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81
#680.
맞이하다 (5)
하얀색 밴.
산길을 올라오느라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하얀색 밴이 장시앙의 눈에 들어온다.
‘최연하 밴이잖아.’
확실히 저 여자는 악취미가 있었다. 관리하기도 힘든 저 하얀색 밴을 굳이 고수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얼씨구?”
앞 유리는 어디로 날아갔단 말인가.
장시앙이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멀쩡한 놈이 하나가 없네.’
류웨이 하나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여자는 갑자기 또 왜 저런단 말인가. 유리가 날아갔으면 유리를 갈아 끼우든가. 앞 유리가 날아간 차를 타고 왜 굳이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오늘 촬영도 없는데.
‘빌어먹을 편두통.’
옆머리가 바늘로 찔러오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한다. 스트레스를 너무 과도하게 받은 모양이다. 그런 장시앙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밴은 태연하게 촬영장 한쪽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죽을 거야.”
“뭐?”
“주, 죽을 거야. 죽어, 죽을 거야.”
“아니, 이 미친놈아.”
갑자기 류웨이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평소 간질이라도 앓고 있었는지, 전신이 벌벌 떨린다. 얼마나 심하게 떠는지 옆에 있는 장시앙이 그 떨림을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왜 이래, 인마!”
“……주, 죽…….”
류웨이의 눈이 공포로 물든다.
드르르륵.
밴의 옆문이 열리고, 담요로 전신을 감싼 최연하가 훌쩍이며 밴에서 내렸다.
“으으, 춥다.”
‘아직 여름이야, 이 여자야.’
머리가 다시 아파온다.
아무리 이곳이 산꼭대기라 다른 곳보다는 기온이 낮다고는 하지만, 아직 가을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이른 날씨였다. 그런데 담요를 전신에 두르고 콧물을 훌쩍인다?
기행도 정도껏 해야 하는 법이다.
최연하가 성큼성큼 장시앙에게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촬영 잘되어가고 있어요?”
“……그렇지. 그런데 최연하 씨는 왜 그러고 있어?”
“추워서요.”
“……추워?”
최연하가 크게 기침을 하더니 몸을 떨었다.
“앞유리가 없으니 찬바람이 너무 들어와요. 동태되는 줄 알았네.”
그럼 오지 마!
아니면 차를 고치고 오든가!
촬영도 없는데 왜 굳이 그런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냐고!
일부러 사람 속 뒤집어놓으려는 것도 아니고.
할 말은 많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장시앙은 어른이고,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왜 왔어?”
“구경 왔어요.”
“구경?”
“예. 다음 신이 워낙 중요하잖아요. 화면만 받으면 감정 잡기가 좀 힘들 것 같아서, 쟤촬영하는 것 보면서 좀 맞추려구요.”
아주 좋은 자세다.
눈물이 날 만큼.
원치 않게 찍게 된 드라마이지만, 두 주인공이 이토록 열심히 해주면 누구라도 힘이 나지 않겠는가. 누구라도.
장시앙만 빼고 말이다.
‘너희, 나한테 왜 이러냐, 나한테 왜!’
류웨이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굳이 촬영장에 와 죽치겠다는 사람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 좋다. 촬영장에 올 수도 있지.
그동안 여러모로 껄끄러운 일이 있어서 영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기는 하지만, 배우가 촬영이 없는데도 촬영장에 나오는 것은 칭찬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 새끼는 왜 또 패닉이냐고!’
문제는 최연하가 등장하면서 류웨이가 정신을 놓아버렸다는 점이다.
“야, 새끼야. 침 흐른다.”
장시앙이 지적을 해주었지만, 류웨이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입을 헤, 벌린 채 모든 시선을 최연하의 밴에 주고 있을 뿐이다.
‘밴?’
그런데 왜 밴인가.
최연하가 내려 버린 밴에 뭐가 있다고?
장시앙의 시선도 자연히 밴으로 돌아갔다. 아직 열려 있는 밴의 문 안쪽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내렸다.
‘한국 놈이네.’
저놈도 요즘 참 자주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촬영장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인간이 한둘은 아니다. 하지만 저놈은 이상하게 존재감이 있어서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장시앙이 그를 어떻게 꼬셔볼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얼씨구?’
류웨이의 떨림이 멈췄다.
저 한국 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마치 얼어버린 듯 그의 몸이 굳어버렸다.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류웨이가 이 난리를 친 이유가 바로 저놈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장시앙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 강진호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고는 류웨이나 장시앙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최연하에게 물었다.
“잘되고 있답니까?”
“글쎄요, 영 대답이 없네. 그리고…….”
최연하가 류웨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또 상태가 왜 이렇지? 원래 애가 상태가 안 좋긴 했는데, 그새 맛이 가버렸네. 야, 너 마약했냐?”
“…….”
조금 과격하기는 하지만 최연하는 류웨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류웨이만 보면 뭐 씹은 표정으로 욕을 쳐 대던 최연하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류웨이는 그토록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최연하가 먼저 말을 걸어주고 있음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강진호에게만 꽂혀 있었다.
“쯧쯧.”
최연하가 혀를 차고는 강진호를 타박했다.
“애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이렇게 돼요?”
“딱히 괴롭힌 건 없는 것 같은데.”
“이게 혼자서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에요? 혼이 빠졌는데? 혼이?”
“원래 좀 소심한 모양이죠.”
강진호로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로 그는 류웨이를 괴롭힌 적이 없었으니까.
