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86
#685.
지원하다 (5)
“가요?”
“네.”
“어딜 가는데?”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
“흐으으응?”
강진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최연하의 표정이 조금씩 샐쭉해지는 게 그의 눈에도 보였다.
‘구박받을 것 같은데?’
강진호가 미묘하게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최연하의 반응은 강진호의 생각과는 달랐다.
“다시 올 생각은 없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럼 거기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네요?”
“그렇겠죠.”
“네. 어쩔 수 없죠. 조심해서 일 보세요.”
“네?”
“왜요?”
“아니…….”
강진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왜요? 내가 왜 벌써 가냐고 타박이라도 할까 봐서요?”
“아닙니다.”
“맞는 것 같구만 뭘.”
최연하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타박할 일이 아니라, 제가 사과해야 할 일이죠. 놀아달라고 불렀는데 막상 놀지는 못하고 일만 하고, 게다가 귀찮을 일도 자꾸 만들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는 거예요.”
“제가 괜찮으면 된 것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죠. 누가 잘잘못을 당사자 합의로 정해요. 명확한 선이 있는 건데. 이번에 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워낙 저지른 죄가 많아서 어디서부터 사과를 드려야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과받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사과 안 해요.”
“……네?”
강진호가 의문 어린 눈으로 최연하를 보았다. 이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항상 말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사과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구요. 그거 그냥 잘못한 걸 말로 떼운다는 거잖아요. 사과해서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으면 법은 왜 있고, 전쟁은 왜 있게요.”
“……그, 그건 그렇죠.”
“이럴 때는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보답을 해야죠. 그래야 사람이지. 염치가 있는 사람이지.”
강진호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보답을 한다는데 안 받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괜히 먼저 나서서 설레발을 떠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어색하고.
하지만 다행히 최연하는 강진호의 반응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게 고민이란 말이에요.”
“뭐가요?”
“보답은 해야겠는데, 강진호 씨에게 딱히 뭔가 해줄 게 없거든요. 돈도 나보다 많은 것 같고, 필요한 것도 없어 보이고.”
강진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살짝 분위기가 미묘해진다는 느낌에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머금었다.
“몸으로라도 때울까?”
푸우우웃!
커피가 직분사되어 앞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최연하는 마치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틀어 날아드는 커피를 피했다.
“진짜 빤한 사람이라니까.”
“아, 아니, 당황해서.”
“농담한 것 가지고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나도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거든요?”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진짜?”
“네?”
“진짜 바란 적 없어요?”
“아, 아니…….”
“은근히 바라는 것도 같은데?”
“아닙니다.”
짓궂게 묻던 최연하가 미묘한 미소를 머금고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혹적인 그 시선을 받은 강진호의 이마에 커다란 땀방울이 맺혔다.
“여하튼 귀엽다니까.”
“…….”
강진호가 어색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최연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얼어 있지 말아요. 곱게 보내준다는데 왜 긴장하고 있어요.”
“아뇨. 그…….”
“그럼 바로 출발하는 거예요?”
“오늘 저녁쯤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일도 아니라.”
“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연하도 그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흐음…….”
최연하는 가만히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누나.”
“응?”
한은솔이 조금 한심하다는 얼굴로 최연하를 보고 있었다.
“정신 좀 차려요.”
“왜? 내가 뭐? 뭐, 이상한 거라도 있니?”
“누나.”
“왜? 나 멀쩡하잖아.”
“……다리 안 저려요?”
“으응?”
최연하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꼰 다리를 살짝 펴려던 최연하가 동작을 멈췄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
“이, 이거, 왜 이러지?”
“당연히 저리죠. 누나 한 시간째 그러고 있었어요. 나는 무슨 동상인 줄.”
“헐…….”
최연하가 손을 뻗어 꼰 다리를 들어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허벅지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이, 이상하네. 왜 이걸 몰랐지? 나 멀쩡한데.”
“답도 없네, 진짜.”
한은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최연하가 뭔가 물기가 촉촉한 눈으로 한은솔을 보며 말했다.
“은솔아.”
“아악!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찔러 버리고 싶으니까!”
“개새끼…….”
최연하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스크린에서 본다면 뭇 남성들의 가슴을 해머로 내려칠 만한 광경을 바로 앞에서 보는데 감상이 그거냐? 감상이 그거야?
친동생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이 새끼야!
“야, 은솔아.”
“네.”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이 쿨하지를 못할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충무로의 얼음 마녀…… 아니, 얼음 여왕, 인간 싸가지 최연하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 내가 언젠가는 진짜 죽일 거야.”
“그전에 좀 짤라주시면 안 될까요?”
“너, 내 옆에 계속 붙어 있겠다고 했잖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인생은 안빈낙도라는 걸 최근에야 좀 알게 됐거든요. 명성이고 돈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스트레스 없이 살고 싶어요.”
“어린놈이 꿈을 꿨꾸나?”
“……그래서 뭐가 문젠데요?”
한은솔이 화제를 강제로 원래대로 되돌렸다.
“사람이 좀 쿨해 보이려면 언행일치가 되어야 하잖아?”
