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6
#75.
조우하다 (6)
강진호의 입이 열렸다.
조용한 침묵이 강진호의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도심 한가운데에 내려앉은 정적은 고요했고, 또한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이곳만이 다른 세상으로 돌아선 것 같다.
“내 손으로 끌어내기 전에 나와. 난 두 번 말하지 않아.”
“이미 두 번 말한 것 아닌가?”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그림자 속에서 나온 이는 중절모를 눌러쓴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자신의 미행을 알아차린 강진호에게 놀랐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암행에는 자신이 있는 그였는데, 오늘 처음으로 강진호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강진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쯧쯧.”
중년인은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나는 벌써 세 달 전부터 자네를 미행했지.”
“그래, 처음부터.”
중년인의 안색이 굳었다. 강진호가 하고 있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들었다.
“알고 있었다고?”
“그래.”
“그런데 왜 지금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거지?”
강진호는 씁쓸하게 말했다.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
“긴 시간 만에 가져본 평온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중년인은 미소를 지었다.
“넌 우리의 예상보다 더욱 뛰어나군.”
강진호는 가만히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을 감시해 왔는지, 왜 지켜보고만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알고 싶지 않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이 세계에 숨겨져 있는 진실에 다가갈 때였다.
“이제 말해. 왜 나를 미행했지?”
“네가 나를 불렀다 하지 않았나?”
“내가?”
“내 미욱한 제자 놈에게 스승을 데려오라 했다더군.”
강진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적이 있었지.”
예전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무인.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왔네.”
강진호가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냈다.
“난 농담을 싫어해.”
“…….”
“특히 쥐새끼처럼 뒤를 쫓던 놈이 던지는 농담을 들으면 살의를 느끼지.”
“큭큭큭.”
중년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어. 용건만 말하면 돼.”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용건을 말하지. 내가 그동안 너를 미행한 것은 네가 어떤 자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왜?”
“네가 어떤 자인지 알아야 널 끌어들일 것인지, 제거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지.”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강진호에게는.
“그래서 판단은?”
“그게…… 모르겠군.”
중년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볼을 긁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넌 굉장히 여러 가지 일면을 가지고 있어. 지극히 악당 같으면서도 때로는 굉장히 선한 것도 같고, 무심한 듯하면서 섬세하고, 냉철한 듯하면서도 감상적이지. 너처럼 한 몸 안에 여러 가지 인격이 동시에 보이는 사람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그래서 판단이 서질 않아.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지.”
“결론만 말해.”
“그래서 생각한 건데, 굳이 우리가 결정할 필요는 없겠더군.”
“무슨 말이지?”
“판단은 너도 할 수 있으니까.”
강진호의 눈이 가라앉았다.
“어떤가, 우리와 함께하겠나?”
강진호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네. 설명이 필요하겠지. 뭐, 그리 거창한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닐세. 세계 정복이라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할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우리의 목적은 그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이지.”
“조종?”
“세상에는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힘을 가진 이들이 있지. 세상은 그들을 때로는 마녀라 부르고, 때로는 선지자라 불렀지. 하지만 현대에는 그 어떤 이들도 드러나 있지 않아. 자네 역시 마찬가지지. 자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자네가 실제로 뭘 할 수 있는지를 알면 괴물인 양 바라보겠지.”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잘못이지. 뛰어난 것이 어째서 배척되어야 하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 우리는 그 질서를 바로잡으려 할 뿐이야.”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세상은 어차피 약육강식.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켜야 한다. 하지만 현대는 절대적인 강자가 오히려 허약한 다수를 피해 숨어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현대식 무기의 발달.
그리고 새로운 힘에 대한 갈망.
아마 무공에 대한 것이 세상에 퍼지면 강진호를 산 채로 해부하려 들 사람이 세상에 넘쳐 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할 강진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강진호의 삶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평온함과의 결별.
그리고 그가 바라던 행복과의 결별.
강진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를 제거하려 했다고?”
“……이상이 맞지 않는다면 말일세.”
“그렇다면 당신들 역시 둘로 나뉘어 싸우고 있겠군.”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네. 세상에는 이 형태를 유지하려 하는 온건파들이 있기 마련이지.”
“내가 온건파라면 제거할 생각이었다?”
“꼭 그렇지는 않네. 온건파라고 해도 우리를 적대하고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제거하지는 않네. 그걸 판단하기 위해 내가 이리 긴 시간 동안 자네를 따라다닌 것 아닌가. 우리도 무의미한 살육을 즐기는 살인자 집단은 아니라네.”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결론을 내렸나?”
