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56
#655.
질주하다 (5)
사람이 살다 보면 할 말을 잃는 순간이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무슨 말로 이 어색함을 채워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지금 조감독은 그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못 봤어?”
다행이었다.
할 말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
“봤습니다. 물론 봤죠. 하지만…….”
조감독이 강진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워낙 인상적인 상황이라 단 한 번 본 얼굴임에도 너무 확연히 떠올랐다.
“잘 생기기야 잘 생겼죠. 그런데 그 정도 생긴 애들이야 흔하잖습니까. 류웨이만 봐도.”
“류웨이?”
“…….”
장시앙의 목소리에 묻어난 비웃음을 감지한 조감독이 입을 닫았다. 스스로 감독이라는 포지션을 달기 전까지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센스도, 능력도 아니라 눈치라고 생각하는 조감독이다.
“그런 놈이 잘생겼다고?”
“실제로 인기가 많잖습니까?”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네. 잘생겼다는 건 류웨이 같은 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아까 그놈 같은 게 잘생긴 거지.”
조감독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비주얼이 예술이란 말이야. 특히나 그런 타입은…….”
“저…… 감독님.”
조감독이 장시앙의 말을 끊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물론 감독님의 개인적인 취향이야 인정합니다. 사람은 다 다른 법이니까요. 그러니 뭐, 딱히 지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조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뭐, 연예계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중화계라고 통칭하기는 하지만, 중국 출신과 홍콩이나 마카오 출신들은 그 성향이 달랐다. 감독은 홍콩 출신이고, 홍콩 출신 배우나 연예 관계자들은 커밍아웃이 빈번했다.
“물론 감독님이 그런 성향이실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그런 개인적인 감정으로 뭔가를 결정하신다는 건 좀…….”
“개인적인 감정?”
조감독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사내가 마음에 든다는 뜻 아니셨습니까?”
“그렇지.”
“그럴 수 있죠,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다른 거니까요. 예전처럼 경원시하는 건 시대착오적이죠.”
“응?”
“하지만 촬영이 걸린 일인데, 개인적인 애정을 끌고 들어오시는 건…….”
“애정?”
장시앙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그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에 조감독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밍아웃하신 것 아니셨습니까?”
“뭐? 이 미친놈아!”
감독이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조감독에게 던졌다. 조감독이 날아드는 대본에 얻어맞고 얼굴을 감쌌다.
“여기서 커밍아웃이 왜 나와!”
“아니…… 그런 말을 하시기에. 그리고 그게 부끄러운 건 아니잖습니까.”
“잘 들어라.”
“예.”
“나는 여자가 너무너무 좋다.”
“……납득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진정성이 조감독의 가슴을 울려 댔다.
“그런데 그럼 왜 그런 애송이의 말에 납득하신 겁니까?”
“말에는 납득한 적 없어.”
“그럼요?”
“얼굴에 납득했지.”
“…….”
진짜 여자가 좋은 건가, 이 양반?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잘생긴 남자 따위 내 관심 밖이야. 하지만 나는 감독이란 말이지. 얼굴 하나만으로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 특히나 저런 선 굵은 얼굴은 말이야.”
“배우로 보신 겁니까? 완전 애송이 같던데요?”
“빌어먹을. 류웨이 따위도 주연 배우로 쓰고 있는데, 애송이인 게 무슨 상관이야? 벙어리여도 괜찮아. 그 얼굴을 쓸 수만 있으면.”
“……잠시만요, 감독님.”
조감독은 당황하고 말았다.
장시앙이 해외까지 그 이름을 알리게 된 이유는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영상미에 있었다. 하지만 그 영상미를 배우로 채우는 사람이 아니다. 소품이라든가 구도, 그리고 색감이 장시앙의 장기였다.
그런데 배우의 얼굴을 위해서 작품을 희생하겠다니.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시죠?”
“반쯤이야 농담이지만…….”
감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얼굴에 메이크업을 하고 카메라를 비추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단 말이야. 얼굴만으로 분위기를 잡을 수 있겠지. 한동안 그런 마스크가 없었잖아. 살짝 뭐라고 할까, 그냥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것만으로 느와르의 분위기가 나는 마스크. 예전에 그랬던 배우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버렸지.”
“느와르는 한물갔잖아요.”
“장르는 변하지 않아. 시대가 달라지면 장르의 표현이 달라지는 거지. 안 그래도 현대적 느와르를 하나 하고 싶었는데, 최적이란 말이지. 중국어도 잘하고.”
“사투리가 심하던데.”
“그게 포인트지. 살짝 뭐랄까, 야성미가 있잖아?”
“……감독님.”
조감독의 어이없어 하는 얼굴을 보고 장시앙이 피식 웃었다.
“남자 얼굴에 홀린 놈을 보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그런데 이건 내가 잘못된 게 아냐. 네가 진가를 못 알아보는 거지.”
“…….”
“그거, 장난 아니다. 잘생긴 애들이야 많지. 그런데 그런 선을 가진 남자는 요즘 흔하지 않아. 선이 굵은데 부담스럽지 않고, 사람 자체가 아우라가 있잖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네가 조감독이고, 내가 감독이겠지.”
“에이, 감독님. 제가 감독님 밑에 있으니까 조감독이지, 어디 가면 감독 대접 충분히 받습니다.”
