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74
#673.
달려들다 (3)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감정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으로 결정된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대부분의 감정은 외부의 작용에 대한 내부의 반작용일 뿐이다.
홀로 상상하며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건 홀로가 아니다. 일전에 받은 외부의 작용을 되살리는 것뿐이니까.
쉽게 말해 인간의 감정은 사건에 좌우된다는 뜻이다.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충격을 감정으로 변환하여 자신의 상태를 결정한다.
한은솔 역시 사람이기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 그의 프로세스가 살짝 어긋났다. 가벼운, 아주 가벼운 문제 하나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미치겠네.’
인적 하나 없는 외진 산길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는 것은 꽤나 위협적인 일이다. 게다가 그 차를 세우는 방식이 칼을 던져 차의 앞 유리를 깨는 과격한 방법이라면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이 사건에 대한 한은솔의 올바른 반응은 당연히 공포에 질리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소시민이라고.’
물론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당당히 나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은솔은 제 목숨 귀한 줄 아는 소시민이었다.
이왕이면 다치지 않는 게 좋다. 그리고 죽지 않는 게 좋았다. 혹여나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사는 쪽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당연히 공포와 당혹을 느껴야 하는데…….
‘아니, 뒤에서 그런 표정 짓고 있지 말란 말이야!’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솟구쳐 올라오던 공포가 룸미러로 비치는 얼굴을 보는 순간,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다시 들어가 버린다.
그러니까 저 얼굴이 뭐랄까, 참…….
‘발그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싱글벙글?
‘빌어먹을, 아무려면 어때.’
여하튼 뭔가 참 부드럽고,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다른 곳에서 저런 최연하의 얼굴을 보았다면 한은솔은 감탄을 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얼굴이 아닌가.
최연하는 모든 연기를 평균 이상으로 할 수 있다고 평가받지만, 유독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역할만은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최연하가 그동안 만들어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최연하의 매니저로서는 기뻐서 깨춤을 춰야 할 일이다. 그의 배우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뭐랄까…….
‘왜 하필 이때냐고.’
아니, 지금이 이럴 때가 아니잖아!
눈이 없나? 시력이 안 좋은가?
차 유리가 깨져서 오히려 잘 보일 텐데, 시력에 이상이 있지 않고서 어떻게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저기 칼 든 무뢰배들이 몇이나 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이는데!
게다가 지금 여기는 외길 위란 말이다.
옆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앞은 막혀 있다. 차를 돌릴 공간도 충분히 나오지 않는다. 저들과 충돌하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후진으로 달려야 하는데…….
꿀꺽.
길옆의 벼랑을 본 한은솔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무리지, 무리야.
여기서 어떻게 후진을 해. 나는 못해.
슬쩍 뒤를 돌아본 한은솔이 최연하의 얼굴을 보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년 만화예요!”
위기가 닥치니 잠재력이 각성하게?
그리고 각성하려면 다른 쪽 능력치를 각성하든가. 왜 이런 데서 연기력과 감정 표현력이 성장한단 말인가. 스탯 잘못 찍은 망캐도 아니고.
사람이라는 건 공감의 동물이 아닌가. 내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옆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감정이 어색해진다.
둘이서 공포 영화를 보는데 무서운 장면에서 누군가 낄낄대고 웃으면 그 상황이 어색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기쁜 감정을 느낄 여지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상황을 가려야지! 하늘 위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있는데, 로또에 붙었다고 좋아하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있긴 하네. 그의 뒷자리에.
한은솔은 룸미러에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말해 뭐 하겠는가, 속만 터지지.
애초에 그가 이 정도로 막 나가는 말을 던졌는데도 최연하가 반응이 없다는 것에서 대화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바로 욕이 날아오거나 쿠션이 날아왔을 텐데, 반응이 없는 것 보라.
완전히 맛이 갔다.
‘그리고 저 인간은 왜 나가는 거냐고!’
속이 새까맣게 타는 기분이었다.
물론 아까 생각한 대로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한두 명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문제는 하필 그 한두 사람이 그의 차에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는 것.
‘왜! 왜 나가냐고! 왜!’
상식적으로 여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올바른 대처가 무엇인가.
차 문을 걸어 잠그고 액셀을 밟는 것이다.
다짜고짜 차에 칼을 던지는 인간들을 곧이곧대로 상대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앞 유리가 깨져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에서 내려 맨몸으로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과잉 대응이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백배 나으니까. 게다가 중국이라는 나라는 범죄자에게 가혹한 면이 있어서 과잉 대응을 인정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그들이 외국인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왜 나가냐고! 왜에에에!”
