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78
#777.
안정되다 (2)
의문 어린 눈동자.
강진호는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를 보며 이런 눈빛을 보내서는 안 된다.
살짝 꺾어지는 고개.
그리고 좁아지는 미간.
그 단순한 액션만으로도 강진호는 그의 귀에 들려올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
“…….”
“누구신지?”
“…….”
강진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
“아니, 일단 누구신지? 저 아세요?”
“미안하다니까.”
주영기는 강진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났다. 그러니까 성함이 강……진구?”
“강진호다.”
“그랬지, 그런 이름이었지……. 미안하네, 젊은이. 내가 이제 늙어서 그런지 오래전에 본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을 하지 못하거든.”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말도 못하겠고…….’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은 강진호보다 연락이라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중원에 있을 당시에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 년에 한 번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여기는 한 달만 연락을 안 해도 인연을 끊은 것처럼 구니 이거야 원…….
“그래서 무슨 일로?”
“친구를 보러 왔습니다만.”
“친구, 친구라……. 그래, 젊은이. 앉아보게. 내가 친구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구만.”
강진호는 주영기가 가리키는 곳에 앉았다.
그러자 주영기가 힘없이 강진호의 건너편에 앉고는 턱을 괴며 말했다.
“친구, 친구…… 그래, 좋은 말이지. 한때는 나에게도 친구라는 게 있었다네. 정말 좋은 친구였지. 군대에서 만난 친군데, 그 친구에게는 정말 모든 것을 다 해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지…….”
“그…….”
“그 친구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참 좋은 인연이었을 텐데……. 이런, 내가 너무 주책이었군. 그래서…… 자네가 찾는 친구라는 사람이 누구?”
“미안하다고.”
주영기가 가만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과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세상에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 이 새끼야.”
“…….”
주영기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래, 좋다. 다 좋다, 이거야. 사람이 바쁘면 연락을 못할 수도 있지. 사하라 사막에 다소곳이 자라나 있는 오아시스처럼 빈약하디빈약한 너의 사회성을 감안한다면, 그런 일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안해야지, 내가. 그런데!”
주영기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강진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마존이 상대를 앞에 두고 물러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여 친절히 톡을 보냈건만, 읽씹을 해? 그것도 무려 세 번 연속으로?”
“…….”
“자, 잘 들어라, 친구야. 아니, 친구였던 자여. 삼연읽씹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의 끝을 의미한다. 그건 지금까지와의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앞으로 내게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선언과도 같다. 이해하겠나?”
“그렇게까지나?”
주영기가 다짜고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연 끊자는 거죠.”
“들었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강진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문자 쪼가리 온 거 몇 번 답장 안 했다고 인간관계가 파탄 날 줄이야.
대체 지금 세상은 얼마나 디테일한 배려가 필요하단 말인가.
“……내가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실수?”
주영기가 손을 쫙 펴서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잘 들어라, 친구. 아니, 친구였던 자여.”
“그것 좀 그만…….”
“실수라는 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일어난 일을 말한다. 네가 한 건 실수라고 부를 수 없는 일이지. 읽씹은 실수가 아니다!”
‘사람이라도 죽였나?’
메시지 세 번 보고 답장을 안 했다는 이유로 살인자처럼 매도당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를 고민하는 강진호였다.
“그래, 이제 와 옛 온기를 다시 찾아온 이유가 뭐지, 여행자여?”
“……거기까지만 하자.”
어지럽다.
주영기가 그런 강진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너답다고 해야 할지.”
“두 번만 나다웠다가는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 판이다.”
“암, 여기저기 시달리고 있겠지.”
“음…….”
“그게 다 니 처신의 문제다. 인간관계란 건 화분 같은 거야.”
“화분?”
“지속적으로 돌보며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줘야 꽃이 피는 거지. 한 번 물이랑 영양제를 듬뿍 줬다고 ‘앞으로 한동안은 방구석에 처박아놓고 신경 안 써도 되겠지’라고 여기는 순간, 다 말라서 죽어버린다.”
강진호는 무척이나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주영기라 너무 어울리지가 않는다.
“어…….”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아니까, 그냥 하지 마라.”
“응.”
강진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라는 건 성장하는 거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지금의 주영기와 처음 만났을 때의 주영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허세와 자존심밖에 없던 주영기는 어느새 강진호에게 이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많이 달라졌을까?’
자신할 수는 없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니까. 강진호 스스로는 많이 달라졌다고 여기고 있지만, 정말 많이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 달라짐의 방향이 과연 올바른 쪽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표정하고는.”
주영기가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자집에 왔으면 피자나 먹어야지. 너 보나마나 밥도 안 먹고 왔지?”
“어……. 음.”
“뭐 먹을래?”
“유민이 오기로 했으니까 오면 먹을게.”
“박유민, 박유민……. 야, 인마. 유민이 닳겠다. 적당히 찾아라. 마누라냐?”
“마누라는 무슨.”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이상한 기분이네.’
사고를 치고 온 자식에게 욕을 하면서도 밥은 처먹고 자라고 소리치는 어머니를 보는 느낌이었다.
