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90
#689.
탐색하다 (4)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에 가깝다.
긍정적인 면으로든, 부정적인 면으로든 인간의 상상력은 언제나 현실을 앞서기 마련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제약이 상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생각해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반대로 한 번쯤은 자신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도 상상해 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다바오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그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몇 번이고 그려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어둠 속에서는 그도 다른 이들을 노리기 쉽지만, 다른 이들도 그를 노리기 쉬워진다.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가는 인생이란 결국에는 타인의 칼날에 쓰러지는 걸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가 상상하는 최악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조직에 배신당해 죽든가.
목표물에게 역으로 당해 죽든가.
때로는 동료에게 당할 때도 있고, 때로는 운도 없이 절대의 고수와 마주쳐 이유 없이 죽어 나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다바오가 몸을 뒤틀었다. 좁은 좌석에만 몇 시간째 앉아 있다 보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알고 있다.
기분 탓이라는 것쯤은.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좌석은 그가 지금까지 타본 차 중 가장 안락하고 넓은 편이었으니까. 좌석이 좁아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니다.
그를 압박하고 있는 건, 좌석이 아니라 강진호였다.
다바오가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최악은 언제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최악은 그의 상상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어쩌면 원한을 산 이들의 손에 사로잡혀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 적에게 사로잡혀 이리 개처럼 끌려 다니는 모습은 없었다.
다바오를 더욱 굴욕스럽게 만드는 것은, 저 마귀 같은 놈이 그에게 어떠한 금제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이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내공이 묶인 것도 아니다.
그저 차 안에 내버려 뒀을 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래. 마음만 먹는다면 이딴 종잇장 같은 철로 만들어진 차 따위 손으로 찢어버리고 탈출할 수도 있다. 굳이 그런 과정도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 차의 문은 닫혀 있지 않으니까. 설사 닫혀 있다고 해도 그는 차 안에 있다. 뭔 강아지도 아니고, 차 문 하나 열지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다바오는 움직이지 못했다.
짓눌려 있다.
짐승을 우리에 가둬두고 우리를 벗어나려 할 때마다 폭력을 가하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몇 번 지나지 않아 짐승은 우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우리를 없애 버려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된다.
무기력과 공포를 학습하는 것이다.
지금 다바오의 처지가 그랬다.
누구도 그를 막지 않는다는 걸 다바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차를 그의 의지로 벗어나는 순간, 강진호가 그를 어떻게 할지 두려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머리로는 벌써 수천 번을 도망쳤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니까. 재빠른 동작으로 문을 연 다음, 최대한의 속도로 이곳에서 멀어지면 된다. 물론 강진호는 눈치챌 것이다. 이만한 거리에서 그의 감각을 속인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강진호가 굳이 그를 잡으려 할까?
강진호에게 있어 그가 과연 그만큼의 수고를 무릅쓰고 잡아두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일까?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사실은 달아난다는 것은 모험이고, 그 모험이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대가를 받게 된다는 점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이의 존재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바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자리에는 궈리친이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다바오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궈리친.
희게 변해 버린 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을 보고 있자니, 절로 이가 앙다물어졌다.
그는 궈리친에게 호감이 없는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호감보다는 악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궈리친의 상태를 보고 담담할 수 없었다. 다음 차례는 그 자신일지도 모르니까.
“이봐.”
다바오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궈리친에게 말을 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확하게는 강진호에게 사로잡힌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궈리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 정신도 없었다. 그가 처한 현실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여유가 조금 생긴 건지, 아니면 자포자기한 건지 모르겠다.
“이봐, 궈리친.”
“…….”
“너 어쩔 셈이지?”
궈리친의 고개가 천천히 그에게로 돌아왔다.
‘반응은 있군.’
거의 식물 수준으로 퇴화해 버린 게 아닐까 했지만, 자극에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궈리친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다바오가 흠칫했다.
그의 눈.
텅 비어버린 그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아무것도.”
다바오가 흠칫한다.
‘뭐야, 이 새끼?’
생각 이상으로 선명한 목소리다. 다 죽어가는 신음을 내거나, 죽여 달라고 빌 줄 알았는데…….
‘연기였나?’
그럴 리는 없다.
그건 연기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어떤 대배우라도 그런 모습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럼 회복한 건가?
“너 정신이 있냐?”
“정신은 항상 있었다. 병신 같은 너와는 다르게 말이야.”
“이 새끼가…….”
다바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개처럼 빌면서 죽여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죽여줄까?”