“그래, 감독. 흔하디흔한 감독이 되겠지. 그 눈으로는 말이야.”
“…….”
“눈을 좀 더 키워봐. 쉽지 않겠지만 말이야.”
어물쩍거리는 조감독을 보며 장시앙이 혀를 찼다.
‘멍청한 놈.’
시나리오? 연출?
다 중요하지.
하지만 감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머릿속에 디테일한 장면까지 상상하고, 그 장면을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카메라로 보는 세상과 그냥 보는 세상은 다르다.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좋은 감독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놈은 글러 먹었다.
이만큼이나 설명을 해주는데 이해를 못하다니.
‘좋은 인상을 줘야지.’
이 드라마는 그에게 있어서는 거쳐 가는 과정 같은 것이다. 드라마라는 장르의 특성상 아무리 훌륭하게 마무리를 한다고 해도 그의 명성을 올려줄 수는 없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보류될 것이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찍어야 한다.
‘활용만 할 수 있다면 정말 끝내주는 패야.’
장시앙이 입맛을 다셨다.
보통은 그가 같이 영화를 찍자고 했을 때 거절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
“최연하하고 같은 차 타고 들어갔지?”
“예. 그렇습니다.”
“알겠어. 일단 알았어.”
장시앙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인상을 확 썼다.
“그런데 류웨이, 이 새끼는 아직 연락 안 됐어?”
* * *
“뜬금없이 휴가네.”
최연하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평소 같으면 호텔에 도착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올라갔겠지만, 오늘은 마음이 편안했다.
우선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휴가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하나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이렇게 안정이 되는구나.’
신기한 일이었다.
최연하의 상태는 여러모로 복잡하게 힘들었다.
단순히 촬영이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맞지 않는 문화, 그 외에도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그녀를 괴롭혔다.
그런데 강진호가 주변에 얼쩡거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것이 별거 아닌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 어색한 인테리어의 호텔 카페마저 한국의 카페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편안하다라…….’
최연하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어젯밤에 그런 일을 당할 뻔하고, 촬영장에서는 그 고생을 했는데 편안하다?
이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맛이 가버렸거나, 그게 아니면…….
“갑자기 얼굴은 왜 또 빨개져요? 갱년기예요?”
“너, 진짜 뒈질래?”
최연하가 쿠션을 움켜잡자 한은솔이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음료들을 보호했다.
“뜬금없이 얼굴이 변하니까 그렇죠.”
“얼굴 변하는데 네 허락 받아야 돼?”
“음……. 내가 매니저니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에 전화해서 다른 매니저 보내라고 해.”
“누나, 정신 차려요. 누나는 매니저 업계의 불지옥이고, 헬게이트예요. 누가 누나 매니저를 하고 싶어 하겠어요.”
“전혀 없는 수준이냐?”
“두 배 줘도 안 한대요.”
최연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은솔을 보며 말했다.
“나 진짜 이해가 안 가서 물어보는 건데…….”
“네.”
“나, 솔직히 너한테 엄청 잘해주지 않냐?”
“…….”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한은솔을 보며 최연하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아니라고?”
“아뇨, 맞죠. 네, 잘해주시죠. 그렇죠.”
“대답에 영혼이 없는데?”
“……누나.”
“응?”
“사람이 보통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때는요…….”
한은솔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그 사람이 주변의 친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지 않아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죠.”
“그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잘하잖아.”
“누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잘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잘하는 거예요. 팬이라든가,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이라든가, 말 몇 번 안 섞어본 사람이라든가.”
“그게 그거 아냐?”
“누나한테 신입 매니저는 어떤 사람인데요?”
“내 심부름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잘해줘야 해요, 아니면 안 잘해줘야 해요?”
“너, 질문이 엄청 멍청하다. 내가 그 사람한테 잘해줄지 아닐지를 왜 고민해? 걔는 돈 벌러 온 사람이고, 나는 걔한테 돈 주고 심부름시키는 건데. 그냥 서로 사무적으로 대하면 그만이지.”
“……그럼 결론 났네요. 누나의 ‘사무적’이라는 개념이 좀 이상해요.”
“아닌데?”
최연하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러 먹었어.’
이건 못 고친다.
한은솔은 최연하의 매니저를 처음 맡았을 때 받은 설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강원도에서 촬영에 한창인데, 갑자기 자주 가는 단골 카페의 커피가 먹고 싶다고 난장을 부려 서울을 다녀오게 만들지를 않나, 막상 커피 가져오자 식어서 맛없다며 버리지를 않나.
‘내가 팬이어서 참았지.’
개인적으로 최연하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감정이 없었다면 절대 못 버텼을 것이다.
하기야 그때의 최연하에 비하면 지금 최연하는 천사다, 천사. 그것도…….
“어?”
“왜?”
“아, 아뇨.”
한은솔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 요즘에는 무척 정상적이잖아?’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자면 최근의 최연하는 보통의 여배우보다 덜 까탈스럽다. 과거 여배우의 끝판왕, 매니저계의 불지옥이라 불리던 시절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 수준이다.
한은솔은 그게 자신이 최연하와 많이 친해져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최근에는 스탭들에게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은솔이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뭘 꼬나봐?”
“…….”
아니, 사람이 바뀐 건 아닌 모양이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