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67
#666.
조정하다 (1)
목소리.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고저가 없고, 빠르거나 느리지도 않은.
그냥 들었을 때는 그저 평범한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목소리가 이 어둡고 음침한 공간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 기묘한 위화감을 만들어냈다.
류웨이는 웅크렸던 몸을 풀었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소심한 저항을 시도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숨을 죽인 채 없는 척한다든가, 그게 아니면 다른 탈출구를 찾는다든가 말이다.
하지만 류웨이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저항이 부질없다는 것을 말이다.
저 건너편에 있는 이가 그가 예상하는 ‘그’라면, 그 어떤 저항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류웨이가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몇 번이고 움찔하다가 이내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류웨이는 되레 안도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제 더는 떨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이 순간부터 그는 저자가 그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는 해방된 것이다. 이곳에 있는 자가 또다시 그를 찾아올 수는 없으니까.
물론 이제부터는 저자와 대면해야 한다는 새로운 공포가 생겨나겠지만.
류웨이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차마 그자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턱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몸을 작게 웅크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모양인데…….”
“……사, 살려주십시오.”
“…….”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옷 입어.”
“……예?”
류웨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강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류웨이는 깨달았다.
다르다.
정확하게 무엇이라 짚어낼 수는 없지만, 뭔가 달랐다. 그날 그가 본 강진호와 지금의 강진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외모가 좀 눈에 띄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자는 사람의 규격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류웨이를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스스로 사람의 규격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인간이 얼마나 소름 돋는 존재인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오히려 메스꺼움이 더 심해졌다.
“촬영 가야 하니까 옷 입으라고.”
“…….”
류웨이가 혼란에 빠졌다.
촬영? 지금 촬영이라고 한 건가?
“이야기했을 텐데.”
강진호가 손을 뻗어 류웨이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강한 힘으로 조인 것도 아니다. 그저 얼굴을 잡았을 뿐이다. 하지만 류웨이는 마치 달궈진 인두가 자신의 얼굴을 지진다는 듯 전신을 떨었다.
“네 시간이 끝나면 내가 다시 찾아올거라고 말이야. 그때 네가 어떻게 될지도 이미 보여주지 않았나?”
“흐으…….”
류웨이의 전신에서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차라리 꿈이라고 여겨 버리고 싶은 그 순간들을 말이다.
환상.
전신이 하나하나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해체되는 그 환상, 그 생생하기 짝이 없던 고통.
엘리베이터에 실려 내려온 그를 사람들이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아마 류웨이는 쇼크사했을 것이다.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그리고 류웨이는 알고 있었다. 그때 그가 보고 겪은 광경은 환상에 불과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는 그 환상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는가.
강진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생각하라고 했을 텐데. 네가 왜 살아 있는지. 쓸모가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별로 쓸모가 없군.”
“으…… 으으…….”
“자, 이제 말해봐, 네 입으로. 네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의 머리는 지금 태어난 이후로 가장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으니까.
“쓰,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잘 알고 있군.”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해봐. 네 쓸모는 뭐지?”
“저, 저는…….”
류웨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쓸모는 뭐지?
아니, 이자가 자신을 쓸모 있다고 여길 부분이 무엇이었던가. 활성화된 그의 뇌가 그 대답을 금세 찾아냈다.
“배, 배우!”
류웨이가 소리쳤다.
“저는 배우입니다!”
“알고 있군.”
강진호가 류웨이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류웨이는 이 순간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에 더없이 감사했다. 아직 촬영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네 쓸모는 이제 네 스스로 증명해야 할 거야.”
류웨이는 입도 열지 못한 채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판단이 선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그를 지배했다.
“가자.”
강진호가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아…….”
홀린 듯이 뒤를 따르던 류웨이의 눈에 강진호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강진호가 몸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 하는 말이지만,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숨어서 날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죽는다면 촬영은 힘들어지겠지만…… 주인공이 사고로 다리를 잃는 설정이라면 시나리오로 커버할 수 있지 않겠어?”
류웨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도.
* * *
“그림 나오네.”
“그러네요.”
장시앙이 화면을 보며 턱을 쓸어내렸다.
‘뭔가 좀 모자라던 부분이 채워진 느낌이란 말이지.’
최연하는 연기를 잘한다.
그건 장시앙도 인정했다. 애초에 최연하가 연기를 못했다면 아무리 비주얼이 좋아도 캐스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여주인공 역을 맡을 배우를 선정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연기력이다.
