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4
#73.
조우하다 (4)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축제와 중간고사, 그리고 기말고사가 지나고, 마침내 강진호는 첫 방학을 맞이했다.
그사이 꽤나 많은 일이 있었다.
강은영은 착실히 데뷔를 준비했다.
갑작스러운 이적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그룹을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인지 강은영은 솔로 데뷔를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나름 실력이 있기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솔로?”
“응.”
“네가 혼자서 데뷔한다고?”
“그렇다니까! 사장님이 나더러 진짜 오랜만에 보는 대박급 인재래!”
“안타까운 일이군.”
“뭐가?”
“거짓말이라면 그렇게 너를 구슬려야 하는 사장의 심정이 안타깝고…….”
“사실이면?”
“사실이라면 그토록 무너진 가요계의 현실이 안타깝지.”
“오빠.”
“응?”
“딱 세 대만 맞자.”
“…….”
“어허, 물러서면 안 되지. 남자답게! 어? 거기 안 서! 이리 와! 야!”
조규민은 그사이 재경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경대학 행정실장 자리가 배정될 예정이었지만, 고등학교에서 놀고먹는 일의 편함을 알아버린 조규민은 그 자리를 극구 거부했다.
결국 조규민은 행정실 부실장이라는 괴상망측한 칭호를 얻어내고는 재경대에 눌러앉았다.
“부실장이라구요?”
“그렇습니다.”
“행정실에도 부실장이 있나요?”
“만들면 있는 게 직책 아니겠습니까?”
“하는 일은 뭐죠?”
“강진호 씨의 고충과 불만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이죠.”
“하는 일이 없군요.”
“뭐,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월급은 꼬박꼬박 받으시죠?”
“사실 강진호 씨에게만 말씀드리는 건데, 제 연봉이 재경 내에서도 꽤나 높은 편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디 전화하시는 겁니까?”
“회장님요.”
“갑자기 회장님은 왜?”
“인력과 자금의 낭비를 그냥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서.”
“어허! 왜 이러십니까! 제가 매번 커피도 타 드리고! 그 휴대폰 일단 내려놓으시고! 제가 자전거도 수리해 드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금동이! 금동이 누가 사 온 겁니까! 강진호 씨!”
어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 가게를 돕기로 했다.
손이 부족하기도 하고, 자꾸만 매출이 떨어지자 아버지를 못 믿은 어머니가 가게에 직접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 어디 갔다 와요?”
“나 잠깐 요 앞에…….”
“사장이 심심하면 자리를 비우니까 손님이 떨어지는 것 아니에요!”
“아니, 그냥 진짜 잠깐…….”
“어휴, 내가 미쳤지. 내가 이런 인간을 믿고 가게를 맡겼으니!”
“아니…… 정말 잠깐 다녀온 건데.”
“할 짓 없으면 주방 가서 설거지나 해요!”
“예.”
성심 보육원은 과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강진호가 하던 일을 시작으로 주변의 노인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육원 원장님을 필두로 보육 교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독거노인들을 찾아가는 일을 했다. 일손이 남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오지 말라는데 뭐 자꾸 얻어 처먹을 것 있다고 자꾸 찾아오고 난리야?”
“얻어먹으러 온 게 아니라 드리러 왔어요. 반찬 좀 만들어봤는데, 좀 드세요.”
“맛대가리도 없는 것 뭐 하러 자꾸 가져와!”
“그럼 다시 가져갈까요?”
“가지고 왔으면 두고 가면 되지, 뭐 하러 그걸 다시 가져가?”
“그럼 여기 둘게요. 설거지는 되어 있어요? 쌀은 있으시구요?”
“신경 쓰지 말고 어여 가.”
“아니, 할머니.”
“어허, 가! 가라니까! 자꾸 우리 집 오지 말고 저 옆집 박 영감네 집에나 가봐. 그 할배 딱 봐도 오늘내일해.”
“예, 알겠어요. 할머니, 또 올게요.”
“오지 마! 제발 좀 오지 마!”
“네, 또 올게요.”
“말귀를 못 알아 처먹나.”
정인규는 여전히 재수 중이었다.
고3 생활을 무려 1년 6개월째 하고 있지만, 성적은 안타깝게도 전혀 오르지 않았다.
“모의고사 성적 나왔냐?”
“야…… 니가 친구냐?”
“왜?”
“그걸 왜 물어보는데? 나왔으면 왜? 뭐? 뭐가 문젠데? 니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아니, 나는 그냥…….”
“모의고사 따위 어차피 연습일 뿐이야. 나는 실전에 강하다고. 실전파야, 실전파!”
“너, 작년 실전은…….”
“야, 너 가.”
“너 혹시 성적 떨어진 거 아니냐?”
“가, 인마! 가! 오지 마!”
한세연은 성심 보육원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사회복지과 복수 전공을 노리고 있었다.
1학년은 복수 전공이 안 된다고 하자 그녀다운 방법을 선택한 듯싶었다.
“학생?”
“예.”
“자, 질문에 대답해 볼까?”
“심리학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맞았어요. 몇 학번 누구죠?”
“그게…….”
“점수 올려줄 테니 대답해 봐요.”
“저…….”
“왜 그러죠?”
“죄송합니다! 경영학부 한세연입니다! 수업을 꼭 듣고 싶어서 그냥 들어왔습니다.”
“신청을 하면 되지.”
“1학년입니다!”
“용기가 가상해서 그냥 넘어가겠어요.”
“감사합니다!”
“대신 다음 시간부터는 출석 부를 테니, 꼭 나오도록.”
“헐, 교수님.”
그리고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참.”
“예!”
“서류 정리하라고 한 것 해왔어?”
“예, 여기 있습니다.”
