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72
#771.
발전하다 (1)
신뢰란 어디에서 오는가.
신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신뢰를 가지지는 못한다.
스스로 살아온 삶의 궤적,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하는 방식, 타인에게 보여준 태도와 능력.
그 모든 것이 신뢰에 영향을 미친다.
타인을 지켜본 이들은 그가 보여준 것들을 통해 그 사람을 신뢰할지, 않을지를 결정한다.
다른 이에게 신뢰받을 모습을 자연스레 갖춘 이들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신뢰를 쌓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누군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진호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였다.
굳이 타인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신뢰가 절로 쌓인 경우였다.
그렇기에 강진호는 알지 못했다.
신뢰를 잃어버린 인간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말이다.
“또 어딜 나가는데?”
“…….”
사람이 옷을 입는 것만으로 욕을 들어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강진호였다.
“이번에 나가면 언제 들어오는데? 이달 내로는 돌아오는 것 맞니?”
“…….”
강진호가 무척 억울하다는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여전히 곱지 못했다.
“표정이 영 그러네? 우리 아들,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사람이면 그러면 안 되지. 세상에, 군대에 있는 애들도 이틀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엄마한테 전화하고 한다는데, 우리 아들은 해외에 가더니 열흘을 연락을 안 하네. 누가 보면 전파도 안 통하는 오지 탐험이라도 간 줄 알겠다. 그렇지?”
“모든 것이 소자의 불찰입니다.”
“안다는 건 참 좋은 거란다. 그런데 알고도 바뀌는 게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니?”
“……그렇습니다.”
강진호는 대충 셔츠를 쑤셔 넣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대로 조금만 머뭇대면 다시 ‘앉아보렴’이 나올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한다.
“뭐야? 오빠 또 나가?”
집 안에 마귀가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눈을 살짝 치켜뜨고 다가오는 강은영을 본 강진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넌 출근 안 해?”
“오빠.”
“응?”
“사람이 항상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야. 우리는 시즌이란 게 있다고. 시즌과 비시즌을 나눠야 시즌이 돌아오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거지.”
“그 비시즌이 좀 오래가는 것 같다?”
“네, 오라버니. 동생은 최대한 열심히 일을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습니다. 그동안 오라버니는 가족과 인연을 끊으시고 해외여행을 즐기시지요.”
“…….”
어설프게 물어뜯었다가 본전도 되찾지 못한 강진호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전화할걸.’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는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전화 몇 통만 했다면 이런 지옥을 겪을 일이 없었을 텐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라지만, 이번 후회는 너무도 뼈아팠다.
강진호는 깊은 한숨을 쉬고 반격을 시도했다.
“어머니.”
“응?”
“제가 무심했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뢰를 잃은 인간의 말은 공허한 법이다.
“퍽도 그러겠다.”
“한두 번 속나.”
“…….”
비틀거리며 강진호가 현관으로 향했다.
“들어오긴 하니?”
“……저녁까지 들어오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
탁.
강진호가 밖으로 나가자 백현정이 슬쩍 강은영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봐줄까?”
“안 돼! 엄마!”
강은영은 단호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니 어쩌니 그거 다 거짓부렁이야. 세상에 연락 안 하고 사는 가족이 얼마나 많은데. 가족이 남보다 못한 경우도 흔해. 엄마도 알잖아!”
백현정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번에도 순순히 넘어가 주면 저 무심한 인간이 또 어떨 거 같아? 나중에는 먼저 연락 안 하면 자식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게 될걸?”
“그건 안 되지!”
“이 기회에 버릇을 고쳐야 돼!”
“그래!”
단호히 주먹을 움켜쥐는 백현정을 보며 강은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우우우우우웅.
경쾌한 엔진음과 함께 붕붕이가 총회의 정문을 통과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지나가던 이들이 다들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
강진호가 힘없이 인사를 받고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자 지켜보던 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힘이 엄청 없으신 것 같은데?”
“이번에 부상을 크게 당하셨다잖아.”
“나도 그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나는 아직도 안 믿긴다. 저 사람이 누구한테 당해서 부상을 입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세상은 넓은 거지.”
“그럼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으신 건가?”
“그렇겠지. 중환자실에 계셨다잖아.”
강진호는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청력은 이런 작은 소리도 남기지 않고 잡아냈다.
‘그랬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저들의 말대로였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의 몸은 이미 거의 회복되었다. 그의 회복력은 바토르조차 상회한다. 마공은 철저하게 그의 몸을 지키고 회복시켰다. 이제 외상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손상된 내부가 아직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집이었다.
