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00
#699.
보여주다 (4)
“진작에 이랬으면 좀 좋냐고.”
“……누나는 왜 그렇게 매사에 불만이 많아요.”
“쯧. 또 멍청한 소리한다.”
“멍청한 소리요?”
최연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한은솔을 바라보았다.
“매사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 성공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논리래요.”
“생각해 봐. 바보야. 지금 당장 사는데 별 불만이 없는 사람이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겠냐? 왜? 지금이 괜찮은데 뭐 하러 고생해 가며 노력을 해. 그냥 살지.”
“헐…….”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들 불만이 많아. 남들 평생 써도 못 쓸 재산을 모아놓고도 돈 더 벌어오라고 아랫사람 구박하는 회장들이 얼마나 많냐. 그런 양반들만 회장인 게 아니라, 그런 양반들이니까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거야.”
“회장이라도 되시려구요?”
“아니. 탑 배우.”
최연하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내가 세상에 불만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내가 성공가도를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지. 이걸 하나하나 바꾸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게 마음에 드는 삶에 도달하지 않겠어?”
“장담하건데 그런 날은 안 와요. 누나.”
“이게 죽으려고.”
최연하가 버럭질을 시작하자 한은솔이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간만에 촬영장 잘 돌아가고 있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으세요.”
“진작에 이랬으면 좀 좋아?”
“음.”
한은솔이 볼을 긁었다.
말은 맞는 말이다.
강진호가 출발한 이후로 지금까지 쉬지 못하는 촬영 강행군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한국의 촬영에 비하면 중국의 촬영이 훨씬 편해야 정상이다. 드라마 한 번 들어가면 실시간 촬영한답시고 쪽 대본이 남발되고, 영화를 하나 만들어도 성수기 개봉 일을 맞추겠답시고 지옥 같은 강행군을 하는 한국에 비해서 중국은 그런 부담이 덜하다.
아무리 빨리 찍는다고 해도 어차피 완성본으로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고, 그 사전검열이라는 게 제시간에 빨리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이 바빠서 힘든 게 아니었다. 그동안 최연하와 한은솔을 괴롭힌 건 정신적인 영역이었다.
자꾸만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발연기의 주연과 그들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자꾸 차별하려 드는 감독, 그리고 우호적이지 못한 스텝들과 낯선 환경까지.
처음에는 별것 아니었던 일들이 촬영이 길어지면서 누적되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손 쓸 도리가 없으니 그저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야 이 새끼야. 내가 니 연기 선생이야? 좀 알아서 할 수 없어?”
“그게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감독이 뭐하는 건데요! 감독은 작품 만드는 사람 아닙니까. 제가 연기를 못하면 감독님이 작품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잖아요. 연기를 제대로 잘 하도록 도움을 줘야죠.”
“야.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손끝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까지 내가 일일이 말을 해 줘야해?”
“모니터링 하시는 분이 감독님이니까 그렇잖아요. 아니면 앞에다가 대형 모니터 설치해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시던가요!”
한은솔이 감독과 류웨이의 피 터지는 설전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보면 열정 넘치는 촬영장인줄 알겠네.’
아니 사실 말은 맞다. 열정이 넘치기는 하니까. 그 의도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순수함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열정은 넘쳐난다.
류웨이는 마치 연기에 인생을 건 아마추어 배우처럼 굴었다. 아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아마추어 배우도 저처럼 간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정에 비해 나오는 결과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래도 이전에 류웨이가 보여주던 끔찍한 연기에 비하면 일취월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리고 감독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연기지도를 원하는 류웨이 때문에 최연하에게는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일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생긴 악감정이 풀려서 딱히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쪽에 관심을 주는 것보다는 무관심해 주는 게 심적으로는 편하다.
촬영장도 류웨이를 보조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약간 낙동강 오리알 같기는 하고.”
“그렇죠?”
관심을 줄 때는 영 껄끄럽더니, 막상 관심이 사라지자 조금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났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고 보면 정말 슈퍼맨이네.’
소속사와 한은솔이 최선을 다해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더 꼬여만 가던 상황을 강진호가 단번에 풀어버렸다. 그리고 한은솔은 아직도 강진호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어어 하고 강진호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인데 마법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능력치는 진짜 쩌네.”
“나?”
“누나 말구요! 강진호 씨요.”
“헤헤. 그렇지?”
“…….”
실수다.
최연하는 최근에는 자신을 칭찬하는 것보다 강진호를 칭찬하는 걸 더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충무로의 마녀 최연하가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강진호는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을 줄 알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이건 한은솔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할까.
무슨 행동을 하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사람을 흔들어놓는다고 할까? 일례로 강진호를 배웅하고 온 한은솔과 최연하는 촬영장으로 배송된 국제 택배를 받았다.
그 택배 안에는 한국에서 날라진 반조리 식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한한령 덕분에 검열이 강화되어 식품류나 반조리 식품은 반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덕분에 현지 식당을 찾아 음식을 공수해 봤지만 한국에서 먹던 맛이 날 리가 없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한식이래 봐야 라면이다.
