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89
#688.
탐색하다 (3)
거사가 치러졌다.
한은솔은 그리 생각했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지만, 그 일이 오늘 마침내 터지고 만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위성은 충분하다.
원래 남녀 관계에서 역사적인 일은 외지에서 잘 벌어진다. 한반도의 조상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와 배가 끊기는 섬으로 돌진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함께 여행을 간다는 건 암묵의 동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함께 떠나온 여행은 아니지만, 이 머나먼 타국까지 한 사람을 만나러 온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에 처한 것이 최연하와 강진호가 아닌 다른 남녀였다면 이리 길게 끌지도 않았다.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었겠지.
하지만 이 둘은 대한민국을 탈탈 털어보아도 도무지 비슷한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전설의 연애 고자들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답답해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겨우 한발을 내디뎠다.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참 역사적인 일이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한은솔은 최연하를 칭찬하고 싶었다. 그녀는 한은솔의 지시대로 강진호의 복부에 제대로 된 돌직구를 묵직하게 꽂아 넣었다. 아마 지금쯤 강진호는 그 돌직구의 묵직한 구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 있을 것이다.
타자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때로는 변화구가 필요하고, 때로는 볼도 던질 줄 알아야 하지만, 때때로 이런 식으로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 직구가 필요했다.
최연하라는 투수는 한은솔이라는 감독의 지시를 완벽하게 이행했다.
조금 아쉬운 면은 있지만, 지금의 최연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고 한은솔은 확신했다.
하지만 최연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으아아아아! 쪽팔려어어어어어!”
자신의 구위를 넘어서는 최고의 공을 던지고 어깨가 아작 나버린 최연하가 포효하고 있었다.
“은솔아! 은솔아!”
“……누나, 도라에몽 찾듯이 그리 찾지 말아주세요.”
“왜 내가 그따위로 말했을까?”
“…….”
“좀 더 엘레강스하게! 기품 있게! 있어 보이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찍은 드라마에 나왔던 장면을 차용할 걸 그랬어! 그랬으면 엄청 있어 보였을 텐데.”
“누나, 그건 드라마예요.”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다. 드라마에서는 멋지게 보이는 장면을 현실로 끌고 오면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둘 다 닭살이 돋아서 종족이 바뀔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그랬으면 좀 더 멋졌을 텐데! 아아악!”
‘안 되겠어, 이 여자.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한은솔이 최연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롤을 준 모양이었다. 과부하가 걸려 버렸다.
“누나, 진정 좀 해요. 강진호 씨가 싫다고 한 것도 아닌데.”
“싫어?”
실수다.
한은솔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버렸다. 아주 얇은 피막으로 버티고 있던 최연하의 멘탈에 못을 꽂고 망치를 내려쳐 버린 것이다.
“그, 그러네?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건 생각도 못했네?”
“누나, 그럴 일은…….”
“야! 싫다 그러면 어떻게 해? 이제 얼굴도 못 볼 텐데! 다 너 때문이야!”
와, 이게 이렇게 꺾여서 돌아오네?
카를로스가 찬 프리킥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예술적인 각도로 꺾여 돌아온다는 말인가.
“아니, 그게 왜 제 탓이에요.”
“니가 하라고 해서 한 거잖아! 니가 옆구리 안 찔렀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와, 이 누나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조언을 해줘도 이러면 무슨 말이나 하겠어요?”
“이, 이제 어떻게 하지?”
분노와 좌절을 넘어 이제 절망까지 가버린 최연하를 보며 한은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누나.”
“응?”
“진정하고 할 일이나 해요.”
“…….”
“진인사대천명. 누나는 최선을 다 했어요. 이제 하늘…… 아니, 강진호 씨에게 턴을 넘기고 그냥 편안히 지내면 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내 장담하는데…….”
한은솔이 씨익 웃었다.
“아마 그쪽은 이쪽 이상으로 멘탈이 터졌을 테니까. 이건 우리가 이긴 게임이에요.”
한은솔의 호언장담에 최연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그런 걸 이겨서 뭐하는데?”
“…….”
“너, 바보야?”
“…….”
한은솔은 새삼 깨달았다.
조언 같은 건 절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썩을.
* * *
사소한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장다징도 마찬가지였다.
오해는 금물이다.
한은솔과 다르게 장다징은 강진호의 연애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주모(主母)가 누가 되느냐, 라는 매우 중요한 사안에 얽혀 있는 바토르와 다르게, 강진호를 끝까지 모실 생각이 없는 장다징에게 최연하의 일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먼 미래의 문제일 뿐이었다.
강진호가 넋이 나가 있든, 바토르가 그걸 보며 낄낄대든, 장다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저…….”
장다징은 깊은 고민 끝에 말을 꺼냈다.
“저놈들 계속 데리고 다니실 겁니까?”
“문제로군.”
용기를 내 한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바토르뿐이었다.
뭐, 기대도 안 했다. 강진호는 출발할 때부터 영혼을 다른 곳에 두고 온 듯했으니까.
장다징의 생각으로는 지금 강진호와 대화를 나눈다는 건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바토르는 충심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강진호가 그래도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라 판단한 건지 그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저놈들을 언제까지 데리고 다닐 셈이지, 주인?”
“저놈들?”
“차에 있는 놈들 말이다. 그 중국 놈들.”
