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29
#728.
이주하다 (3)
별생각 없이 쓰던 단어가 어느 날 새로이 다가오는 날이 있다.
누군가는 행복이라는 단어의 참뜻을 깨닫기도 하고, 누군가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알게 된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사람이 집에 돌아가 아무도 없는 차가운 집의 공기를 마주했을 때, 외로움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끼기도 한다.
이렇듯 인생은 언제나 새로운 발견과 함께한다.
때로는 즐거운 발견이 누군가의 곁에 머무르고, 때로는 서글픈 발견이 누군가를 힘겹게 만든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겠지만, 이러한 발견들이 사람의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이가 있었다.
이 사람은 딱히 새로운 발견이 흔치 않은 이였다.
단어 하나를 알게 되어도 그 단어에 대해 분석하고 어떤 상황에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감정과 연계되는지를 철저히 연구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단어의 뜻을 새롭게 체감한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내는 지금 그 드문 일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그가 새로이 발견하고 있는 단어는 ‘날벼락’이었다.
“그러니까…….”
수화기를 든 이현수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니겠지.’
잘못 들었겠지.
이현수는 자신이 들은 말을 격렬하게 부정했다.
언제나 다른 이의 말을 놓치지 않고 분석하는 그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현수는 자신의 청력을 평가절하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흔치 않게 말문도 막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초래한 이는 아주 태연하게, 너무도 태연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렵나?]“어렵냐구요? 어렵냐고 하셨습니까? 허허허…….”
이현수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린다.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회주님. 사람이 달에 가는 시대고, 저 깊은 심해로 탐사정을 보내는 시대가 아닙니까.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기는 특이점도 왔는데, 세상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그렇지가 아니지, 인마!
비꼰 거라고!
배배 꼰 거라는 말이다!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이현수는 울고 싶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상사가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양하게 엿같은 상사들이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면서 지원은 안 해주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네 능력과 열정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하는 거라고 지적질을 해 대는 놈?
사람에게 사생활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놈?
입만 열면 사람이 짜증 나는 말을 실시간으로 내뱉는 놈?
직장 생활을 헬 게이트로 만드는 상사는 그 유형도 다양하고. 난이도도 다양했다. 하지만 이현수는 이제 기나긴 고민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사는 어떤 유형인가.
‘이런 유형이지.’
전화기를 바라보는 이현수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세상에서 제일 사람을 고달프게 만드는 상사는 사람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처럼!
‘왜 이러냐고! 왜!’
강진호는 교묘한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시키는 일은 그냥 던지는 게 아니다. 다 이현수가 해낼 수 있는가를 감안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일만 시킨다.
문제는 그 계산이 사람이 밤잠 안 자고, 먹고 쉴 시간도 아껴가며 죽어라고 움직였을 때 겨우 해낼 수 있는 수준을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거다.
차라리!
차라리 지시를 들었을 때, ‘으아아아! 이건 죽어도 못합니다! 차라리 저를 자르십시오!’를 외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그냥 배를 째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든 가능하긴 하다.
그래서 더 슬픈 이현수였다.
“……가능하죠, 가능합니다. 세상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가능하죠.”
물론 가능하지.
생각보다 늘어난 지원자들을 옮기는 일도.
그 지원자보다 더 불어난 지원자의 가족들을 합법적으로 한국으로 이주시키는 일도.
국경을 넘어 밀입국한 지원자들이 편히 지낼 수 있는 숙소를 만드는 일도.
그 지원자들의 가족이 한국으로 도착했을 때,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일도.
그리고 그 지원자들의 월급을 주고, 가족들의 직장과 학교를 수배하는 일도!
‘가능하지! 세상에 불가능이 어딨냐! 가능하지! 빌어먹을!’
다 된다.
왜 안 되겠는가.
그걸 한 번에, 한 놈이 모두 처리하려면 인생을 갈아 넣는 수준이라는 게 문제지!
[조금 과한 지시라는 건 알고 있다. 미안하군.]허허허허.
미안하단다.
미안하시단다.
이현수는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그의 고생을 강진호가 알아주었다는 감동 때문에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강진호는 사람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일을 태연하게 시켜 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일을 이제는 당연히 맡아서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었다.
“대, 대체 왜 일이 여기까지 온 겁니까? 예상한 규모의 두 배가 넘는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하자면…….]“아, 아니요. 솔직하게 말씀 마십시오.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시라구요.”
