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70
#769.
조율하다 (4)
태연한 듯한 차이커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현수는 차이커창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겠지.’
어쩌면 단순한 협박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진호를 직접 본 차이커창은 그 말을 단순한 협박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강진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강함의 문제가 아냐.’
홍왕이 설사 강진호보다 몇 배는 더 강하다 해도, 이현수는 강진호의 척을 지느니 차라리 홍왕과 척을 질 것이다. 그만큼이나 강진호는 적으로 돌리기 싫은 사람이었다.
알면 알수록 더더욱.
[서로 감정적이 되어서 좋을 일은 없겠지.]“감정적?”
강진호의 반응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차이커창은 한참을 침묵한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과했다는 건 인정하지.]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시 이현수에게 협상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이현수는 그 뜻을 알아듣고는 입을 열었다.
“민간인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너희에게는 그런 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아니야.]이현수가 머리를 짚었다.
이건 꽤나 골치가 아픈 문제였다. 저들이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들을 억류하기만 해도 한국으로 넘어온 마인들이 심하게 동요할 것이다.
‘웬만하면 무시해 버리고 싶지만…….’
강진호의 성향도 무시할 수 없다. 가족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강진호가 아닌가. 결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이들이 가족 때문에 고통받는 꼴을 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홍왕계라는 놈들이 하는 짓이라는 게, 민간인을 인질 삼아서 평화협정을 맺겠다는 건가?”
[그러겠다면 어쩔 텐가?]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위긴스도 딱히 대응책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
낮게 한숨을 쉰 이현수가 전화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많은 이들을 모두 확보할 수는 없어.”
[시간 끌 것 없어, 이현수. 상황은 너나 나 모두 알고 있지. 우리는 이미 확보를 시작했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차이커창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이어 말했다.
[협정을 맺겠다면 그들을 모두 한국으로 보내주지. 원하는 이들은 모두 무사하게 한국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법률적인 문제도 이쪽에서 처리해 주지. 아주 편안한 서비스로 모실 수 있다는 소리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이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벌어질 일은 너무도 빤하지 않은가.
이현수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협정을 받아들이면 그쪽은 알아서 해결해 준다는 건가?”
[그렇습니다.]차이커창의 어투가 바뀌어 있었다. 악감정은 버리고, 강진호를 대우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제안입니다.]“그렇군.”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럼 협상은 없던 걸로 하지.”
[네?]차이커창의 목소리는 살짝 멍했다.
“못 들었나? 협상은 없던 걸로 하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강진호 씨, 허세를 부리는 건 좋지만, 저는 그런 허세에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가족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렇게 고생해 가며 데려간 마인들이 참지 않을 텐데요.]“참으라고 할 생각 없어.”
침묵이 돌아왔다. 그러자 강진호는 그 침묵에 친절하게 화답해 주었다.
“돌아가고 싶은 놈들은 돌아가라고 하면 돼.”
강진호가 태연하게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게 있어 저놈들은 반드시 데리고 와야 할 이들이 아니야. 따르겠다니 데리고 온 거다. 따르지 않겠다면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 아니, 당장 수가 줄어들면 환호할 사람이 여기 몇 보이는군.”
“……다 환호할 것 같습니다만.”
이현수가 추임새를 넣었다.
“계산 다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차이커창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인들의 가족들을 건드렸을 경우, 그 리스크는 강진호만 지는 게 아니다. 차이커창 역시 리스크를 피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고 복수귀가 된 이들이 중국으로 다시 대량 유입될 경우에 그 혼란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물론 마인들의 무위를 감안하면 벌일 수 있는 일은 한정되겠지만, 그것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흑왕과 창왕을 상대하는 와중에 등 뒤로 자살특공대가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우리는…….]“돌아갈 이들을 걱정하고 있나?”
강진호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돌아갈 이들이 아니라 돌아가지 않는 이들을 걱정하는 쪽이 나을 거야. 그들이 결국 네 목에 이를 틀어박을 날이 올 테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다.
가족을 잃고 복수를 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무서운 게 아니다. 가족을 잃고 복수를 하기 위해 한국에 남는 이들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한을 씹고 또 씹으며 홍왕의 목을 딸 날만을 기다릴 테니까.
[그렇다 해도 이쪽에서 무조건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때로 자존심은 목숨보다 중요하니까요.]“맞는 말이지.”
강진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들을 넘겨주는 대가를 치르지. 하지만 이쪽에서 받아야 할 것도 받겠어. 계산해 봐, 어느 쪽이 얼마를 더 받아야 하는지. 이건 너희 몫이겠지.”
[알겠습니다.]“조금 뒤에 다시 통화하지.”
강진호가 손을 뻗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자 이현수들이 강진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잘하시면서!”
“훌륭하십니다.”
“소 뒷발에 쥐 잡은 건 아니고?”