어머니와 강은영은 집요했다.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주던 아버지도 ‘자식놈 키워봐야 해외여행만도 못한 것을. 내가 죽어야지’를 중얼거리며 멀리서 대포를 쏴댔다.
‘말라 죽는다.’
지은 죄가 있으니 변명도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강진호가 무심했던 것도 사실 아닌가. 강진호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강진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가족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이다.
결국 그냥 생짜로 살려 달라고 빌 수밖에 없다는 건데…….
‘뭘 하긴 해야겠는데…….’
강은영이야 알 바 아니지만, 노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강진호는 그 방법을 고민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강진호는 뜻밖에 방문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로 여기에 모여 있나?”
방 안에는 이현수를 위시로 한 바토르와 위긴스, 그리고 장민이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그가 올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어느새 아침에 여기 출근하는 게 당연한 일과가 되었구나.’
새삼스레 직장인 같은 마음을 느끼며 강진호가 상석에 앉았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담되는데.”
흔치 않은 일이다. 중요한 일이 터진 게 틀림이 없었다.
“나쁜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기는 좋은 일인데…… 시기가 좀 미묘하게 됐습니다.”
“음?”
미묘하기는 이현수의 말이 더 미묘했다. 좋은 일인데 시기가 나쁘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야기해 봐.”
“말씀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현수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영상 통화?’
화면에 이현수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봐서는 영상 통화를 거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보여주겠다는 것 같은데, 굳이 강진호가 눈으로 확인해야 할 사람이…….
“엇?”
강진호의 입에서 호성이 터져 나왔다. 웬만해서는 놀란 티를 내지 않는 강진호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 건너편에 보이는 얼굴을 확인한 강진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놀랄 수밖에.
강진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그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잘 아는 사람이어서 놀란 게 아니다.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라 생각한 사람이 화면에 보이니 놀란 것이다.
“이명환?”
강진호의 말에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고는 전화를 강진호에게 넘겨주었다.
“이명환 맞나?”
[그렇게 됐습니다, 회주님.]이명환이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강진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명환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안도감과 죄송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과 희망.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부끄럽게도 잡혀 버렸습니다.]“잡혀?”
[네. 보시다시피.]이명환이 휴대폰을 돌려 뒤를 비춰주었다. 호텔방으로 보이는 곳에 이명환과 함께한 결사대들이 다들 매우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척이나 대접을 잘 받고 있어서 좀 얼떨떨하기는 합니다. 당장 모가지가 잘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미친놈들이 왜 이러는지는 저도 잘…….]강진호는 웃어버렸다.
“아니. 그걸로 됐다.”
체증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정신이 든 이후, 강진호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든 것은 이명환의 생사였다.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무거워지는 가슴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강진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말이다.
과거의 적천마존이었다면 수하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백 명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것도 주저 않는 사람이 적천마존이었으니까.
불과 십여 명.
이들의 죽음에 가슴이 무거워진다는 것은 강진호가 적천마존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반면에 강진호의 힘으로는 주변의 모두를 지킬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강진호가 아니라 적천마존이 홍왕을 상대했다면, 굳이 그들이 강진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강진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강진호가 적천마존이 아니라 강진호이기 위해서 희생된 목숨이었다.
갚을 수 없는 빚.
어쩌면 강진호의 고집 때문에 생겨난 희생,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희생이었다.
그런데 희생되었다고 생각한 이가 떡하니 살아서 연락을 받고 있으니, 아무리 강진호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뭐 고문이라도 받는다거나, 엄청 고생을 하고 있으면 연락을 받아도 제가 면이 좀 설 것 같은데…… 여행지 호텔에서 죽치는 기분입니다. 밥도 잘 나오고…….]강진호는 웃어버렸다.
‘만만치 않네.’
차이커창이 왜 이들을 살려두고 잘 대접하는지는 너무도 빤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물어야만 하는 함정이다.
“고생 많았다. 금방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아닙니다, 회주님. 딱히 고생이랄 게 없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혀를 깨물어서라도 회에 피해를 끼치면 안 되는 건데, 목숨이 아까워서…….]“당연히 아까워야지.”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도 아깝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조금만 버티고 있어.”
[예.]강진호는 전화를 끊고는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이현수가 매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회주님, 이게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냉정하게 생각을 하시는 게…….”
“이현수.”
“네!”
강진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멀쩡히 데려와. 어떤 조건이든 수용한다.”
“…….”
나가리가 되었다는 얼굴로 이현수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째 뭐가 잘 풀린다 싶었다.’
귓가로 차이커창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