[아직 신청이 끝난 게 아니라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일단 어제까지는 두 배였고, 지금도 신청자가 줄을 서 있는 것 같은데……. 확인해 볼까?]“……굳이 뭐 확인까지 하십니까. 뭐, 대충 그렇겠죠.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이현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어찌 된 거냐면…….]강진호가 말해주는 사정을 모두 들은 이현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했을까?]“솔직히 과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 과함을 통해서라도 전력을 불려야 할 땝니다.”
[동의한다.]“다만 회주님, 그렇게 빼온 이들이 저희가 바라는 만큼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일들은 의미 없는 낭비가 될 뿐입니다. 그만큼의 인원을 받아들인다면 총회도 부담이 생기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이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일이라면 이리 고민도 하지 않지.’
문제는 그들이 데리고 올 가족들이다. 총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을 지원할 만큼 총회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이중걸과 장로들이 은닉해 둔 비자금을 모조리 회수해서 돈이 넘쳐 나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막대한 부담을 피할 수 없었다.
“멀리 보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것만도 이득이다.]“……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현수는 강진호의 방향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멀리 본다?
총회가 그때까지 생존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전력으로 누군가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총회는 그저 강진호와 바토르, 그리고 위긴스의 무력에만 의지해야 한다. 소수의 몇몇이 있기에 유지되는 균형은 균형이라 부를 수 없다.
지금 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장기적으로 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총회는 그 독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현수의 얼굴이 굳었다.
‘판단력이 흐려졌어.’
지금 이현수는 강진호에게 한 명의 마인이라도 더 데리고 오라고 악다구니를 써야 할 상황이다. 그게 총회 전체로 보았을 때 가장 이로운 방향이니까. 그런데 격려는 하지 못할망정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의지할 사람이 생겼구나.’
이현수는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진단했다.
과거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현수는 강진호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총회의 일이 중요한 건 알지만, 그 총회를 강하게 만든다고 이현수 자신이 일에 치여 죽어가고 있으니 내 수고를 알아달라는 투정이다.
어리광을 부렸다는 생각에 이현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회주님.”
[말해.]“한국의 일은 제가 어떻게든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데리고 올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데리고 오십시오.”
[…….]“이국에서 회주님이 고생하시는데 지원은 제대로 못할망정 앓는 소리 해서 죄송합니다. 제 본뜻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너.]“예, 회주님!”
강진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진다.
그 순간, 이현수는 강렬한 죄책감을 느꼈다.
‘힘드시겠지.’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 가장 고생을 하고 있는 이는 이현수가 아니라 강진호였다. 아무리 그가 마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는 하나,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그 안에서 전력이 될 만한 마인들을 끌어오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현수라도 그의 의중을 이해해 주니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이현수가 뿌듯한 마음으로 당당히 가슴을 폈다.
하지만 현실은 딱히 녹록하지 않았다.
[너, 뭐 잘못 먹었냐?]“……예?”
뭐냐.
이 반응은?
이현수는 이 순간 강진호와 그의 사이에 커다란 불신의 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언제는 보너스 주셨다고 갑자기 보너스 타령이십니까?”
[……여긴 돈벌레들밖에 없어.]“…….”
뭔가 강진호가 무시무시한 일들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마음속으로나마 그에게 애도를 보낸 이현수가 정색하고 말을 바꿨다.
“여하튼 좋습니다. 그럼 출발은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삼 일 내로 출발하고 싶은데, 준비는 끝났나?]“삼 일이라면 빠듯하지만 가능합니다. 인원이 늘어났지만, 욱여넣으면 되겠죠. 사람이 아니라 짐이라고 생각하면 적재량이 넉넉하다 못해 넘쳐 나는 수준입니다. 다만, 이동하는 와중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포기해야 합니다.”
[괜찮아. 진행해.]“예, 회주님.”
이현수가 눈을 빛냈다.
[상황이 바뀌면 연락하지. 그전에 준비가 끝나면 전화해.]“중간중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강진호가 전화를 끊자 이현수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보통 일은 아니야.’
물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일을 진행하는 동안 어떤 방해가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급해.’
모든 것이 급박하다.
강진호는 원래 이리 일을 급박하게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준비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천천히 준비를 하다가 움직여야 될 때가 되면 전광석화처럼 모든 것을 처리해 버리는 사람이다.
강진호가 준비 단계부터 사람을 이리 재촉하는 건 처음 봤다.
그건 곧 강진호가 지금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아마 그 문제는 홍왕계로부터 비롯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완벽하게 처리해야 해.”
이현수가 전화기를 들었다.
이미 대부분은 확인을 끝냈지만, 한 치의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번 일이 총회의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와.”
전화로 이현주를 부른 이현수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가 모든 계획을 다시 한 번 빠르게 점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