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96
#695.
집결하다 (5)
“마존이시여, 이 죄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사극 톤으로 말하지 마라.”
“저는 차마 저의 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하지 말라니까.”
주강은 강진호의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땅에 박은 그를 보며 강진호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내 잘못도 있으니까, 그만하자.”
“마존이시여!”
“하지 말라고!”
강진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놈들은 왜 하나같이 사극을 찍는 건가. 마존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놈들은 하나같이 망국의 충신이 되어서 절절히 소리를 질러 댄다.
누가 보면 외적이라도 쳐들어오는 줄 알겠다.
“이거 안 되겠습니다, 회주님.”
“음…….”
보닛을 내린 장다징이 머리를 내저었다. 닫힌 보닛 사이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렇군.”
강진호가 조금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전문가를 어디서 부르냐고.’
국도 한가운데서 차가 멈춰 섰다. 딱히 사고가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북경에 도착하기 위해 차를 혹사시킨 대가를 받았을 뿐이다.
“장다징.”
바토르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좋은 차로 렌트를 하지그랬나.”
“바토르 님, 이만한 밴은 구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이곳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흐음…….”
바토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승용차면 몰라도 밴을 렌트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이 한 대라도 구해온 게 용하다. 그 사실을 감안해 차를 상전 모시듯 했어야 하는데, 생각 없이 액셀을 밟은 게 문제였다.
“그럼 어쩌지?”
“서비스는 지금 안 된답니다. 아침까지 기다리랍니다.”
“아침?”
“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점심 먹고 오겠죠. 항상 그랬듯이요.”
“끄응.”
바토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중국의 첨단산업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서비스업만큼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긴급 출동 서비스 같은 것들은 더하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은 중국이다 보니 찾아오는 것도 일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 모든 점을 감안하고서도 서비스의 품질이 낮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여기서 아침까지 죽쳐야 한다는 거군. 아니,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라고 했나?”
바토르는 그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진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 차라리 뛰어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흠?”
“짐이야 대충 짊어지면 되지.”
“장다징이 거기까지 뛰어갈 수 있을까?”
“정 안 되면 내가 어깨에 걸치고 가겠다.”
장다징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왜?”
“전 못합니다!”
장다징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성인 남자로서 다른 남자의 어깨에 걸쳐져서 운반된다는 건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부상자도 아닌데 말이다.
“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강진호가 주변을 살폈다.
불빛도 잘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이런 일은 흔하다. 사는 사람도 많지만, 워낙 땅이 넓다 보니 도심가를 벗어나면 완전한 숲이나 초원이 나오기도 했다.
“민가가 있을까?”
“찾아보면 한둘쯤은 나오지 않겠습니까?”
장다징의 말에 고민하던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민가를 찾는 건 그만두자.”
“어째서입니까?”
“찾는다 하더라도 이놈을 데리고 들어갈 자신이 없다.”
“……이해했습니다.”
바토르의 거대한 육체를 본 장다징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바토르를 본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차라리 도깨비가 찾아오는 게 낫다.
아무리 좋게 설명한다고 해도 외진 곳에서 바토르를 만난 이들은 팔 하나쯤 떼어내 먹으라고 주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바토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주인! 내가 좋은 생각을 해냈다.”
“응?”
“히치하이킹을 하자.”
“네가 탈 수 있는 차가 지나갈 리가 없잖아.”
“후후후, 어리석은. 주인은 가끔 한 번씩 생각을 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여기에는 내가 탈 차가 널리고 널렸지.”
강진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승용차일 필요는 없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밴에 탄 것일 뿐, 바토르가 타기에는 차라리 트럭 짐칸이 나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은 심야가 아닌가. 해가 밝기 전에 북경에 도착할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의 눈도 그리 의식할 필요가 없다.
“똑똑하군.”
“후후, 주인도 생각보다 빠르게 눈치챘군. 훌륭하다.”
서로를 칭찬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장다징이 입을 열었다.
“저, 이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만…….”
“응?”
“왜?”
장다징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여기, 30분 전부터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는데요?”
“…….”
깊은 절망이 내려앉았다.
‘컵라면 하나만 먹었으면 좋겠다.’
뭔가 춥다.
이제 가을이 왔다지만, 나름 무인인 장다징이 이런 날씨에 추위를 느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건 몸의 추위가 아니라 마음의 추위일 것이다.
이만한 사람들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노숙이라니.
물론 노숙이라 지칭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여차하면 캠핑카로도 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차가 있으니까. 차가 퍼져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벽하지 않은가.
“나, 이런 말은 안 하고 싶은데…….”
바토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거, 나름 운치 있지 않나?”
“…….”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는 바토르의 말에 장다징이 움찔 했다.
“바토르 님은 이런 경험이 많으실 것 아닙니까?”
“으음,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바토르 님은 초원의 전사이시니까요. 너른 초원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근사한 경험을 언제나 할 수 있으시잖습니까.”
