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69
#768.
조율하다 (3)
“이 개 같은 놈이!”
휴대폰이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그 휴대폰은 벽이 아닌 소파에 처박혔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휴대폰을 던지기는 했지만, 차마 휴대폰을 부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전화를 건다고 했으니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 혹시나 강진호가 거는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면 강진호가 받지 않을까 봐 휴대폰 하나 마음대로 부술 수 없다. 차이커창의 속이 썩어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아아!”
분을 풀지 못한 차이커창이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책상 위의 모니터가 걷어차여 벽에 처박히고, 책상이 통째로 뒤집어진다. 서류가 허공을 날았다.
벌컥!
문이 격하게 열리고,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던 비서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차이커창의 노기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며 말이다.
“이 빵즈 새끼!”
강진호에게 한국을 비하하는 욕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렇게라도 욕을 하지 않고서는 이 기분을 풀 방법이 없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차이커창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꼴좋게 됐군.’
졌다.
패했다.
잃은 전력이 저쪽이 더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이루려는 결과를 누가 이루어냈는가가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볼 때, 강진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냈다.
“……빌어먹을.”
제아무리 한국의 총회가 마인들을 쓸어갔다고는 하나, 그 마인들은 중국에서 전력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총회가 아무리 전력을 강화해 봐야 홍왕계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차이커창은 지금 강진호에게 먼저 백기를 들어야 한다.
그 사실이 차이커창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었다.
창왕계와 흑왕계만 없었다면 저런 반도 놈들 따위는 삼 일이면 쓸어버렸을 텐데, 이 세력의 균형이 저놈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왜 하필 한국이냔 말이다!”
만약 강진호가 러시아나 몽골, 카자흐스탄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다른 세력을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한국은 강대국의 사이에 낀 최악의 위치이지만, 지금은 그 위치가 되레 홍왕계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차이커창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빌어먹을, 진정해야지.’
지금 가장 참담한 이는 차이커창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분노할 사람은 바로 홍왕이었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차이커창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되레 담배를 잡고 있는 손이 달달 떨리는 게 눈에 보여 짜증이 더 솟구친다.
‘이 죄를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홍왕에게 이런 굴욕을 겪게 만든 것은 모두가 차이커창 그 자신의 잘못이다. 강진호의 위험성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리고 그를 제거했더라면…….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강진호가 이만큼 크기 전에 그를 포섭이라도 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차이커창이 강진호를 경시한 결과다. 그렇기에 홍왕이 굴욕을 겪고, 차이커창이 지옥을 겪고 있다.
“후우우우…….”
깊게 한숨을 내쉰 차이커창이 초조한 눈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소가 도망쳤으면, 다음에는 소가 도망치지 못하게 외양간이라도 잘 고쳐야 한다.
상황이 여기까지 와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지금이라도 최선 중의 최선을 밟아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순간, 소파에 떨어져 있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차이커창이 심호흡을 하며 전화를 향해 다가갔다.
“쉽게는 안 내준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말로 하는 전쟁이다.
* * *
[꽤나 정리할 게 많았던 모양이군, 시간이 이렇게 걸리는 걸 보면.]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차이커창의 목소리는 꽤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현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허세는.’
비슷한 입장이라 알 수 있다. 아마 지금쯤 차이커창의 머리카락은 죄다 뜯겨져 나가고 있을 것이다. 머리를 죽어라고 써야 하는 그들의 입장상, 원형 탈모는 피할 수 없는 천형이다. 이현수 역시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 맡에 머리카락이…….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정리할 게 많은 게 아니라, 여기는 꽤나 민주적이라서 말입니다. 그쪽처럼 대가리가 그냥 정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누구지?]“이현수라고 합니다. 수준 맞는 사람들끼리 놀아보죠. 사실 그쪽쯤 되시는 분이 우리 회주님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게 좀 격이 안 맞지 않습니까. 호랑이가 개와 대화를 할 수는 없으니까.”
[잘도 지껄이는군. 그런다고 내가 말려들 것 같은가?]“말려든 것 같은데?”
이현수가 가볍게 웃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분 째지는군.’
이현수는 몇 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는 기분을 받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그동안 홍왕계 때문에 마음을 얼마나 졸였던가.
이제고 저제고 홍왕계가 쳐들어올까 봐 항상 눈치를 봐야 했다. 홍왕계가 보내는 자객이 혹시 강진호나 강진호의 가족들을 노릴까 봐 이중, 삼중으로 경호도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지금 역시 전력에서는 막대한 차이가 나지만, 가용할 수 없는 전력은 전력이 아니다. 처음으로 얻어낸 우세에 이현수가 다리를 꼬았다.
“성격 나쁘네.”
“더럽지, 더러워.”
바토르와 위긴스의 냉혹한 평가에 이현수가 슬그머니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좋다. 이현수라고 했나?]“쓸데없는 힘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누군지 아실 텐데? 알고도 이러면 유치한 거고, 모른다면 무능한 거지. 어느 쪽을 택하실 생각이신지?”
[……강진호가 협상자를 잘 선택했군.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뛰어가서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야.]“환영하죠.”
