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45
#744.
강림하다 (4)
“흐으으으…….”
턱이 제멋대로 열리고 있었다.
육체는 의식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때때로 육체는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제발, 제발 좀 움직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다리는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멋대로 경련하고, 제멋대로 끌린다.
‘제발…… 제발!’
빌고 또 빌어본다. 하지만 풀려 버린 다리에는 힘이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끄, 끄으으…….”
손을 앞으로 뻗는다.
시멘트 바닥에 손가락을 박아 넣고 끌어당긴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직 움직이는 팔이라도 놀려야 한다.
당기고, 또 당기고…….
시멘트 바닥에 부딪친 손톱이 부러지는 느낌이 났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고통이란 너무 큰 사치다.
“흐으…….”
달아나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저 괴물에게서.
손을 뻗고 또 뻗는다. 풀려 버린 다리도 억지로 당기고 바닥을 밀어낸다. 배가 바닥에 쓸리고 있지만, 감각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짓가랑이는 이미 조금 전부터 흥건히 젖어 있지만, 그런 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창피?
지금 이 상황에서?
알게 된다.
인간이 극한까지 몰리게 되면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수치라든가, 체면이라든가 하는 건 거추장스러운 쓰레기에 불과하다. 살아남는 데 그딴 것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살고 싶다.
1초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흐으으으…….”
흘러나온 눈물과 콧물이 엉망으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흐르지만, 닦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달아나야 한다.
당장 여기에서…….
턱.
그 순간, 그의 몸이 전율했다.
발소리.
허리 어림에서 들리는 발소리.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눈앞에 전력으로 달아나는 이들이 보였다. 그의 등 뒤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등 뒤에 있는 것이라고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녹이 슬어버린 기계처럼 덜컥대며 돌아가는 고개.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돌린다.
멍청해서?
어리석어서?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눈에 보이는 공포보다 더 두렵기 때문이다. 등 뒤에 누가 있는 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기 어린 시선에 ‘그’의 모습이 보인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너무도 끔찍하니까.
마치 세상에 붉은 비가 내린 것만 같다. 그 비를 흠뻑 맞아 전신을 붉게 물들인 이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적신 붉은 피가 방울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또옥.
결코 들릴 리 없는 소리.
피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도 명확하게 그의 귀를 파고들고 있었다. 머리카락뿐 아니다.
옷 끝, 늘어뜨린 검의 끝, 그리고 날카롭게만 보이는 턱을 따라 흘러내린 핏방울이 마치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저건 피다.
사내의 등 뒤로 보이는 수많은 시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 붉디붉은 사내.
처음 그의 얼굴이 어땠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정글 속의 야만인처럼 얼굴을 붉게 칠한 것 같은 모습뿐이니까. 피에 젖지 않은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해도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과거의 모습 따위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아, 아아…….”
꿈틀대는 그의 등 뒤에 절대적인 죽음이 서 있다.
죽음은 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몸 안에 수분이 남아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뭔가 자꾸 새어나오는 느낌이 났다.
붉디붉은 얼굴 사이로 새하얀 선이 생겨난다.
그 선의 정체가 미소라는 걸, 미소 짓는 아마의 하얀 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사, 살려…….”
애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악마는 인간을 동정하지 않으니까.
악마에게 인간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그저 손쉽게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리면 그만인.
이런 이들은 상대를 동정하지 않는다.
상대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반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을 목도한 인간은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이나, 눈앞의 절대적인 존재에게 애원하는 것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달라질 것이 없음에도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게 인간이 아닌가.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
악마의 고개가 모로 살짝 꺾였다.
재미있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던 악마가 천천히 입을 연다.
“살려 달라고?”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음성. 하지만 결코 높지 않은, 낮은 쇳소리라고 불러야 할 그 기이한 음성이 사내를 짓눌렀다.
“사, 살려…….”
“생각해 보지.”
악마의 목소리는 너무도 담담했다.
그 사실이 사내를 더욱 버틸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이만큼의 피를 봤음에도.
피에 미쳐서 달아나는 이의 등에 칼을 꽂고, 그들의 사지를 잘라대고 있음에도, 이 악마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외형과는 다르게 그의 내부는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다. 그 사실이 더욱 공포스럽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지. 내가 너희의 합공에 쓰러져 있었다면, 너는 나를 살려주기 위해 노력했을까?”
“…….”
“내 목을 네가 잘라서 공을 세울 생각으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왜 내가 너를 살려줘야 하지? 인간은 동등한 존재이지. 그런데 왜 네가 베풀지 않았을 자비를 내가 베풀어야 하지?”