“그래.”
“그건 어떤 기분입니까?”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바토르가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초원은 밤이 일찍 찾아오지. 해가 지면 보통 파오에 들어가 잠을 청하지만, 늦은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모두가 바토르의 말에 집중했다.
그들은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런 날은 파오에서 나와 초원으로 나간다. 드넓은 초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들이 보인다. 매번 볼 때마다 하늘에 별이 이렇게나 많았나 생각하게 되지.”
“아!”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장다징이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심정은 어떠십니까?”
“음,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예.”
흥분한 장다징을 보며 바토르가 피식 웃었다.
“춥다.”
“……예?”
“냄새나고.”
“…….”
“벌레도 끓지. 아우, 생각만 해도 싫다.”
“…….”
장다징의 환상이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흩어졌다.
“보통은 좀 낭만적인 대사가 나올 시점 아닙니까?”
“낭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바토르가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너희 같은 놈들이야 TV로만 보거나 상상만 하니 그 광경이 아름다운 거지, 막상 거기 사는 사람들이 그게 좋을 것 같나? 울란바토르만 가봐라. 아파트가 끝이 없다. 파오가 그리 좋으면 다 파오에 들어가 살지, 미쳤다고 가진 양 다 팔아서 아파트 들어가겠냐?”
“…….”
바토르의 팩폭은 끝이 없었다.
“몽골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하지 마라. 말린 소대가리로 얻어맞는다.”
“그래도 바토르 님은 무인이라 나름 지낼 만할 것 아닙니까?”
“웃기고 있네.”
“아닙니까?”
“무인이라 좋은 점도 있지. 일단 추위는 덜 타니까. 초원의 밤은 살인적이야. 보통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지.”
바토르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쁜 점은 더 많다. 일차적으로 무인은 오감이 일반인 보다 예민하기 때문에 지옥 같은 냄새에 시달린다.”
“아…….”
“가축의 분뇨부터 시작해서, 물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보름 정도 씻지 않고 돌아다니는 건 예삿일이다. 사람의 냄새도 괴롭지. 게다가 초원에 벌레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내가 동물과 사람은 쫓아낼 수 있는데, 벌레는……. 으…….”
“기운으로 날려 버리면 되잖습니까.”
“내가 선풍기도 아니고, 24시간 내내 기운을 뿜어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초원에 살겠다고 그 짓 할 바에야 아파트에 살면 된다니까.”
장다징이 매우 억울한 얼굴을 했다.
“바토르 님은 왜 로망이 없으십니까! 로망이!”
“내가 너를 초원에다 던져 놓고 한 달만 살게 하면 네 입에서 로망이란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다, 이 멍청한 놈아.”
강진호가 바토르의 말을 듣고는 간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렇지.’
초원의 삶이라는 게 TV에서 볼 때야 운치 있어 보이지만, 사실 몇 백 년 전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삶의 패턴이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끔찍했지.’
강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인의 반응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는 모양이군.”
“흠.”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정말 싫은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위생 관념이었지.”
“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한 달씩 목욕을 안 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한 달?”
장다징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사람이 한 달씩 목욕을 안 할 수 있습니까?”
“가능해.”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이상하지 않아지지. 개중에는 일 년에 두 번 목욕하는 이들도 많았어. 중양절과 신년, 딱 두 번 목욕을 하더군.”
“세상에!”
“그리고 하나 알아둬야 하는 건…… 지금의 개념으로 한 달을 생각하면 안 돼.”
“왜죠?”
“환경이 다르니까. 현대는 거리가 깨끗하고 먼지도 적지. 게다가 옷도 세탁이 되잖아. 그런데 그때는…….”
강진호가 진저리를 쳤다.
“옷도 한 달에 한 번 빨아 입던 시대인데다가 온갖 곳에 가축의 배설물이 굴러다니던 시절이지. 하루만 밖을 돌아다녀도 전신이 버석버석해진다. 그걸 그냥 대충 문질러 닦지. 아니, 닦기나 하면 양반이지.”
장다징이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어마어마하네요.”
장다징은 중국인이다. 그 스스로 위생 관념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몇 년을 살다 보니 중국인들이 위생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청결에 대한 개념이 그리 차이 나지 않는 현대인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멀쩡한 현대인이 그런 시대에 떨어지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으, 나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건 나았어.”
“네?”
“진짜 위생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건 씻는 게 아니니까.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런데…… 먹는 건 피할 수가 없어, 먹는 건.”
강진호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세상 무엇도 그를 억압할 수 없지만, 그 기억들은 지금도 그에게 트라우마로 박혀서 고통을 주고 있었다.
“그…… 으, 내가 처음 내가 먹던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봤을 때의 그…… 으으…….”
“그, 그만해 주십시오, 그만!”
상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떠올린 장다징이 입을 부여잡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게다가…….”
강진호는 신이 난 듯 썰을 풀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