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51
#650.
치료하다 (5)
최연하가 표정을 정비했다.
‘자, 이제 일해야지.’
일을 벌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터뜨리지는 않는다. 감정을 참지 못해 일을 터뜨렸다면 수습이라도 잘해야 한다.
한은솔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최연하도 자신이 일을 저질렀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물론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수습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를 한 번 냈으니, 이번에는 이쪽이 져줘야 할 차례다.
“오셨어요?”
최연하가 메이크업 담당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독의 시선이 날카롭게 최연하를 찔러 들어왔다.
“그래서, 기분은 좀 나아졌나?”
“네.”
최연하가 깔끔하게 대답하자 감독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저 사람에게 무슨 대답이 들어맞겠는가. 최연하가 숨만 쉬어도 화를 낼 판인데.
“그렇게 쉽게 나아질 기분이었는데, 그 난리를 쳤나?”
“죄송합니다.”
최연하는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았다.
온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이유를 들이밀어야 할 때와 들이밀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후자다. 어설프게 이유를 들이밀면 이 사람을 자극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래서 오늘 촬영은 할 생각인가 보지?”
“물론이에요.”
감독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최연하는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제 와 나 못 바꿔.’
촬영의 삼분의 이가 끝났다. 그중 최연하가 등장하는 장면이 한두 장면인가. 지금 자신을 자른다면, 그 부분을 다 다시 찍어야 한다.
그럼 올해 내로는 촬영이 끝나지 않을 거다. 최연하가 이대로 촬영을 계속해도 한 달 이상이 더 걸리는 일정인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촬영을 다시 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면 안 된다.
‘내가 어디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줄 알아?’
십 대 때부터 촬영장에서 먹고 잔 최연하다. 촬영 경력이라면 웬만한 중견 배우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렇게나 촬영을 많이 했는데 감독과의 트러블이 없었겠는가.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다들 일반인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런 이들과 보조를 맞추어 일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최연하라고 처음부터 먹어주는 배우였을 리 없다. 무명 시절도 겪고, 설움도 많이 당했다. 그 경험이 지금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이다.
반성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보다 ‘나는 너의 권위를 존중하고, 너의 권리를 침해할 생각이 없다’는 확고한 의사를 보여주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쯧.”
최연하가 저자세로 나오자 감독이 혀를 찼다.
“두고 보자고, 얼마나 잘하는지.”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성질 못 이겨서 난리 한 번 쳤죠.”
“…….”
“흔한 일이긴 한데,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게 문제죠. 저 감독도 만만한 감독은 아니고.”
한은솔의 말에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치고는 저자세인데요?”
“배우라는 게 연기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촬영이란 건 사람을 스트레스의 극한까지 몰아가요. 촬영이 꼬이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다가, 열심히 하려 해도 내 촬영이 없으면 그냥 기다려야 하거든요. 다음 신에 대한 감정을 잡으면서 그저 기다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다 예민하죠. 처세술이 없으면 힘든 게 배우예요.”
“음…….”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최연하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았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생각해 보면 그때그때 스타일을 달리하던 최연하다. 그를 대할 때와 보육원의 아이들을 대할 때가 전혀 달랐으니까.
“그럼 잘 해결된 건가요?”
“모르죠.”
한은솔이 어깨를 으쓱했다.
“감독이 마음먹고 배우를 엿 먹이려 하면 한도 끝도 없이 엿을 먹일 수 있거든요. 감독치고 성격 없는 사람 없고, 배우 길들이기에 도가 트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죠.”
“음…….”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촬영인데 뭘 어떻게 엿 먹인다는 거지?’
그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컷!”
감독의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게 아니라고! 좀 더 격하게!”
“예.”
“실수 없이 좀 가자고! 실수 없이!”
“죄송합니다.”
“최연하 씨, 미안해요. 다시 한 컷 갈 수 있겠어요?”
“……예.”
최연하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인데도 말이다.
촬영을 지켜보던 한은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 개새끼…….”
그가 말했다. 감독이 마음먹는다면 배우를 한도 끝도 없이 엿 먹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한은솔조차도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가자고, 다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간이 탈의실 안으로 최연하가 들어갔다. 그 탈의실 안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따라붙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쓴 관을 교체한 최연하가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는 드라이기를 든 스텝들이 최연하가 벗은 옷을 들고 나와 말리기 시작했다.
“자자, 실수 없이 가자고. 좀 격하게 뿌리란 말이야!”
“예!”
“자세 잡고. 고!”
최연하의 앞에 선 배우가 독한 얼굴로 물이 가득 찬 항아리를 들어 최연하에게 퍼부었다.
촤아아악!
차가운 물이 최연하의 전신을 적신다.
최연하는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을 뿌린 사람을 바라보았다.
“컷!”
감독이 손에 든 대본을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예!”
“격하게 뿌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말귀를 못 알아듣냐고!”
“죄송합니다.”
“이렇게 젖혔다가 앞으로 확 뿌려야 할 것 아냐. 지금처럼 붓는 느낌으로는 감각이 살지를 않는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조연 배우에게 화를 마구 낸 감독이 한숨을 쉬고는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한 번 더 갑시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최연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개새끼.’
