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5
#74.
조우하다 (5)
“그래도 우승해야 진짜 멋진 거다.”
그 말을 들었는지 박유민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박유민! 박유민 선수! 몰아칩니다! 몰아치고 있어요! 으아아! 저 절묘한 컨트롤! 박유민! 박유민!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우승자가 탄생하려 하고 있습니다! 박유민! GG! GG 나옵니다!]장내에 쩌렁쩌렁 울리는 중계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폭죽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 유민이가 이겼어! 우승이야!”
“해냈군.”
강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왠지 뿌듯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보고 뿌듯함이란 걸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장내의 소란이 가라앉자 박유민이 인터뷰를 시작했다.
“유민이 울어.”
“평생 남을 영상인데 찌질하게.”
캐스터가 박유민에게 질문을 했다.
[박유민 선수! 우승하셨는데요! 이 기쁨을 누구와 나누고 싶으십니까?]박유민이 조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함께 연습하고 고생해 준 우리 팀원들,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신 감독님, 그리고 절 키우고 길러주신 우리 보육원 원장님, 우리 착한 동생들, 모두모두 감사드리구요, 절 프로 게이머의 길로 이끌어준 우리 친구들! 지금 이 자리에도 와준 우리 친구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친구들 말인가요?] [예! 진호야, 나 약속 지켰다!]강진호는 웃음을 터드렸다.
“못 말리겠군.”
하지만 한세연은 왠지 뚱한 표정이었다.
“왜?”
“저게 내 이름만 쏙 빼고 안 불렀어.”
“…….”
“내려오면 죽었어.”
“봐줘, 우승했는데.”
“반만 죽었어.”
강진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반 죽어도 좋은 날이지.”
박유민이 마침내 우승을 했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축하한다.’
시간은 흘러간다.
많은 일들과 많은 추억들을 남기고.
* * *
“우리 진호의 깔끔한 입대를 위하여!”
정인규가 술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위하여!”
강진호는 술잔을 들어 잔을 부딪치고는 다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너 왜 안 마셔?”
“맛이 없어.”
“술을 맛으로 먹냐?”
“그럼?”
“취하려고 먹는 거지!”
강진호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안 마셔.”
“뭔 소리야?”
박유민이 깔끔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진호는 니들 마시는 것 열 배를 마셔도 안 취해. 그러니까 취하려고 술을 마실 수가 없다는 거지.”
“……진호, 술이 그렇게 세냐?”
“장난 아니야.”
“그렇구나.”
가만히 상황을 보던 민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인규는 누가 불렀냐?”
“아무도 안 불렀어. 지가 알아서 나온 거지.”
“야, 이 의리 없는 놈들아! 진호 군대 가는데 나를 빼놓고 지들끼리 술을 마시려고 해?”
“너는 수험생이니까.”
“수험생은 사람도 아니냐? 내가 서러워서.”
정인규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술이 한 순배, 두 순배 돌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와 어디선가 주워들은 군대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술자리가 몇 시간이나 지속되는 동안 한세연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박유민이 자리를 깼다.
“벌써?”
“재수생도 있고, 나도 대회 준비 때문에 몸 관리 해야 해.”
“아쉬운데.”
“진호야, 이제 일어나자.”
“그래.”
강진호는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차피 그는 술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보려 했을 뿐이다.
“자, 그럼 계산은 내가 할게.”
“오오, 사회인!”
“프로의 위엄!”
“아니지! 우승자의 패기!”
박유민은 친구들의 환호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 게 아니라…….”
“됐어, 됐어! 돈 내주면 좋은 거지 뭐!”
박유민은 머쓱해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술집을 나와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들은 하나둘 집으로 향했다.
“진호야, 나 간다.”
“태워줄게.”
“됐어. 세연이나 바래다 줘라.”
“음?”
“난 택시 타고 갈게.”
“그래.”
강진호는 박유민을 배웅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자.”
“응.”
집으로 향하는 동안 한세연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저번처럼 괴이한 떼를 쓴다든가 하지는 않았기에 강진호는 한층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신청 언제 했어?”
처음으로 한세연이 강진호에게 말을 건넸다.
“얼마 안 됐어.”
“말 한마디 안 하고?”
“…….”
“하기야 넌 원래 그러니까.”
한세연의 말투에는 서운함보다는 쌀쌀함이 묻어 나왔다. 실망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강진호는 한세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강진호도 알 수 있었다.
어두운 밤길을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도중 한세연은 두어 번 강진호를 돌아보았을 뿐, 딱히 말을 건다든가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둘은 한세연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가.”
“그래.”
“입대 잘하고.”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그래.”
한세연은 강진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말고는 할 말이 없어?”
“…….”
“말도 없이 입영 신청 하고 입대 며칠 전에 갑자기 입대한다고 말해 버리면 끝이야? 그래놓고 할 말은 ‘그래’. 이래도 ‘그래’, 저래도 ‘그래’. 그래! 그래! 그래!”
한세연의 목소리가 커졌다.
“진짜 이제는! 이제는 지긋지긋해!”