최근 들어 총회의 일에 집중하면서 친구들을 볼 일이 줄어들었다. 어쩌면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든가, 그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보았을 때, 조규민이나 이현수가 이들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이 주영기나 박유민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친구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감각은 그들에게서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다르니까.
“저기 오네, 저기. 저 새끼도 호랑이여.”
주영기의 너스레에 강진호가 미소를 띠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박유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어, 유명인.”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요즘에 TV 나오더라?”
“새삼스럽게.”
“카메라발 더럽게 못 받던데? 나는 무슨 고블린인 줄.”
박유민이 울컥한 얼굴로 주영기를 보자 주영기가 ‘아, 뜨거라’ 하며 뒤로 물러났다.
“얘가 요즘 패고 죽이는 게임 하더니, 성격이 나빠졌어. 눈 좀 봐, 저거.”
“원래는 더 죽이는 게임 했거든!”
“그럼 그런 거지. 성질은.”
“안 그래도 화면에 나오는 얼굴 볼 때마다 괴롭다.”
박유민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로 찍은 얼굴과 실물이 다른 사람은 꽤나 존재하지만, 박유민은 그중에서도 이상하게 카메라발이 안 받는 사람이었다.
“뭐 먹을래?”
강진호의 말에 박유민이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주영기는 그새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아니지. 다 모였으면 여기서 피자를 먹을 일이 아니지. 잠깐 기다려 봐.”
주영기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나가자.”
“영업이 아직 안 끝났는데?”
“내가 사장인데,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거지! 기다려 봐!”
주영기가 당당한 걸음으로 주방 안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진호와 박유민은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혼날 것 같은데.”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금세 주방 안에서 고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나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가게를 버리고 나가? 니가 그러고도 사장이야?”
“내, 내가 매번 이러는 게 아니잖아. 휴일도 없이 일하는데, 간만에 친구들이 왔으니까 오늘만 좀 봐달라는 거 아냐.”
“니가 휴일이 왜 필요해! 매일 하는 것도 없이 빈둥대면서 주문도 제대로 못 받는 게 휴일이 왜 필요하냐고! 안 그래도 손님 넘쳐 나서 정신없는데 어딜 가, 가긴!”
“애들 있잖아. 내가 말 잘해놓고 갈게. 절대 홀에서 문제 안 생기도록 할 테니까, 이번만. 응? 이번…….”
“나가! 가서 오지 마! 당장 나가!”
“아니, 그…….”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박유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주영기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주방에서 나왔다.
“가자!”
“……응.”
“내가 마음먹으면 가는 거지, 뭐 별거라고!”
“영기야.”
“왜?”
“다 들렸어.”
“……그래?”
주영기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호랑이다.”
진정성 가득한 목소리였다.
맥주잔을 내려놓은 주영기가 힘없이 뇌까렸다.
“토낀 줄 알았지. 아니, 솔직히 은근히 여우 같은 면이 있다고는 생각했어. 그런데 그것도 매력이잖아?”
“……사람에 따라.”
“그런데 토끼 가면을 벗겼더니,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가 나온 거지. 바가지로 긁는 수준이 아냐. 대패로 미는 수준이다. 등가죽 다 벗겨지겠다.”
엄살을 떤다기에는 너무 비장한 어투였다.
박유민은 겪어본 적 없는 일에 어찌 공감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해하고, 강진호는…….
“……이해한다.”
무려 이 사건에 공감하고 있었다.
호랑이 같은 여자 친구에게 시달릴 때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강진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비슷한 수준까지는 간 것 같은…….
‘여, 연락해야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고 욕을 퍼먹는 건 그나마 낫다. 최연하가 날을 세우고 긁어 대기 시작하면 10분도 안 돼서 녹다운되고 말 것이다.
“그래도 좋아 보이는데?”
박유민이 웃으며 말하자 주영기가 입을 오물거렸다.
“그러니까 이게 어떤 기분이냐면…….”
“응?”
“설명하기가 엄청 힘든데…… 그러니까, 내가 생크림 케이크를 엄청 좋아한다고 치자고.”
“응.”
“그런데 건포도는 엄청 싫어한다고.”
“…….”
“그런데 엄청 맛있는 케이크에 건포도가 알알이 박혀 있는 기분이야. 케이크가 맛있어서 먹으면 좋긴 한데, 이 건포도가 사람을…….”
“이해했다.”
박유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좋긴 좋아.”
주영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성격이나 되니까 나 같은 놈이랑 사귀어주지, 웬만한 여자가 나를 감당하겠냐?”
“네가 뭐 어때서?”
“됐어, 인마. 나도 날 알아. 애새끼가 허세만 가득 차서는 실속이 없잖아.”
“실속이 없는 것치고는 너무 잘나가던데? 가게에 손님도 가득하고.”
“내가 전부 한 건 아니니까.”
주영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달라지긴 했어.’
일전의 주영기였다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라며 코를 천장까지 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응.”
“결혼할까 생각 중이야.”
강진호와 박유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