“……누가 서류를 이따위로 정리하래?”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농담이야. 꽤 잘했는데?”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딱딱해. 힘을 좀 안 빼면 쓰러진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거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스무 살이라고 했나?”
“예.”
“다른 놈들 같으면 한창 놀고 있을 나이인데, 이런 일 하려니 힘들지 않아?”
“괜찮습니다.”
“서른 먹은 녀석들도 힘들다고 도망가는 곳이 여기야. 있어 보이지만, 막상 안을 들여다보면 세상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잡 부서가 비서과라고.”
“저는 마음에 듭니다.”
“이해를 못하겠네.”
“예?”
“네 나이면 한창 놀 나이지. 그리고 아직은 노는 게 맞는 나이야. 그런데 왜 벌써부터 이 힘든 일을 해? 돈이 필요하면 다른 일도 많아. 그리고 대학도 안 갔다며? 대학도 안 간 녀석을 여기서 일하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도 웃기지만, 그걸 묵묵하게 하는 네가 더 이상하다. 너 혹시 무슨 사장님 숨겨놓은 자식쯤 되냐?”
“아닙니다.”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됐다, 됐어! 재미없는 놈. 좀 있으면 회장님 나오시니까 미리 보고서 챙기고 준비해 둬.”
“예.”
“이번에도 저번처럼 제대로 못하면 가만히 안 둔다.”
“걱정 마십시오.”
“끄응, 너 진짜 대단하다. 내가 존경한다, 너.”
“별말씀을요.”
그중 가장 큰일이라면 역시나 박유민이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었다.
강진호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인 경기장을 직접 찾았다.
“야, 유민이 보여?”
“내 눈에는 보인다.”
“니 눈은 무슨 매의 눈이냐? 여기서 보여?”
“그래.”
“난 전혀 안 보이는데.”
“경기나 보면 되지.”
“경기 보러 왔냐, 유민이 보러 왔지! 아, 내가 그래서 빨리 오자고 그랬잖아!”
“왜?”
“빨리 와야 앞자리를 맡지! 그래야 유민이 볼 거 아냐.”
“빨리 안 와도 돼.”
“왜!”
“맨 앞자리는 원래 가족 지정석이야.”
“그래?
“우리 자리도 있어. 그냥 가서 앉으면 돼.”
“누, 누가 그러는데?”
“박유민이.”
한세연은 볼을 부풀렸다.
“니들은 만날 나만 빼놓고 이야기한다?”
“그런가?”
강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안전 요원들이 제지를 했지만, 신분을 설명하고 신분증을 제출하자 가장 앞자리로 그들을 안내했다.
“원장님, 오셨어요?”
한세연은 성심 보육원 원장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세연이 왔니? 진호도 왔구나. 나는 떨려서 못 보겠어.”
“그래도 원장님이 와주셔야 유민이가 안심하고 플레이하죠. 우리 같이 응원해요.”
“그래, 그러자꾸나.”
“야, 강진호! 너도 응원해.”
“안 해도 돼.”
“왜! 왜 안 하는데! 유민이가 결승까지 왔는데!”
“어차피 이겨.”
“야! 저쪽도 잘해. 지난 대회 우승자야.”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박유민이 이겨.”
“네가 어떻게 아는데?”
“당연하지.”
“뭐가?”
“박유민을 이길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어.”
“……너, 진짜 그 정도면 병이다.”
“두고 봐.”
하지만 경기는 강진호의 말대로 흐르지 않았다.
5판 3선승제.
첫 게임과 두 번째 게임의 결과는 박유민의 압도적인 패배였다.
뭔가 손도 써보지 못한 패배.
“야! 니가 헛소리해서 그렇잖아!”
강진호는 한숨을 쉬었다.
경기용 캡슐 안으로 잔뜩 긴장해서 얼어붙어 있는 박유민이 보였다.
경기가 끝났음에도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꼴이, 척 봐도 상태가 짐작이 갔다.
“야, 어떻게 해! 유민이 얼었나 봐! 여기서는 불러도 안 들리는데.”
“그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박유민.”
그러자 캡슐 안의 박유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해, 인마?”
박유민이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손 다 풀었어?”
박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 만큼 놀았어?”
박유민이 미소를 지었다.
천심통.
강진호가 마음먹는다면 그깟 방음 장치 따위가 강진호의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럼 이제 이겨. 잊지 마. 니가 지면 나도 지는 거야. 나는 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어.”
박유민이 킥킥대며 웃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뭐래?”
“건방진 말.”
“무슨 말?”
“그.럼. 이.겨.야.지.”
한세연이 웃으며 박유민을 가리켰다.
“야, 박유민. 많이 컸다?”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커서 감당이 안 될 만큼.”
3경기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1, 2경기의 무기력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시종일관 안정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더니,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게임을 승리로 이끌었다.
평소 박유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야, 유민이 정신 차렸나 봐.”
“오래도 걸린다.”
강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박유민.
괴이한 인연으로 만나 알게 된 친구가 지금 저곳에서 대한민국 최고가 되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비록 아직은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는 게이머일지라도 그에 쏟은 노력은 결코 다른 스포츠에 못지않을 것이다.
지금 박유민이 그 정상에 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찌질이 박유민이 언제 저렇게 멋있어졌냐?”
“멋있다고?”
“안 멋져?”
“음…….”
강진호는 가볍게 웃고는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은 박유민은 4경기를 초반 러시로 깔끔하게 잡아내고 최종 경기에 돌입했다.
터져 나갈 듯한 캐스터와 해설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고 경기를 중계한다.
단순한 게임 때문에 수만 명이 이곳에 몰려와 그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팽팽한 경기.
누가 이겨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멋진 명경기가 펼쳐졌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유민이 그곳에 있었다.
“조금 멋있는데?”
강진호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