“보통 그건 쿨해 보인다기보다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하긴 뭐,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이 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래서요?”
“그런데 나는 왜 그게 안 될까? 요즘 그게 참 안 되는 것 같단 말이야.”
“……누나, 원래 안 됐어요.”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지?”
“사람이 진실을 시비로 받아들일 때쯤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말자.”
한은솔이 피식 웃었다.
‘잘하고 있구만.’
최연하는 자신의 상태에 불만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한은솔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와 최연하가 농담을 주고받는 게 그 증거였다.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한은솔이 그녀에게 농담을 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을 각오가 아니고서야.’
그녀 스스로는 크게 자각하고 있지 못한 듯하지만, 최근의 최연하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해졌다. 긍정적인 변화다.
사람이 살아가면면서 칼날 같은 부분이 필요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호구라 불리면서 여기저기에 이용만 당하는 법이다.
문제는 최연하는 언제나 칼날 같았다는 점이다.
강진호와 만나고 나서야 최연하는 항상 날이 서 있던 발톱을 감추는 법을 알게 되었다. 본인 스스로는 그게 다 강진호를 속여 먹기 위한 연기라고 하지만, 일상에서 연기가 지속되는 걸 사람들은 성격이 유해졌다고 부른다. 물론 본인은 자각이 없는 듯하지만.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왜요? 강진호 씨 때문에요?”
“응.”
그럼 그렇지.
최근 최연하의 모든 문제는 강진호에게서 출발하고, 강진호에게서 끝난다.
‘로맨스도 정도껏 해야 로맨스지.’
눈꼴셔서 못 봐주겠네.
그리 좋으면 진도라도 팍팍 나가든가. 옆에서 보는 사람 감질나게 이게 뭐 하는 짓거린가.
한은솔의 속에서 천불이 났다.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생각해 봐도 이 두 사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요즘 초등학생들도 이렇게 연애는 안 하겠다.
“뭐가 문젠데요?”
“일이 있어서 오늘 가야 한대.”
“그런데요?”
“쿨하게 잘 가라고 해줬는데, 돌아서서 나오니까 짜증 나.”
“…….”
“좀 더 있다가 가도 되잖아. 내가 이렇게 오지에서 고생하는데.”
“아니, 누나…….”
“알아, 인마.”
최연하가 입을 빼쭉 내밀었다.
“이 오지에 불러놓고 제대로 시간도 같이 못 보낸 게 나고, 겨우 휴가 받아놓고도 감독 전화 한 통에 일정 다 취소하고 촬영장으로 날아온 것도 나고, 강진호 씨는 나름 여기에서 시간을 많이 썼고, 그 사람도 나랑만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나름의 일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 다 알아.”
“……거, 그렇게 잘 아시면서 뭐가 문젭니까?”
“은솔아, 나는 그렇다?”
“뭐가요.”
“머리로는 다 아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누나, 그걸 성격이 더럽다고 하는 거예요.”
“시끄러, 인마. 누가 그걸 몰라?”
최연하가 역정을 내자 한은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답이 없네, 진짜.’
고래로부터 누군가 답이 없으면 그 답을 찾아줘야 하는 것이 주변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웬만하면 이들의 연애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한은솔이다.
‘내가 큐피드까지 해야겠냐고.’
안 그래도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데 잘되라고 조언까지 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개짓거리란 말인가.
하지만…….
냉정하게 머릿속에서 이들의 연애에 조언을 하며 얻어야 할 고통과 이 상태의 최연하를 끌고 다니며 겪어야 할 지옥을 저울질해 본 한은솔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 속 썩고 말자.’
아마 이대로 강진호를 보내게 된다면 최연하는 후유증으로 한 달은 넋이 나가 있을 것이다. 그 부작용이 우울감이나 의욕 저하 등으로 발현된다면 괜찮지만. 히스테리로 발현될 경우에는 그뿐 아니라 같은 촬영장을 사용하는 모두가 지옥을 겪을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그녀를 견제할 수 있던 류웨이가 나가리가 되고, 감독마저 이상하게 꼬리를 말아버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가 나서야한다.
“누나.”
“응?”
“쿨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요.”
“응.”
“사람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그걸 다 할 수는 없잖아요. 머리로 생각하는 옳음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으면 여기가 천국이지. 천국이 따로 있겠어요?”
“그래서 뭐?”
“그래서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나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 이게 관계가 확실히 정립이 안 돼서 그러는 것 같아요.”
“정립?”
“네.”
한은솔이 결정타를 날렸다.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사람이 눈에 안 보이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는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싶으니 어느 여자가 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거 아닐까요?”
“사, 사귀는 거 아냐?”
“네?”
“뽀, 뽀뽀도 했는데?”
한은솔의 눈이 냉정해졌다.
쓰레기를 보는 눈이 된 한은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초등학생도 요즘 그렇게는 안 살아요, 누나. 정신 차려요.”
최연하의 몸이 살짝 떨렸다.
불안감의 근원을 알게 된 최연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할까? 덮칠까?”
“…….”
한은솔은 중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이곳이 중국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