남자 주인공의 연기가 개판이니, 여자 주인공이라도 연기를 잘 해줘야 어떻게 커버가 되지 않겠는가.
가끔 연기력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같은 화면에 잡힐 때, 발연기가 확 튀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장시앙의 연출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최연하는 지금까지 장시앙의 기대치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많아.’
연기를 업으로 여기며 사는 이들치고 연기를 못하는 이를 찾는 게 더 힘들다. 특히나 이만한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이들은 연기력 정도는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다.
그 연기력에 비주얼이나 다른 부분이 추가되어야 스타가 되는 것이다.
진짜 연기만으로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연기를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연기로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흡입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최연하는 그냥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카메라에 잡히는 최연하는 그전과는 뭔가 다른 배우가 되어 있었다.
“애달픔이 묻어나네요.”
“흐음.”
표정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슬픔을 끌어낸다.
심지어 화면을 보고 있는 와중에 최연하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다.
‘배우는 이래야지.’
여배우는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진짜 여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작품을 보는 이들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마저 잊게 만들어야 한다.
부족하던 최연하의 무언가가 지금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뭐가 달라진 걸까요?”
“……류웨이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가능성이 있네요.”
장시앙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최연하는 류웨이를 싫어한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는 류웨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 간극이 최연하가 연기에 100% 몰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최연하는 프로이고, 촬영이 시작되면 정말 완벽하게 사랑을 연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연기된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같은 것이다.
류웨이가 아닌 누굴 가져다 놓아도 같은 연기가 나온다. 누구도 어색하지 않다. 그건 반대로 말해 상대 배우가 류웨이라서 나올 수 있는 독특함을 버린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지금 최연하의 연기가 공산품을 벗어나고 있었다.
마치 진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류웨이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연기하기 편해진 면도 있겠지만, 저건 그런 편안함으로 나올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에라도 빠진 모양이지.”
“예?”
“오케이! 좋았어!”
장시앙이 조감독의 말을 무시하며 성공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진짜 수고했어요. 완벽해!”
장시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연하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가 박수를 치자 다른 이들도 같이 박수를 쳤다.
최연하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완벽했어. 크으, 이렇게만 해주면 내가 걱정 없이 촬영할 텐데 말이야.”
“별다른 것도 없었는데,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별다를 게 없다니. 나중에 이거 모니터링 꼭 해봐요. 정말 끝내주게 뽑혔으니까.”
“진짜요?”
최연하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맺혔다. 연기자에게 연기가 좋았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단독 촬영분은 대충 다 찍었는데…….”
장시앙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류웨이, 이 새끼 연락됐어?”
“……아뇨, 아직.”
“아니, 진짜.”
장시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단독 촬영분을 다 찍었는데, 아직까지 주연배우와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막 장시앙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최연하가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감독님.”
“응?”
“은솔아, 연락됐어?”
“지금 톡 중입니다. 데리고 오고 있다는데요?”
“응. 알았어.”
최연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장시앙을 바라보았다.
“지금 류웨이 찾아서 데리고 오고 있대요.”
“뭐?”
장시앙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소속사에서도 못 찾은 류웨이를 누가 찾아서 데리고 온단 말인가.
“누, 누가?”
“있어요. 슈퍼맨.”
최연하가 고소를 머금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반응에 장시앙이 막 미간을 찌푸리려는 찰나.
“저기 오네요.”
최연하가 뒤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촬영장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새하얀 밴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거, 최연하 차잖아?’
저기에 류웨이가 타고 있다고?
아니, 그리고 왜 류웨이가 최연하의 차를 타고 온단 말인가.
사람들의 의문 어린 시선을 잔뜩 받으며 차가 멈춰 섰다.
드르르륵.
그런 후, 옆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류웨이!”
“너, 이 새끼! 어디에 있다가 이제…….”
막 소리를 지르려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뭐야?’
‘뭔 일이 있던 거야?’
류웨이의 얼굴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사람을 관 속에 가둬두고 며칠 굶기면 저런 얼굴이 될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류웨이의 표정도 평소 그가 보이던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던 그의 표정은 어디에 갔는지, 공포에 질린 류웨이가 자꾸만 뒤쪽을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덜컥.
그때, 운전석이 열리더니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내렸다.
“인상 펴.”
그가 내뱉은 한마디에 류웨이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 기묘한 광경에 사람들의 시선이 운전석에서 내린 이에게로 집중되었다.
‘뭐 하는 놈이야, 저거?’
그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