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64
#763.
살아남다 (3)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그리 지칭하는 게 맞을 것이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으니까.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이라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어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니까. 어둠만이 가득하다는 것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그 공간에서 강진호는 그저 부유하고 있었다.
의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상태.
무언가를 보고 있되, 또한 보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 강진호는 그저 흘러갔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은 걸까?
생각하는 것도 잊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지조차도 사라졌다. 그저 부유한다. 그저…….
“그게 너의 삶과 뭐가 다른가.”
강진호를 일깨운 것은 그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였다.
고요한 세상에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그리 크지 않은 그 목소리조차 더없이 크게 들렸다.
강진호는 바라본다는 개념을 떠올렸다.
존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고개를 꺾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다.
그런 후에 보았다.
그를.
강진호를.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알 수 있다. 저건 그저 그의 모습이 아니다. 온전히 그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삶?”
“그래. 그저 흘러가는 것, 부유하는 것, 주변이 이끄는 대로 그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것…… 그게 네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니던가.”
“…….”
“네 스스로 선택한 것이 뭐가 있었지?”
이죽거림.
강진호는 자신이 ‘적천마존’이라 명명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잘도 남아 있군.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라져?”
적천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내가 사라진다고? 제멋대로 지껄이는군, 가짜. 나는 본질이다. 내가 진정한 강진호이지. 나는 사라질 수 없다. 내가 강진호인데 어떻게 내가 사라질 수가 있지? 사라져야 하는 건 네 쪽이지.”
“……아직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나?”
“헛소리라고?”
적천마존이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이나 돌아보지그래?”
강진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존재한다.
흐릿하게 사라진 그의 육체가 다시금 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적천마존과 동일한,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다.
“누가 누구의 가짜라고?”
적천마존의 말이 강진호의 가슴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너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그걸 ‘변화’라고 여겼지. 하지만 그건 변화가 아니야. ‘다름’일 뿐이지. 너는 강진호가 아니다. 강진호일 수 없던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잡다한 쓰레기일 뿐이지.”
강진호는 가만히 적천마존을 바라보았다.
“네가 더 많은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멍청한 놈.”
적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강진호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주는 모멸감에 강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밀도겠지. 네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내게서 이루어졌다.”
“그렇지 않다.”
“나를 구성하는 건 나의 삶이다. 네 정신이 첫 번째 삶을 온전히 향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과거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과거의 네가 진정한 너다? 그런 멍청한 생각을 정말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강진호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네 모든 것은 중원에서 만들어졌다. 태어나기를 한국에서 태어나고, 이 시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들 뭐가 다르지? 너는 중원인이다. 네 평생은, 네 모든 것은 중원에서 이루어졌지. 단적으로 말 해줄까?”
비웃는다.
그를 비웃는다.
“네가 온전한 강진호가 되는 대신에 적천마존으로 얻은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너는 그걸 선택할 수 있을까?”
“…….”
강진호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대답할 수는 없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에게서 적천마존의 능력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그가 이룩한 모든 삶은 적천마존의 능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니까.
“적천의 능력에 기대지만 스스로가 적천임은 부정한다. 간단하군. 아주 좋을 대로의 논리야.”
적천마존이 천천히 강진호에게로 다가왔다.
“아니라고 할 수 있나?”
“…….”
“부정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강진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진호는 증오를 담아 자신을 노려보는 적천을 마주하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네가 강진호임을 주장하고 싶은 건가? 이 육체를 내놓으라고?”
“천만에.”
적천마존이 빙글 몸을 돌렸다. 가볍게 거리를 둔 적천마존이 양팔을 벌렸다.
“내가 나임을 주장한다는 게 너를 배척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야. 왜냐면…… 너 역시 나니까. 죄악감과 죄책감, 수도 없이 죽여온 인간…… 그 모든 것을 안고 현대를 살아갈 수는 없었겠지. 그런 부분을 떠안는 게 불만인 건 아냐. 오히려 그건 내가 강진호라는 증거겠지. 스스로 저지른 일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 그게 네가 가짜라는 더없는 증거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적천마존이 웃었다.
“너는 나를 너무 배척했어. 너는 너무도 온전한 하나의 인격이 되어버렸지. 그러니 너는 언젠가 나에게 흡수된다. 나는 너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너는 나 없이 존재할 수 없어. 내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 너는 내가 겪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겪게 될 거야. 그저 나의 일부가 되겠지.”
“그게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그래.”
“어째서? 지금은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 답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강진호의 얼굴이 굳었다.
답을 알고 있다.
그래, 강진호는 답을 알고 있었다.
“너는 이제 네 삶을 감당하지 못해.”