“중국 놈들?”
“다바오와 궈리친이라고 했나? 그놈들을 굳이 이리 끌고 다녀야 할 필요가 있나?”
“다바오와 궈리친…….”
“그래. 내 생각에는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정리라…….”
장다징이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뭐, 이런 대화가 다 있지?’
저건 녹음긴가? 그냥 말을 하면 적당히 녹음해서 다시 들려주는 새로 나온 어플이라도 되나?
무슨 말을 하든 영혼 없는 답변을 내뱉는 강진호도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묻는 바토르도 대단했다. 저 정도면 충성심의 상징으로 동상 하나는 세워줘야 한다.
아무리 세뇌를 당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사람의 인격이 변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그동안 주인으로 모실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바토르는 이미 홍왕과 대면하여 그와의 승부에서 패배했으니까. 아무리 강진호가 나름 강하다지만, 홍왕과 비교할 수는 없다.
홍왕은 강하다.
중국을 지배하는 삼왕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 삼왕들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강함이라는 무형의 가치는 그 잣대가 있어야 비로소 측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삼왕의 강함은 같은 삼왕이 아니고서는 잴 수 없다. 그들의 강함을 잴 수 있는 잣대조차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 수많은 무인들이 있지만, 삼왕은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강진호는 강하다.
장다징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한다. 강진호는 그가 직접 본 이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토르의 말대로라면 강진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결코 홍왕에게는 닿을 수 없다, 절대로.
홍왕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윗대가리라면 일단 뒤에서 쑤시고 봐야 한다는 마인으로 중무장한 이들이 중국의 무인들이다.
그런 이들도 홍왕을 한 번이라도 알현한 후에는 더없는 충심을 발휘해 버린다. 결코 자신은 닿을 수 없는 무학의 극을 보았으니 어찌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홍왕을 강진호가 상대한다고?
무리, 절대 무리다.
적어도 이십 년은 지나야…….
‘어?’
장다징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지금 이십 년쯤 지나면 이자가 홍왕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이 멍청이가?’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밖을 보는 강진호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의 머리를 후려쳐 버리고 싶은 장다징이었다.
‘이십 년이 아니라 이백 년이 지나도 무리다.’
절대 강진호는 홍왕을 상대할 수 없다. 절대로. 그리고 설사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이곳에서는 아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으면 일단 밥이나 먹지.”
“그럴까?”
두 사람이 태연히 젓가락을 들자 장다징이 가슴을 쳤다.
‘그러니까, 무슨 태평함이냐고!’
생각해 보면 홍왕계가 언제 그들을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나름 신분도 숨기고 조심히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중국. 홍왕계의 배 속이다.
특히나 강남은 홍왕계의 땅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홍왕계에서 그들이 중국에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산목숨이 아닐 게 빤했다. 그런 와중에 태연하게 밥을 퍼먹고 있다니.
‘진짜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물론 이 식당을 찾아낸 것은 장다징이다. 이동하는 와중에 배가 고프다고 식당을 찾으라는 말을 한 사람은 바토르였지만.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장다징이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하지만 이곳이 홍왕의 영역이라는 긴장감을 가지고 식사를 해주길 바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요구란 말인가.
“너는 안 먹나?”
“……먹습니다.”
장다징도 힘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먹자. 먹어야 버틴다.’
강진호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듯하지만, 어딜 가든 마찬가지다. 일단은 사천을 벗어나기로 했으니까. 만약 강북으로 향하게 된다면 차로 쉴 새 없이 달려도 하루는 꼬박 걸린다.
그나마 장다징은 나름 무인이라 쉬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성도에서 북경으로 차를 몰고 간다면, 순수 운전 시간만 스무 시간을 채워야 한다.
그러니 미리 잘 먹어둬야 한다.
“그런데 그 류웨이인가 하는 놈은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되나?”
“상관없다. 벗어나지 못할 테니.”
바토르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은 참 이상한 것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군. 주인의 성격으로 보면 그런 사공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말이야.”
“필요했으니까.”
“맞는 말이군.”
대화를 나누던 바토르가 젓가락을 탁자 위에 올렸다.
“밥맛 떨어지는군.”
강진호도 젓가락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응?’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하던 장다징이 고개를 들었다.
“어?”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식당에는 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주문을 받은 종업원도, 구석진 자리에서 밥을 먹던 이들도 다들 식당을 빠져나간 듯했다.
어째서?
“흐음.”
바토르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찾아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군. 설마 사천을 벗어나기 전에 올 줄이야.”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했으니까.”
“그럼 우리가 저놈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여기까지 빠져나오길 기다린 건가? 중국 놈들이 예전보다 꽤 섬세해졌는데? 내가 한창 활동할 때는 그런 걸 가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배려 덕분에 편하게 설칠 수 있게 됐군.”
“동감이야.”
영문을 모르는 장다징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식당 문이 열리더니 누가 봐도 무인인 이들이 양손에 병장기를 들고 식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장다징이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홍왕이 직접 오거나 홍왕계의 직속들이 움직인다면 몰라도, 이런 삼류 무인들이야 천이 오든, 만이 오든 그들을 감당할 리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위엄을…….
“장다징.”
“……예?”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있어라. 다친다.”
“…….”
장다징이 조용히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머리를 감쌌다.
어쩐지 조금 슬퍼진 장다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