가지야?”
“누나.”
“뭐?”
“이제 와 챙길 싸가지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그거 진짜 큰 착각인데.”
“너 이리 와, 너.”
한은솔이 최연하와의 거리를 벌렸다.
‘농담 아닌데.’
제대로 한 번 붙었으니, 감독이 그녀를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한국 감독이라도 어린 여자에게 그런 꼴을 당하면 앙심을 품을 텐데, 중국 감독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사고방식이 다르다. 이들에게 있어서 체면이란 한국인이 생각하는 체면과는 그 가치가 아니다. 목숨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즈음 어딘가에 있는 게 분명했다.
최연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은솔은 하차마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법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지 않는다고 해도, 촬영 내내 괴롭힘이 있을 것이 빤했다. 그 괴롭힘을 버텨가며 촬영을 마치기에는 남은 촬영 기간이 애매하게 길었다.
최연하가 폭발해서 정말 신문에 대서특필되기 전에 하차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런 한은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연하는 씩씩대다가 강진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근데 진짜 갑자기 사람이 왜 저리 활력이 넘치지?’
어제까지였다면 대충 한은솔을 상대하다가 피곤하다며 의자와 혼연일체가 되었을 사람인데, 오늘은 충전이 풀로 된 사람처럼 날뛰고 있었다.
‘강진호 씨가 와서 그런가? 아닌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진짜 힘이 넘치는데…….’
한은솔이 최연하를 봐온 세월이 얼마인데 힘이 나는 척하는 것과 정말 활력이 넘치는 걸 구분 못하겠는가.
이상한 일이었다.
“강진호 씨!”
한은솔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최연하는 강진호를 향해 다가가서 속삭였다.
“정신이 없어서 데리고 오기는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숙소 가겠다는 사람 강제로 끌어다가 차에 태운 사람이 누군데 정신이 없었다는 말인가. 거짓말이야 할 수 있다지만, 적어도 입에 침은 발라야지.
“여기 촬영장이라서 아무 데나 가시면 안 되거든요. 될 수 있으면 은솔이 옆에 있어주세요.”
“네.”
“죄송해요. 말도 많이 못할 것 같아요.”
“네.”
최연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나 미쳤나 봐.’
무슨 생각으로 강진호를 촬영장까지 데리고 왔단 말인가.
아무리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지만, 최연하가 안 보이던 남자를 데리고 왔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는데.
웬만해서는 최연하의 일행까지 관심을 둘 중국인들이 아니었지만…….
최연하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고개를 돌려 강진호의 얼굴을 확인한 최연하가 한은솔을 다급히 불렀다.
“은솔아! 은솔아!”
“네?”
“밴에 가서 마스크하고 모자 가져와.”
“왜요?”
“저 양반 얼굴 좀 가려야겠어.”
“아!”
척하면 착이다.
최연하의 일행 중에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연하의 일행 중에 저렇게 생긴 남자가 있었다는 건 기사가 된다.
“지금 당장 가지고 올게요.”
밴으로 뛰어간 한은솔이 볼 캡과 마스크를 가져와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이거 착용 좀…….”
“네.”
강진호는 두말없이 마스크와 볼 캡을 받아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굳이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의미 없이 이런 것을 착용시킬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강진호가 얼굴을 가리자 그제야 최연하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게 나아요. 한 번씩 얼굴 드러내고 다니다 보면 불안할 때도 있으니까.”
“네?”
“아니에요. 그럼 오늘 촬영 끝날 때까지 은솔이 옆에 잘 붙어 있어요.”
“네. 그럼 다녀오세요.”
“안 가요. 지금부터 메이크업할 거예요. 어디 이상한 데로 빠질 생각 하지 말고, 은솔이 옆에 잘 붙어 있어요. 은솔이 옆이 내 옆이니까.”
“……네.”
한껏 신이 난 최연하가 앞장서 메이크업을 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는 최연하를 보며 지은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응?”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은 무슨. 아무 일 없어.”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시는데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평소에 내가 계속 화만 내고 있는 것 같잖니.”
‘사실이 그렇잖아!’
지은희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메이크업을 할 때도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무시무시한 얼굴로 거울을 노려보던 최연하다. 그런 최연하가 오늘은 봄날의 훈풍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피부가 갑자기 너무 좋아졌어요! 언니, 이거 봐요.”
지은희가 거울을 가리키자 최연하의 얼굴도 살짝 들떴다.
‘진짜네?’
아침에 씻을 때도 살짝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너무 바빠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거울을 보니,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거칠어진 피부도 뽀얗게 변해 있었고.
‘푹 자서 그런가?’
간만에 숙면을 취했더니 피부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강진호가 그녀의 몸의 탁기를 빼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최연하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꿈이 이상하더라니.”
“꿈? 무슨 꿈요?”
“아냐.”
최연하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입조심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간밤에 강진호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있는 꿈을 꿨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꿈속에서마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강진호였지만 말이다.
‘저 사람, 남성호르몬은 있나?’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사람이 욕구가 과한 것도 문제지만, 욕구가 너무 없는 것도 문제였다.
“……너무 그래도 좀 그렇지.”
“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메이크업이나 마무리해 줘.”
“네, 그럴게요. 응? 내가 볼터치를 했나? 왜 발그레…….”
“커흐흐흠.”
최연하가 헛기침을 하자, 지은희는 아무 말 없이 화장을 계속했다.
“그런데 언니.”
“응?”
“저기 저 사람은 누구예요?”
지은희가 눈짓으로 한은솔의 옆에 앉아 있는 강진호를 가리켰다.
“누가 보면 스토커인 줄 알겠어요. 얼굴 다 가리고 선글라스까지.”
‘은솔아, 은솔아…….’
최연하는 모자와 마스크로 만족했지만, 한은솔은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체 저 선글라스는 어디서 구해왔단 말인가.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걸친 남자를 보니 뭐라고 해야 할까…….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용의자 같네.’
미모는 완벽하게 가렸지만, 좀 많이 수상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 저 사람…….”
그때였다.
최연하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는 감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