“…….”
“부서진다. 네가 벌여온 일들이 네 목을 죌 거야. 그리고 그게 너를 죽이겠지. 너는 적천마존이 아닌 강진호이기 위해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우선시했어. 네가 말하는 그 가족이니, 친우니 하는 것들 대신 자신을 우선시하는 순간, 너는 나와 달라질 게 없겠지.”
딜레마다.
강진호는 적천마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세상 무엇보다 우선시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순간, 그는 적천마존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타인을 우선시하기에는 그들을 지킬 힘이 부족하다. 결국 그는 적천마존에게 손을 뻗어야 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기다리지. 이곳에서 말이야.”
어디선가 나타난 왕좌에 적천마존이 느긋하게 앉았다.
그와 동시에 강진호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여 가는 그의 귓가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잊지 마. 네가 온전한 네가 될 수 없듯, 나도 온전한 내가 될 수 없어. 내가 가져야 했던 것을 네가 가져 버렸으니까. 그게 뭘 의미하는지 너는 알 거야.”
그 순간, 모든 것이 끊겨 버렸다.
눈을 떴다.
의식을 되찾았다는 느낌이 아니다. 누군가 강제로 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는 감각이었다. 그렇게 뜨여진 눈에 들어온 것은…….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농담할 기력이 있으십니까?”
강진호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의 이현수가 앉아 있었다.
“농담도 하시는 걸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좋으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현수의 상태도 조금 이상했다.
목소리는 냉정하지만,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해주는 게 도리다.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지?”
“삼 일입니다.”
“오래 잤군.”
강진호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현수가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짓눌렀다.
“누워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강진호 씨는 봉제 인형이 형님으로 모시고 싶어 할 상태이거든요.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면, 그때는 의사가 아니라 재단사를 모셔와야 합니다. 좋은 재봉틀과 함께 말이죠.”
강진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현수는 큰일을 겪으면서 이상한 농담만 늘어난 것 같았다.
“괜찮아.”
“아니, 의사가…….”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강진호는 자신을 누르는 이현수의 손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환자복의 단추를 풀었다.
“아니, 몸 자랑은 나중에 하시…….”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강진호가 상의를 벗자 상체를 완전히 꽁꽁 싸매고 있는 붕대가 드러났다. 그 붕대까지 풀어내고 나니, 강진호의 상체를 채우고 있는 근육들이 드러났다.
단단한 근육.
단순히 미관을 위해 크기를 키운 근육이 아니다. 조금은 왜소해 보이는 근육이지만, 보면 볼수록 절로 감탄이 나오는, 그런 근육이 꽉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이현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근육이 아니었다.
강진호의 몰골은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몸뚱아리에 마치 초등학생이 낙서를 해놓은 듯 가로세로로 봉합사로 된 수가 놓여져 있다.
말라붙은 핏자국과 검은 봉합사의 조합은 이현수조차 절로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뭐야?’
하지만 강진호의 몸을 자세히 살핀 이현수는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봉합한 곳이 불룩 솟아 있는 것이 정상일 텐데, 강진호의 봉합 자국은 그저 불그스름할 뿐이었다. 봉합사가 아니었다면, 자상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어딘가에 긁힌 자국이라고 생각했겠지.
“아, 아니, 뭔?”
뚝. 뚝. 뚝.
강진호가 손가락으로 봉합사를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을 찌푸리며 이현수에게 말했다.
“가위.”
“…….”
“가위 없나?”
“병실에 가위가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십쇼. 지금 의사를 불러낼 테니까요. 딱히 필요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전문가가 자르는 게 낫겠죠.”
“음, 아무래도 그쪽이…….”
덜컥!
그때, 문이 과격하게 열렸다.
요즘은 찾아가는 서비스가 대세라고 하더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의사가 찾아왔나 싶었지만, 그 생각은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동체를 보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주인!”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바토르의 외침에 이현수와 강진호는 귀를 틀어막았다.
“주인, 괜찮은가?”
“……네가 오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몸은? 몸은 이상 없나?”
“그것도 네가 오기 전까지는 이상이 없었어.”
강진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을 입고 회복한 전력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지금처럼 누군가 옆에서 날뛰는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안색은 좋아 보이시는군요.”
바토르가 낑낑대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 그 거대한 덩치에 가려 있던 위긴스가 보였다.
“…….”
강진호의 시선이 위긴스의 어깨로 고정되었다.
비어버린 공간을 본 강진호의 입술이 살짝 짓눌렸다. 위긴스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너스레를 떨기에 좋은 상황이 아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던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조금은 허무한 듯.
“다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긴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