교묘하다.
차라리 최연하의 연기를 지적하고 화를 냈다면 다들 감독이 강짜를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감독은 최연하가 아니라 다른 배우의 연기를 지적하고 있었다.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물을 뿌리는 장면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찻잔에서 항아리로 바뀐 것, 그리고 그 항아리가 황후 역할을 맡은 나이 든 여배우가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
그러니 NG가 자꾸 날 수밖에 없다.
완벽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는 완벽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얼핏 보면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감독이 완벽한 장면을 찍으려 노력하는 걸로 보일 것이다.
물론 그 피해는 최연하에게 고스란히 떨어지고 있었다.
‘나 몸 괜찮나 보네.’
어제까지의 최연하였으면 지금쯤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저 미친놈들, 어디서 물을 구해다 넣는지 이 땀 뻘뻘 나는 한여름에 얼어 죽을 지경이다.
옷을 계속 갈아입고는 있지만, 재촬영이 반복되는데 속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리 없다. 마른 옷으로 바뀌는 건 겉에 걸치는 커다란 궁장뿐이다. 그 안에 있는 옷들은 축축이 젖다 못해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최연하가 고개를 돌려 감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감독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최연하 씨가 열연을 해줘서 촬영하기가 편하네. 조금만 더 합시다. 이게 중요한 장면이어서.”
“네, 그러죠.”
최연하가 이를 악 다물었다.
엿을 먹인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촬영에 관계된 일이라면 엿을 먹어도 참아야 한다. 여기서 못 버티고 물러서게 되면, 정말 이 촬영은 끝이다. 모든 비난이 최연하게 쏠릴 것이고, 저 개 같은 놈은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한국 배우를 비난할 게 빤했다.
“옷 갈아입으실게요.”
탈의실로 향하며 최연하가 슬쩍 강진호 쪽을 바라보았다.
‘데리고 오지 말걸.’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안쓰러운 모습까지 보여주는 취미는 없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은 강진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최연하가 고개를 숙이고는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제 최연하 씨가 잘못을 했다는 말이죠?”
“……잘못했죠, 사실.”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고?”
“네.”
“그럼 하나 묻겠는데…….”
“네?”
한은솔이 살짝 몸을 세웠다. 강진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섬뜩하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한기가 드는 느낌이다.
“어제 벌어진 일에 대한 벌이 지금 합당한 겁니까?”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강진호의 질문을 들은 한은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한 거죠. 엄청 심해요. 저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 찬물만 지금 몇 번째 맞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오 들어 시작한 촬영인데, 지금 해가 지려고 한다. 한나절 동안 계속 저리 물을 퍼 맞고 있는 것이다.
‘건강 문제는 없겠지만…….’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겨울이었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최연하가 느끼고 있을 모멸감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개새끼, 진짜.”
한은솔이 감독 쪽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때, 최연하가 다시 분장을 마치고 촬영장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감독님!”
“다시! 액션!”
어김없이 최연하의 얼굴로 물이 퍼부어진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쿵!
조연 배우의 손에서 떨어진 항아리가 최연하의 발 바로 옆으로 떨어져 굴렀다. 만약 조금만 각도가 어긋났어도 큰 사고가 났을 만한 상황이다.
그 와중에도 최연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 장면이 미리 연출된 것이라는 듯 움찔하고는 살짝 놀랐다가 황망해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보였다.
보는 이들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컷!”
감독이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서 그걸 놓치면 어떡해! 사고 날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다시! 다시 가, 다시!”
상황이 심해진다 싶은 조감독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 그런데 장면 괜찮게 뽑혔는데요?”
“네가 감독이야?”
“……물론 감독은 감독님이시죠. 그런데 이제 해가 거의 져서, 내일 재촬영할 것 아니라면 슬슬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그래?”
감독이 최연하를 보며 소리쳤다.
“최연하 씨!”
“네.”
“아무래도 해가 질 것 같은데요. 오늘은 더 못 찍겠어요.”
“네. 어쩔 수 없죠.”
최연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이 촬영을 다시 해야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멈추는 게 다행이었다.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그래서 말인데…….”
감독이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어차피 이게 낮밤이 중요한 장면이 아니니까. 배경을 저녁으로 바꾸고 계속 촬영하자고. 생각해 보니 이게 밤이 더 어울릴 것 같아. 어때?”
“…….”
최연하가 입술을 깨물며 감독을 노려보았다.
“열심히 한다더니?”
감독의 이죽거림에 최연하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좋네요. 그럼 계속하시죠.”
“그래. 그래야 최연하지.”
감독이 크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스텝들의 얼굴에 불만이 드러났지만, 그 누구도 감히 감독에게 항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스텝이 아닌 자가 한 명 있었다.
한은솔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어?”
그러더니 한은솔이 채 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앞으로 걸어간다.
“아, 아니…….”
순식간에 감독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강진호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고는 감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깐 나 좀 봅시다.”
유창한 중국어에 감독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