마지막 바토르의 말은 무시하고서라도 협상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영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기분이군.’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게 어색한 게 아니다. ‘적’과 대화를 한다는 게 어색하다. 지금까지는 적어도 적을 상대할 때, 그의 대화란 상대를 몰아붙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게다가 협정이라니.
강진호가 가만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협정이라…….’
좋게 보자면 과거의 ‘적은 죽이고, 아군은 보호한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 조금은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저 힘이 없는 것에 불과했다.
강진호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면 이런 협정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으로 쳐들어가 홍왕의 목을 따버렸겠지.
― 부서진다. 네가 벌여온 일들이 네 목을 죌 거야. 그리고 그게 너를 죽이겠지.
적천마존이 한 말이 강진호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결국은 약하기 때문인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인간의 사고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언젠가는 더 강한 자의 폭거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지금 강진호는 홍왕의 폭거에 잠시 벗어나 있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유지가 될까.
그가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강대한 세력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대가로 잠시의 휴식이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결론은 빤하군.’
강해져야 한다.
어떻게든.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는 맡기지.”
“고생하셨습니다.”
이현수와 모두는 강진호가 자리를 비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강진호가 해야 할 일은 방향 설정이다. 디테일한 부분은 그들이 챙기면 된다.
밖으로 걸어 나가는 강진호를 보며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휴대폰은 주고 가시지.”
그나마 번호를 외워둔 게 다행이다.
방향이 결정되면 다음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가 문제일 뿐,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해야 하는가가 정해지면 얻어낼 건 최대한 얻어내고, 내주어야 할 건 최대한 아끼는 과정만이 남을 뿐이다.
전체적인 방향에 합의한 이현수와 차이커창은 세부 조율을 내일로 넘기기로 하고, 일차적인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지난한 1차 협상이 끝나고서야 이현수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좀 긴장이 풀리네요.”
“쓸데없이 힘이 드는 일이지.”
위긴스는 커피를 이현수에게 내밀었다. 이현수가 황송한 얼굴로 위긴스가 내민 커피를 받아 들었다.
한 모금 커피를 머금은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설탕을 가져와 커피에 때려 넣었다.
“너무 달게 먹는 것 아닌가?”
“당분이 부족해서요.”
“그렇긴 하겠지만. 커피는 블랙으로 즐기는 게 제일이지.”
“영국인에게 식성에 대한 지적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네에게 들은 것 중 가장 통렬한 일격이로군. 반박을 할 수가 없어.”
위긴스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이현수는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머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어떤 부분이?”
커피 잔을 내려놓은 이현수가 담배를 꺼내 들었다. 위긴스와 바토르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이현수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저쪽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은 협상밖에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고 전격적으로 협상에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서?”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요.”
바토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커창은 그렇다 치고, 홍왕의 자존심은 태산 수준이다. 나도 저들이 이리 쉽게 연락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현수가 위긴스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은 예상하셨습니까?”
“너는 너무 책을 많이 봤어.”
“……예?”
위긴스가 피식 웃었다.
“상대의 반응을 완전히 예상해서 손바닥 안에 가지고 논다는 것은 그냥 꿈같은 이야기야. 나폴레옹도, 한니발도 그런 건 못했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환상적인 모사들의 이야기는 그냥 만들어진 거야. 그게 아니면 우연과 우연이 겹친 일을 적당히 포장하고 넘겼든가.”
“음…….”
“상대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상황이 모두 선택에 관여하는데, 그 선택의 시기를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느냐. 결과는 가늠할 수 있어도 시기는 불가능하지.”
“그렇겠죠.”
“하지만 결과가 나온 이상 해석은 가능하지. 늦어져야 할 선택이 빨라졌다면, 그 이유가 있겠지.”
“이유라면?”
위긴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자존심 때문이라도 늦게 연락을 했을 거라고.”
“예.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그 자존심을 꺾었다는 뜻이겠지. 딱히 대수롭지도 않은 일 아니냐.”
위긴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둘 중 하나겠지. 자존심을 버려서까지 빨리 협상을 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일이 생기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저들이 우리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게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를 높이 평가했든가.”
위긴스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 쪽일 것 같으냐?”
“전자겠죠?”
“내 생각도 그렇다.”
턱수염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 조금 더 경쾌해졌다.
“상대가 급하다면, 우리는 급할 것이 없지. 느긋하게 약점에 소금을 뿌려보도록 하실까?”
“성격이 나쁘시네요.”
“이래 봬도 신사라고 불린단다.”
“설마요.”
이현수가 가볍게 웃으며 커피를 머금었다.
저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그 약점을 쑤셔주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이현수는 강진호가 중국에 가 있는 동안 그가 받은 스트레스를 모조리 차이커창에게 풀기로 했다.
‘죽어봐라.’
“악당 같은 얼굴이군.”
“그야 악당이니까요.”
사특하게 마주 웃는 사제지간을 보며 바토르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마교 놈들이 더 순수했지.’
여기는 마교보다 더한 마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