한은솔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최연하는 그와는 조금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 시끄러! 왜 소리를 질러?”
“지금 제가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요? 그런 얼굴 하고 있지 말고, 저 사람 좀 말려봐요.”
“내 얼굴이 왜?”
“거울이나 좀 보시죠.”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도 아니고, 말리긴 왜 말려?”
“원래 애보다 철없는 어른이 더 무서운 거거든요? 지금 당신 애인이 칼 든 사람들한테 맨몸으로 들이대고 있잖아요. 저러다 칼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안 맞아.”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너, 내가 언제 틀린 말 하는 거 봤니?”
“……바른말하는 거 봤니를 잘못 말씀하신 것 아니에요?”
“죽어, 너.”
최연하가 눈을 날카롭게 떴지만, 이번만큼은 한은솔도 물러서지 않았다.
“농담하실 때가 아니에요. 저러다가 진짜 다친다구요.”
“안 다친다니까.”
“에이 씨!”
한은솔은 최연하와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눠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안전벨트를 풀었다. 어차피 말로 해서는 답이 없을 것 같으니 직접 나가서 강진호를 말리려는 것이다.
“나가지 마.”
“잠깐만 여기 계세요!”
“너, 내가 나가지 말라고 했어.”
“…….”
최연하의 목소리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챈 한은솔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과연 최연하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지만, 흥분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무척 냉정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안 말리냐고.’
일행이 미친 짓을 하고 있는데 왜 말릴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야. 나섰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으…….”
한은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최연하가 사고를 치면 모르겠지만, 강진호가 벌이는 일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그가 지켜본 강진호는 대책 없이 사고를 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대책이 있다는 말인가.
다시금 앞을 바라보는 한은솔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내가 지금 좀 조신해지기로 작정한 참이거든. 괜히 아녀자가 이럴 때 나서면 바깥사람 체면이 안 살잖아.”
“…….”
한은솔의 폐부에서부터 막을 수 없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젠 모르겠다.
저벅저벅.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길을 막고 있는 이들 앞으로 다가갔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예전에 몇 번 겪어본 적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산적이라도 만난 기분이군.’
강진호는 웃고 말았다.
과거 중원에는 산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산적도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가혹한 세금을 이기지 못한 양민들이 산으로 올라가 어떻게든 빌어먹고 살겠다고 도적질을 하는 경우가 있고, 관에 잡히지 않고 당당히 산적질을 하겠다고 산으로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전자는 산적이라 불렸고, 후자는 녹림이라 불렸다.
지금 그의 앞을 막아선 이들은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까운 느낌이 났다.
재물을 빼앗겠다는 눈들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살기가 느껴졌다.
평소의 강진호였다면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살기를 뿜어내는 순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상대의 뼈와 살을 분리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나는 관대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일은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것 아닌가.
실수 한 번 저지를 때마다 죽어야 한다면, 세상에는 사람이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게 빤했다.
그러니 관용을 보여줄 수 있…….
“뭘 실실 처 웃고 있나?”
어라?
이건 좀 아닌데.
다짜고짜 날아오는 욕설에 강진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들은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대단한 상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강진호의 길고 긴 인생을 통틀어 자신에게 살기를 내뿜은 자를 곱게 보내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 누구도 받지 못한 특혜를 주고자 마음먹은 참인데, 이리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하다.
“뭘 쪼개냐고, 이 새끼야.”
“…….”
강진호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이럴 때는 중국어를 잘하는 게 한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한 것이…… 현대의 중국어는 과거의 중국어와 큰 차이가 있지만, 저 욕의 어감만큼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우득.
강진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욕을 하는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은 수백, 수천 가지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강진호가 아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막 강진호가 이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찰나,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강종인인가?”
‘강종인?’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은데…….
“아!”
강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현수가 마련해 준 여권. 그 여권에 강종인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 이름을 쓰라고 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아서 알아채는 게 조금 늦었다.
‘그럼 나를 찾아온 건 아닌가?’
자신이 강진호라는 사실을 알고 온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럼 이곳에서 벌어진 트러블 때문에 왔다는 건데…….
그때, 사내가 결정타를 날렸다.
“궈리친은 어디에 있지?”
강진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궈리친, 궈리친이란 말이지…….
강진호가 환하게 웃었다.
이상한 일이다.
바로 전까지 강진호는 딱히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미약하나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활짝 웃는 웃음이 더해지자, 이상하게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대답을 원해?”
사내가 껄끄러운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뭔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때,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을 것 같나?”
더없이 섬뜩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