“그…….”
“대답해 봐.”
강진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를 납득시킬 수 있으면 살려주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사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변명은 이미 강진호의 논리에 차단됐다. 그의 말이 맞으니까.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는 강진호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을 것이다. 강진호가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빈다 해도 비웃음을 흘렸을 게 빤하다.
그런데 왜 강진호는 그를 살려줘야 하는가.
그런 이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이곳은 전장이다.
전장의 법칙은 단 하나뿐이다.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산다.
그런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말해봐.”
그그극.
강진호의 손에 들린 적루가 바닥을 긁으며 사내의 목 바로 옆에 와닿았다.
“내가 너를 살려줘야 할 이유를 말이야.”
“나는, 난…….”
사내가 혼이 빠진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사신의 칼날이 그의 목에 와닿았다. 그러고는 썩은 동아줄을 내민다.
잡는다면 떨어져 죽고, 잡지 않는다면 목이 베여 죽는다. 마귀만이 내밀 수 있는 선택지였고, 마귀만이 할 수 있는 거래였다.
“흐으…….”
강진호의 이가 드러났다.
“없군.”
“아, 아니! 있습니다! 이…… 있습니다!”
벌벌 떨려 나오는 목소리.
하지만 사내는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살아오며 이리 필사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지껄여 봐.”
“저, 저는…….”
강진호의 시선이 사내와 마주쳤다.
“가족…… 가족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다.
강진호의 동공은 가라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이…… 가족이 있습니다. 제발 살려…… 살려…….”
마지막 목소리는 울음소리에 눌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강진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나?”
“…….”
“동정을 원하는 무인은 더 이상 무인이 아니지. 넌 이미 죽은 거야.”
가볍게 웃은 강진호가 적루를 내리그었다.
서걱.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강진호가 가만히 사내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무인이 아니면 죽을 필요도 없지.”
적루를 회수한 강진호가 사내를 버려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힘줄을 잘라 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무공을 쓰지 못할 것이다.
‘변덕이겠지.’
죽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적은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그게 강진호의 철칙이다.
그럼에도 강진호는 사내를 죽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 역시 잘 모른다.
말 그대로 변덕. 그저 그러고 싶었기에 그런 것뿐이다.
아마도 이건 변덕이고, 또 저항이다.
들끓어 오르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 달라졌다고 자부하고 있음에도 피를 보는 순간 미쳐 날뛰며 과거의 적천마존으로 돌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저항.
그렇게라도 포장해야겠지.
멍청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니까.
강진호가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익숙하기 짝이 없는 맛, 그리고 향, 그리고 광경이었다.
적루를 떨친 강진호가 다시 발을 옮긴다.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차이커창 님!”
“…….”
“차이커…….”
“알고 있으니까 주둥아리 처 다물고 있어!”
신경질적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우지위안이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차이커창의 눈에 방어선을 뚫고 달려 나가는 마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부터 저들은 저리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마치 달아나는 것 같군.’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가 강진호를 피해 도망가는 것 같았다. 서로 영역 싸움을 하던 양 떼들 사이에 범이 뛰어든 형세였다. 양 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도망가는 것뿐이다.
‘무리야.’
전략의 실패였고, 전술의 실패였다.
전략적으로는 강진호를 제어할 만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 일천에 가까운 무인들을 모았음에도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 개를 아무리 모은다고 해도 개는 개. 절대 범을 상대할 수 없다.
적어도 이리라도 끌어모아야 했다. 강진호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차이커창이 저지른 실수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도 실패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강진호의 신위에 질리기 전에,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했다. 겁을 집어먹을 시간도 주지 않고 총공세로 나섰다면 지금 같은 몰골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차이커창의 잘못.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상대를 알았을 때는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이제 전장의 흐름은 그의 손을 벗어났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두둑.
이가 입술을 파고들며 시뻘건 선지피가 턱을 타고 흐른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목을 스스로 잘라 곱게 포장해 바쳐도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 하나의 목숨으로 갈무리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커졌다.
통제를 벗어나 최악으로 치달아가는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그가 백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하지만 어떻게?
강진호는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저자를 막아야 한단 말인가. 그가 가진 전력은 모두 질려 달아나기 바쁜데.
그때였다.
전장을 바라보던 차이커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 어떻게?”
마인들이 달려가는 부두의 한 곳에서 찬란한 광채가 비쳐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