그의 기준으로 ‘괴롭힌다’라는 말이 나오려면 적어도 궈리친 정도로는 당해야 한다. 그 궈리친에 비한다면 류웨이는 정말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좀 해봐요.”
“음…….”
강진호가 곤란하다는 듯 침음성을 내고는 류웨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류웨이에게 가져갔다.
“히익!”
강진호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온다 싶자 류웨이가 움찔움찔했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데 어떻게든 참아내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툭.
강진호가 그런 류웨이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동시에 류웨의 몸에서 뭔가가 풀려 나간다.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빠지고, 눈빛이 조금 진정된다.
“정신 차려.”
“예? 아…… 예! 예!”
류웨이가 부동자세로 몸을 세웠다.
강진호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영 대가 약하군.’
딱히 정신적으로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류웨이는 미치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있었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탁기가 겉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집중하지 않아도 훤히 보일 정도다.
이대로 며칠만 더 흘렀다면 그걸로 끝이다. 아마도 류웨이는 평생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나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필요가 있으니 적당히 해소해 줄 필요가 있다.
류웨이는 정신이 좀 맑아졌는지 여기저기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아마도 자신의 상황을 다시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감독님.”
“음?”
최연하가 담요를 걷어내며 말했다.
“촬영한 것 좀 볼 수 있어요? 저도 감정 잡아봐야 하는데?”
“볼 수야 있지. 그런데 류웨이가 영 쉬지 않겠다고 해서.”
장시앙이 곤란하다는 듯 최연하와 류웨이를 번갈아 바라보자, 최연하가 류웨이를 보며 말했다.
“너 좀 쉬면 안 돼?”
“하, 하지만…….”
류웨이가 강진호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강진호가 간단히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가.”
“예.”
그걸로 끝이었다.
류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컨테이너로 뛰어갔고, 최연하와 장시앙은 황당하다는 듯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거, 또라이네.”
“제정신은 아냐.”
여하튼 상황이 정리되기는 했다.
“아…….”
그 순간, 장시앙이 머리를 긁었다.
“이왕 촬영한 거, 볼 거면 같이 보면 좋은데. 저놈도 다시 봐야 해서.”
“돌아와.”
장시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진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게 들리겠…….”
그 순간, 달려가던 류웨이가 몸을 급격하게 틀더니, 다시 그들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최연하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
강진호는 매우 억울했다.
“……이게 류웨이라고?”
다리를 꼬고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던 최연하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조금 더 몸을 앞으로 내밀고는 화면 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뭐야, 이게?’
대단한 건 아니다. 굉장하다고 할 만한 일도 아니다.
그저 연기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그녀가 촬영장을 떠나기 전까지, 류웨이는 도무지 배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불과 며칠 사이에 ‘연기’를 하고 있다, 연기를.
‘진짜 약 빨았나?’
아무리 의지가 있고,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는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만에 사람이 이리 달라질 수가 있나?
설마…….
“연기 천재?”
“에이, 아니겠지. 에이.”
최연하의 말에 장시앙이 손을 격하게 내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
“그래도 이거 대단하지 않아요? 전교 꼴찌 하던 애가 평균까지는 올라왔는데?”
“그렇긴 하지.”
장시앙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이 수준까지 와주었다면 드라마의 격을 두어 단계는 더 올릴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래주는 게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잘하는 겁니까?”
강진호의 말에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요. 물론 잘한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음, 거북이가 날고 있는 걸 보는 느낌?”
“이해가 안 가는데.”
“다른 사람이 이 정도 하면 ‘아, 그렇구나’ 할 텐데, 쟤가 이 정도로 연기하는 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거든요. 데리고 가서 DNA 검사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에요. 동일인이 아닐 수도 있어요. 중국 정부에서 이번 드라마를 흥행시키기 위해서 클론을 투입했다고 하면 차라리 납득할 정도.”
“……잘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류웨이를 바라보았다. 류웨이가 움찔했지만, 조금 전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따라와.”
“예.”
강진호가 앞서 걸어가자 류웨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구석진 곳으로 향하자 장시앙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저렇게 데리고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연기 지도 하겠죠.”
“……응?”
“생각하시는 그런 것 아니에요. 착한 사람이거든요.”
‘착해?’
장시앙이 고개를 돌려 촬영장 구석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다.
예전 영화 촬영 때문에 군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구석에서 신병을 괴롭히는 군인의 모습을 본 적 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구도가 딱 그랬다.
짝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우며 뭔가 말하는 강진호와 그 앞에서 부동자세로 파랗게 질려 있는 류웨이.
‘모른 척하자.’
장시앙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류웨이의 태도가 바뀐 덕분에 앞으로의 촬영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굳이 그런 사항을 지적해서 일이 꼬이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대체 누군데 저 천하의 류웨이를 저리 만들 수 있는 거야?”
류웨이가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을 생각한다면, 보통 사람은 류웨이를 건드릴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런 이를 순한 양 정도가 아니라 공포에 질린 양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니.
“뭐랄까,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데……. 음, 굳이 말하자면 그런 말이 적당할 것 같은데요.”
“무슨 말?”
“인간 갱생기?”
“…….”
“효과는 확실해요. 저도 효과 봤어요. 제가 예전 성격 그대로 왔으면 지금쯤 감독님은 류웨이는 그래도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을 거예요.”
웃음기 섞인 최연하의 말에 장시앙이 눈을 감아버렸다.
이곳이 촬영장인지 폭탄이 가득한 전쟁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장시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