그런데 사람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박스에 가득 찬 한식이라니.
보낸 사람의 연락처로 전화를 해보니 어이없게도 재경그룹으로 연결되었다. 그들도 택배가 왜 그들의 이름으로 배송된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빤한 일이지.’
그들과 관계가 있고 재경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이니까. 아마도 최연하가 마른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런 일을 태연하게 해버리고 일언반구 없이 떠난 사람이다.
한은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곳으로 가면서 최연하의 먹을 것을 챙기는 배려심에 감탄해야 하는지, 그들이 무슨 애를 써도 도무지 반입이 되지 않았던 한국 음식을 박스째로 반입해 버리는 그 능력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이 마음이 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참 해석하기 힘든 사람이다.
여자에게 면역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사람 마음을 흔들 줄 알았고,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다정다감하다.
‘상대가 안 돼.’
같은 남자로서 패배감을 느낄 만하지만 패배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비벼볼 만한 사람에게 느끼는 거지. 워낙 차원이 다르다 싶으니 그런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떨어지는 거나 받아먹자.’
마음속으로 충성 충성을 외치면서 한은솔이 고개를 돌렸다. 최연하가 소시지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것도 같이 온 거예요?”
“아니. 매니저 애들 먹는 거 뺐었는데?”
“……그 전에는 물도 잘 안 넘어 간다더니.”
“식욕이 돌아왔어. 아니 너무 과도하게 돌아왔어. 야 나 돼지 되면 어떻게 하지? 앞으로 찍어야 하는 씬이 병약 씬인데 살이 피둥피둥 찌면 어떻게 하지?”
“먹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마요! 먹으면서! 몇 개를 먹은 거야 이 누나!”
테이블에 쌓인 소시지 껍데기를 보며 한은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먹지 마?”
“……아니. 그건 아니구요. 먹어요. 누나는 지금 살 좀 쪄도 티도 안 나요.”
“그래?”
최연하가 반색하면서 소시지를 깨물었다.
‘여하튼 예쁘긴 예쁘다니까.’
표정이 살아나니 미모도 살아난다. 얼마 전까지는 미모야 확실하지만 인간미가 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얼굴이 밝아지니 미모가 더 빛나는 느낌이었다.
“진짜 다 해결해 놓고 갔네. 어이가 없다.”
한은솔이 허탈하게 웃자 최연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강진호 씨?”
“네.”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야기했잖아.”
“누나가 왜 그리 대책 없이 믿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누나면 좀 불안할 것 같은데.”
“왜?”
“그렇잖아요. 능력이 워낙 좋은 사람이니까. 저렇게 혼자 돌아다니다가 어디서 발목 잡히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
“왜요?”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
싸늘한 한기가 흘렀다.
“농담이야.”
“농담 아닌 것 같은데?”
“진짜 농담이야.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진호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왜요? 인기 엄청 있을 것 같은데.”
“일차적으로 그 사람이 잘난 건 아는데, 그만큼 잘나 버리면 들이대는 것도 부담스러워. 안 받아줄 것 뻔히 아는데 괜히 힘 뺄 필요 없거든.”
“아…….”
“그리고 들이댄다고 그 사람이 관심이나 가지겠냐?”
“아니죠.”
그 말은 백프로 동의했다.
심지어 최연하가 그렇게 들이 댔는데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강진호다. 지금 둘의 관계가 이렇게 진척 된 것은 말 그대로 최연하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그런 지속적인 노력에 노출될 일이 있겠는가. 최연하가 안심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너 예전에는 내가 아깝다고 했잖아.”
“그 때는 제가 강진호 씨를 잘 몰랐죠.”
“제대로 직업도 없는 사람은 만나면 안 된다며.”
“그 양반은 졸업하고 길에서 떡볶이를 팔아도 성공할 사람이에요.”
“하긴 피자집도 2호점 냈다고 놀러오라더라.”
“와. 강진호 씨가요?”
“아니. 강진호 씨 친구가. 공짜로 피자 줄 테니까 와서 사인회 좀 하고 가래.”
“……안 갈 거죠?”
“갈 건데?”
최연하가 태연하게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들리기로 했어. 아무래도 주변 공략을 확실히 해놔야지. 그래야 어디서 헛짓거리를 한다 싶으면 제보가 바로 들어올 거 아냐.”
“…….”
“거미줄을 쫙쫙 쳐놔야 해. 그래야 도망을 못가지. 히히힛.”
한은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자기 강진호가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강진호 씨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요?”
“글쎄. 어디 가는 줄을 모르니 언제 도착하는지도 모르겠네.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게 관심 없어도 되요?”
“관심 없어 보이니?”
“아뇨.”
“그런 거 일일이 꼬치꼬치 캐묻다보면 정 떨어지는 거야. 너는 왜 그렇게 연애를 모르니.”
“헐, 세상에.”
모태솔로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수치심에 자결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누나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 사람도 제 일은 자기가 하는 사람이야.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다정다감해서 어디서 트러블 만들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죠. 워낙에 성격이 좋으니까.”
두 사람이 강진호를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심각한 착각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