이현수가 싱긋이 웃고는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슬슬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래, 아무래도…….]“됐고. 그래서 뭘 내놓을 생각이신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차이커창의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진호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진짜 한 대 치고 싶은데?’
어떻게 사람 속을 저렇게 박박 긁어놓을 수가 있을까?
만약 강진호 자신이 저런 일을 당한다면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지금쯤 서해에 뛰어들어 한국으로 돌진하고 있을 것이다.
[내놔? 우리가? 머리가 좀 잘못된 모양인데, 우리가 누군지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머리가 잘못된 건 그쪽 같은데?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르는 놈을 협상 대상으로 내세울 만큼 홍왕계에는 인재가 없는 모양이지?”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위긴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나?’라는 의미였다. 서로 화친을 한다기에 뭔가 뱃속에 칼을 숨기고 웃는 낯으로 협상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이건 숫제 장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대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위긴스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강진호의 걱정을 잠재웠다.
“놔두십시오. 잘하고 있습니다.”
“음…….”
어느 부분을 잘하고 있는 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위긴스가 그렇다니 뭐…….
“이봐, 차이커창.”
이현수의 다리가 다시 슬며시 꼬아졌다. 전화에 집중하다 보니 눈치를 볼 여유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나나 그쪽이나 피차 바쁘긴 마찬가지겠지.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서로 간 본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 깔끔하게 가지.”
[빌어먹을 놈.]항복 선언이었다.
[좋다. 깔끔하게 가지. 하지만 현실 인식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희 따위는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내미는 손은 항복 선언이 아니라 온정이다.]“끝까지 허세는 못 버리는군.”
홍왕계를 움직이는 입장에서 자존심까지 모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현수는 이 부분은 그가 감안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뭘 내놓을 텐가?”
[휴전을 원한다. 서로에 대한 불간섭. 최소 지금으로부터 1년.]이현수가 눈을 찌푸렸다.
“내 중국어가 서투른 건지, 네 머리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뭘 내놓을…….”
이번에는 차이커창이 이현수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 조건으로 이곳에 있는 놈들을 살려주지.]“살려줘?”
이현수가 눈을 찌푸렸다.
‘남은 이들이 있나?’
넘어오는 과정에서 낙오된 이들이 있다. 정확하게는 낙오보다는 실종이라 봐야 한다.
홍왕계와 충돌한 순간에 죽거나 다친 이들, 바다를 넘다가 체력이 다한 이들.
장민과 장로들이 목숨을 걸고 최대한 구출했지만, 모두 구해내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이들 중 홍왕계에 의해 구류되어 있는 이들이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포로 몇몇 때문에 이쪽이 지고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어. 미안하지만, 나는 그리 인간적이지 않은 놈이라서. 내 입장에서는 너희나 저놈들이나 다 같은 중국 놈이지. 내가 손해를 봐가며 그놈들을 구할 이유가 없는데?”
[몇몇?]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현수는 직감적으로 뭔가 계산이 틀렸다는 걸 느꼈다. 저 웃음은 허세가 아니다.
[적어도 몇 만은 될 것 같은데, 그들을 몇몇이라고 할 수 있나?]“몇 만?”
단위가 달라지는 순간, 이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개자식아, 그 사람들은 민간인이야.”
[동방에 성인군자가 납셨군. 시대가 달랐다면 공자님과 함께 역사에 남았을 텐데 말이야. 민간인은 건드리지 말라는 건가? 우리가 왜?]“이…….”
[네 말을 돌려주지. 내 입장에서는 그놈들이나, 건너간 놈들이나 다 적이기는 마찬가지야. 내가 손해를 봐가며 그놈들을 인도적으로 다뤄야 할 이유는 없는데?]이현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인들은 대부분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아직 중국에 그대로 남아 있다. 차이커창은 그걸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마인들의 가족을 협상의 주체로 끌어들이고, 그 대가를 받겠다는 거다.
“그 사람들의 수가 몇이라고 생각하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모르는군.]차이커창의 목소리에 귀기가 어렸다.
[만이 아니라 십만이라도 같다. 우리는 그놈들을 모조리 바다에 처넣고도 깔끔하게 정리할 만한 권력과 재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충분한 폭력도 함께하지. 못 믿겠다면 보여줄까?]“이…….”
이현수가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들었다.
위긴스와 바토르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저들이 이리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수는 그 자체가 힘이다. 일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독재자도 함부로 하지 못할 수이건만, 그들을 인질로 삼을 줄이야.
[남아 있는 놈들 하나하나를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그 피로 강을 이루고, 바다를 붉게 물들여 준다.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간 걸 후회하도록 말이야. 내가 못할 것 같나?]이현수의 머리가 빠르게 돌고 있을 때,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차이커창.”
[거물이 납셨군.]“원하는 대로 해봐.”
[……뭐?]강진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해봐. 대신 너도 알아야 할 거야. 나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낸다.”
[…….]“너는 네가 죽인 사람의 수만큼 죽는다. 하나하나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게. 정확하게 그 수만큼 죽여주지. 그러니 할 수 있으면 해봐. 네가 지껄인 대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음성에 차이커창뿐 아니라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휴대폰이 다시 차이커창의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