“그것 역시 사실이지. 그리고 거짓이야. 내가 그분께 개처럼 빈 건 사실이지만, 너는 나를 죽일 능력이 없다. 지금처럼 쇠약해진 나조차 죽이지 못할 만큼 너는 무력하지.”
다바오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이놈? 멀쩡하잖아?’
평소의 궈리친이다.
예전에 몇 번 말을 섞었을 때, 궈리친의 말투가 딱 이랬다. 말끝마다 빈정거림이 묻어 나왔다, 그때도.
당시 다바오가 열이 받아 궈리친에게 달려들려 했으니 틀림없다.
“너, 정신이 있었으면서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도망?”
궈리친이 비웃음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빛이 움직이지 않는 비웃음은 보는 이에게 기이한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잘도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군. 확실히 쓸모가 없어.”
“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
“네가 도망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네 몸은 바닥에 처박히게 될 거다. 그리고 벌레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하겠지.”
“그럼 뭘 어쩌자는 거냐?”
“아무것도.”
“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의 처우를 결정할 때까지. 우리는 그저 기다리면 되는 거다. 그 조악한 머리를 굴리려고 하지 마라. 우리는 그분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존재이니까. 염왕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죄를 낱낱이 까발리고 선고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간 취급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바오는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 새끼, 미쳤어.’
아니.
어쩌면 가장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미 다바오도 여러 번 겪어본 일이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 노출된 인간은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저항한다. 정확하게는 저항을 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그 힘에 결코 대항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인간은 힘을 숭배한다.
문명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숭배했다. 그 대상이 때로는 불이었고, 때로는 하늘이었고…… 심지어 짐승마저 숭배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마주한 인간은 그 존재를 숭배하는 것으로 자신과 힘을 일원화시킨다.
그러니 궈리친이 강진호를 숭배하게 되었다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강진호는 막아낼 수 없는 자연재해고,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니까.
그럼에도 비웃을 수가 없다.
다바오 역시 강진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오니까. 강진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몸이 자유로워도 도망치지 못하는 다바오가 궈리친을 비웃을 수 있는가.
다바오 역시 궈리친만큼 강진호에게 당했다면 지금 궈리친과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다바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궈리친의 소식을 들었을 때, 공명심을 버렸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을…….
쾅! 쾅!
그때, 문 쪽에서 강렬한 소리가 났다.
다바오가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차창 밖으로 몇몇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음?’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다바오가 눈을 크게 떴다.
쾅쾅쾅!
차 안을 들여다보고 다바오와 궈리친의 존재를 확인한 이들이 문을 마구 두드렸다. 이대로 둔다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다.
‘제길.’
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다바오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가 움직이는 이유가 저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인지, 그게 아니면 차의 문이 부서지면 강진호가 화를 낼까 두려워서인지는 다바오도 알 수 없었다.
드르르륵.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병신 같은 놈들, 여기 잡혀 있었네.”
“그래도 살아 있으니 다행이지. 목숨 한 번 건졌다고 생각해라.”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가볍기 짝이 없는 분위기다.
다바오는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너희…….”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일그러진 얼굴을 억지로 편 다바오가 입을 열었다.
“너희만 온 거냐?”
눈앞에 보이는 이들은 그의 조직원들이었다. 사천으로 소집된 이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너희가 그리 병신같이 당했는데 우리끼리만 왔겠냐? 전부 다 왔다. 이제 곧 그 개새끼를 잡아 족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저 안에 있는 놈, 궈리친이냐?”
“…….”
다바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원은?”
“응?”
“……지원은 없냐고. 너희끼리만 왔냐, 이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천에 모인 놈들 다 왔다니까.”
다바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원이 없다고?’
궈리친과 그가 잡혀 있다는 걸 알면서?
절벽 아래로 던져진 놈들이 강진호가 어떤 놈인지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부상 때문에? 아니면…….
“……쳐라.”
“뭐? 크게 말해봐, 잘 안 들려.”
다바오가 짜증과 분노를 한껏 담아 소리쳤다.
“도망치라고,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당장!”
동료들을 생각하는 다바오의 마음은 갸륵했지만, 안타깝게도 조금 늦은 면이 있었다.
콰아앙!
강진호와 바토르가 들어가 있는 식당 안에서 커다란 폭음이 울린다 싶더니, 건물 외벽을 뚫고 사람의 몸이 밖으로 튕겨 나온다.
“끄으으윽.”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경련한다.
갑자기 싸해져 버린 분위기에 차 앞에 몰려 있던 이들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뭐야, 저거.”
얼이 빠진 그들의 반응을 보며 다바오가 한숨을 쉬었다.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아버린 다바오가 원래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귓가로 들려오는 나직한 궈리친의 웃음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