“이미 내려놓았어.”
“그 결론을 들어보지”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 꺼져.”
“…….”
“죽이지는 않아. 난 예전과는 다르니까. 그러니까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한 번만 더 나를 귀찮게 하면, 그때 너는 내가 누군지 알게 될 거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나를 끌어들인다고?”
“그렇다.”
강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 미소는 강진호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 중원을 피의 공포로 몰아넣은 적천마존의 미소가 지금 이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상은 약육강식.”
“그렇다.”
“그런데 어째서 강자인 내가 약해 빠진 너희 무리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
“……뭐라고?”
“나와 함께하고 싶다면 무릎을 꿇어. 그리고 고개를 조아려. 그럼 받아주지.”
“이 미친놈!”
중년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오만하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광오하다 못해 미친놈이었다.
어떻게 저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
중년인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어떤가?”
강진호는 중년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방해?”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을 너희들이 조종하겠다고?”
“그래, 그게 우리의 목적이다.”
“나 역시?”
“…….”
“나의 가족과 나의 친우들도 너희의 손아귀 아래서 놀아나도록 눈을 감고 귀를 막으라 말하는 건가?”
강진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조금 뒤틀렸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일변한 분위기를 느낀 중년인이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이 몸을 짓눌렀다.
“으…….”
중년인의 어깨가 떨려왔다.
‘펴, 평가가 잘못됐어.’
강진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중년인의 목을 죄어왔다. 숨도 쉬기 힘든 살기가 피부를 찢어발기고 심장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감히 내게?”
“커억!”
중년인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듯 주저앉았다.
‘이, 이자는 대체…….’
중년인이 전신을 떨었다. 이 정도면 그저 강자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일대 종사급. 어떤 시대에 태어났어도 천하를 호령할 수준이었다.
“누, 누구냐, 너는!”
“알고 있잖아.”
중년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진호가 천천히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내,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내가?’
중년인은 지팡이를 꽉 움켜잡았다.
강진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 중년인의 바로 앞에 섰다.
그러고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중년인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강진호가 어떤 힘으로 제재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년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전신이 갈가리 찢길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약속은 지켜. 보내주지.”
“끅…….”
“가서 전해.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내 주변을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살아서 지옥을 보게 될 거야.”
“으으…….”
강진호는 몸을 돌렸다.
대화는 끝났다.
그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이들을 외면한 것은 순전히 그들에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의 경지를 알아봐 주기를 원했고, 스스로의 경지를 비교할 그 누군가를 찾고 싶었다.
그럼에도 강진호는 욕망을 내리눌렀다. 하찮은 무에 대한 갈망 따위보다 지금의 삶이 그에게는 몇 배나 더 소중했다. 더구나 그를 쫓는 이들이 단순한 무인이 아닌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이들과 연관되는 것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헤쳐 놓는 일이 될 것이다.
강진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방법은 둘 중 하나.
그들을 모조리 제거하든가, 아니면 그들을 그의 주변에서 떼어놓든가.
강진호는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중년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크흐흐, 강하군, 강해! 정말 강해!”
“…….”
“이 정도로 강해지려면 몇 번이나 겪어야 하는 거지?”
강진호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이미 그의 관심은 중년인에게서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중년인의 말이 강진호의 심기를 가볍게 자극했다.
이상하게도 관심이 가면서 거슬리는 말이었다.
‘몇 번?’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수십 번인가, 아니면 수백 번인가?”
강진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번? 수백 번?
대체 무엇을 겪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소리.
그저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리면 되는 소리에 강진호의 육감이 움직였다.
이것은 그냥 넘길 말이 아니었다.
“대답해 봐, 강진호. 너는 몇 개의 지옥을 뛰어넘어 이곳으로 돌아왔는가!”
강진호의 눈이 커졌다. 그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돌아갔다.
“지옥?”
중년인의 이가 드러났다.
그는 아주 통쾌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옥이지. 그건 지옥이야. 지옥이라고 부르는 과거. 너는 몇 번의 삶을 뛰어넘어 이곳으로 돌아왔는가, 회귀자여.”
강진호의 몸이 떨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이 사내는.
사내가 결정타를 날렸다.
“과거를 뛰어넘어 이곳으로 돌아온 이가 너뿐이라고 생각했나?”
사내의 미소가 강진호의 눈을 파고들었다.
어두운 밤.
그믐의 달.
밤을 뛰어넘어 새벽에 닿는 그 시각.
황혼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이곳 현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