강진호는 한세연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했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몰라서 물어? 아, 맞지. 모르겠지. 모르니까 묻는 거겠지! 아는 걸 물어볼 사람이 아니잖아!”
강진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 집 앞에 마가 끼었는지, 여기만 오면 상황이 이상하게 흘렀다.
“취했다. 들어가. 나 갈게.”
“술은 마시지도 않았어.”
“…….”
“지친다, 이제 나도. 가. 잘 가. 나도 이제 그만할 거니까 너도 네 마음대로 해. 입대를 하든 이민을 가든 네 멋대로 해.”
한세연이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렸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안녕.”
한세연이 작별 인사를 남겼다.
이상하게 기분이 씁쓸해졌다.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한세연.”
“……왜?”
“왜 화났는지 모르겠는데, 화 풀어라. 사과할게.”
한세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데 사과는 왜 해!”
“네가 화났으니까.”
“그게 사람을 더 열 받게 만든다는 거 알아?”
한세연은 눈가를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너무한다. 정말 너무해.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한세연이 처연하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
“너 좋아한다고, 예전부터 계속.”
“나도 그래.”
한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나 좋아하지. 유민이도, 인규도, 태호도, 민재도 다 좋아하지. 알아. 그래서 내가 널 좋아했어. 그런데 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강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난 매번 네 주변에 기웃대기만 하고, 너는 나한테 관심도 없고, 이제 이런 거에 지쳤어. 나도 나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서 편히 지낼래.”
“…….”
“가. 군대든 어디든 가. 이제 네 앞에서 사라져 줄게. 이제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강진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건 아니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몸 건강하게.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한세연이 싱긋 웃었다.
“그래도 즐거웠어. 그러니까 이제 됐어. 안녕.”
한세연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씁쓸하다.
이상하게도 참 씁쓸했다.
‘이상하게…….’
친구 하나를 잃었다.
그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 때문인지 자꾸 속이 답답하고 씁쓸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뭐였지?’
이런 감정.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아주 예전…….
과거.
그보다 더 이전에 잠시나마 가졌던 것 같은 감정.
‘늦어버렸군.’
알아채는 게 늦었다.
강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 아니, 많이 늦었어.”
강진호는 몸을 돌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이 가진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어서. 어쩌면 평생 동안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를 감정이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강진호는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는…….
“야!”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강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사람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는 감정에 휩싸여 있던 것이다.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가냐, 인마!”
“…….”
대문을 열고 한세연이 다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라기에…….”
“가란다고 가? 가냐고!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대문 붙들고 사정을 하든지 미안하다고 울고불고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내 체면이 사는 거 몰라?”
“그런가?”
강진호가 얼떨떨해하는 동안 한세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
“응?”
짜악.
한세연의 손이 강진호의 볼을 후려쳤다.
“……안 피하네?”
“가만히 있으라며?”
“아파?”
“아니.”
“아프라고 때린 건데?”
한세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누굴 탓하겠어. 내가 바보고 내가 멍청하지. 어쩌자고 이런 놈을…….”
강진호는 할 말이 없었다.
뭔진 모르지만,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또?’
강진호는 몸을 고정했다.
그러자 한세연이 그에게 슬쩍 다가와 안겼다.
“어?”
한세연이 고개를 두어 번 들더니, 살짝 인상을 썼다.
“무, 무릎 굽혀.”
“무릎?”
“굽히라고!”
강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조금 더.”
“왜?”
“굽히라니까!”
강진호는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한세연이 그의 얼굴로 다가와 입을 맞췄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감정을.
강진호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한세연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잘 다녀와.”
“그래.”
“휴가 나와서 박유민한테 먼저 연락하면 진짜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죽여 버릴 거야.”
“그럴게.”
“그런다고?”
“……먼저 연락할게.”
한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강진호를 한 번 안았다.
“잘 갔다 와, 나쁜 놈아.”
“건강해.”
한세연은 다시 한 번 강진호의 입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는 빨개진 얼굴로 달아나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진호는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이상하군.’
이상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강진호는 슬쩍 고개를 돌려 한세연이 있는 대문 안을 바라보았다. 대문 안에 기대 울고 있는 한세연이 느껴졌다.
“미안.”
강진호는 가볍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지금은 가야 할 때다.
“야! 강진호!”
대문 안에서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왜?”
“고무신 거꾸로 신을 거다, 이 나쁜 놈아!”
강진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참, 끝까지…….
끝까지 말썽이다.
강진호는 기이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경공을 써 빠르게 갈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강진호는 오랜만에 밤길을 홀로 걸었다.
‘나는 변했을까?’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강진호는 변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강진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평온한가?’
과거에 비한다면 지금의 세상은 즐거운 일들만이 가득했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은 평온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삶이었다.
‘나는 행복한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그는 그가 바라던 행복이라는 것에 조금씩 근접해 가고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다행이다.’
현대로 돌아올 수 있어서.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서.
그가 바라 마지않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지금처럼 그렇게.
강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조금은 서글퍼 보였고, 조금은 아쉬움에 찬 듯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조금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럼에도 인정해야 할 시기가 온다.
바로 지금처럼.
“나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지금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