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79
#778.
안정되다 (3)
“결혼?”
박유민이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의외의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겨, 결혼이라고?”
“응.”
하지만 박유민의 반응과 다르게 주영기는 너무도 태연했다. 당연히 나올 말이 나왔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 말이다.
“네, 네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 이야기가 나와?”
“내 나이가 왜?”
“아직 결혼 이야기가 나올 나이는 아닌 것 같아서.”
“결혼에 적당한 시기가 따로 있냐?”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박유민이 우물우물하자 주영기가 빙그레 웃었다.
“이르긴 하지?”
“조금 그런 것 같아, 내 생각에는.”
“니 생각이 그러면 이른 게 맞겠지. 내가 또 강진호 말은 신뢰를 안 하지만, 우리 박유민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는 사람 아니냐?”
강진호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박유민을 칭찬하든, 나를 까든 둘 중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너 깔 건데, 괜찮겠냐?”
“……다시 생각해 보자.”
주영기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박유민에게 고개를 돌리는 주영기의 표정이 온화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강진호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인간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좀 이른 것 같은 느낌도 있는데, 진지하게 고민 중이기는 해.”
“왜?”
“나는 혼자서는 사람이 안 되거든.”
강진호와 박유민이 다시 입을 쩌억 벌렸다.
주영기의 입에서 저런 대단한 말이 나올 줄이야. 자신을 저리 잘 파악하기도 힘들 텐데. 다른 평범한 사람도 못하는 일을 지금 주영기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내가 잘하는 게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빼면 젬병이거든. 내 손으로 양말 하나 제대로 못 빠는 사람이라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해.”
박유민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결혼을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를 해줄 사람이 필요해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
“으응?”
“내가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하는 거야. 내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바라면, 결국에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 때문에 문제가 생기잖아.”
“오…….”
주영기가 감탄한 듯 말했다.
“역시 박유민.”
“진호야, 너 뭘 잘못했길래 얘가 이러냐?”
“죽을죄를 졌지.”
정말 죽을죄를.
주영기가 강진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긴 아네.”
“……살려줘.”
“좋다, 이 정도 했으니 용서해 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감사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푹 숙이자 주영기가 가볍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달라. 그런 거지. 나는 조금 험하게 살았잖아.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뱃속에 버리지 못한 허세가 가득 남아 있거든.”
“……평생 안고 갈 것 같은데?”
“허세 빼면 주영기에게 뭐가 남는가.”
“닥쳐, 이것들아. 여하튼 그 허세가 걔 앞에서는 나오지 않아. 그러다 보니 같이 뭔가를 하면 좀 더 잘 생각하게 되고, 나를 좀 더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 그래서 생각하는 거야. 세상에 수많은 여자가 있다지만, 이 이상 내가 좋아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을 것 같거든. 그럼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거지.”
강진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야.’
확실히 정수연을 만난 이후로 주영기는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사업도 번창하고 있다. 2호점을 낸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3호점을 계획하고 있다. 너무 급격한 확장 같아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손님으로 가득 찬 2호점을 보니 3호점을 내겠다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주영기에게는 원래 사업적 수완이 있었다. 하지만 욱하는 성격과 마초적인 스타일이 발목을 잡았다. 그 부분을 정수연이 억제해 준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가 주영기의 말을 긍정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확고하네.’
주영기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스스로 가장 옳은 길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결국 인생이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다 보니 때로는 잘못된 결정도 할 수 있고, 때로는 후회도 한다. 하지만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언제나 옳은 선택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지금 주영기가 결혼을 입에 담는 것은 그저 결혼만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닐 것이다. 그가 그린 인생의 궤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혼이라는 것을 지금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겠지.
“뭐, 이거야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왜 안 중요해? 인생에 있어서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나는 미룰 수 있는 일이잖아. 우리 박유민이가 TV에 나오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 크, 내가 그거 보면서 얼마나 뿌듯하던지.”
“원래 나왔었어.”
이전까지 주영기는 E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박유민이 유명한 프로게이머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갑다 하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이번에 박유민이 다시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며 본인이 더 흥분하고 있었다.
“TV 나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 그리 대단할 거 없는 일이라니까.”
“아니야. 대단한 거지. TV는 원래 출세한 사람만 나오는 거잖아.”
“너는 대체 몇 년도에 살고 있는 거냐?”
박유민이 계속 딴지를 걸었지만, 주영기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식이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한없이 뿌듯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TV에만 나오는 거면 이런 말 안 해. 기사도 엄청 나오더만! 잘한다고, 잘한다고! 내가 뭐 알겠냐? 걔들이 잘한다 그러면 잘하는 거지.”
강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서울에 있는 술집이 맞다.
‘시골에 내려온 줄 알았네.’
명절날 친척들을 만났을 때나 나올 만한 대화가 친구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게 어색하기는 하지만, 주영기가 너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차마 딴지를 걸 수가 없다.
“인터뷰도 얼마나 잘하는지.”
“하지 말라고! 그만 좀 하라고!”
박유민은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강진호는 가볍게 웃고는 박유민을 도와주었다.
“성적이 잘 나오고 있는 모양이던데?”
“……어. 음, 괜찮게 나오기는 해. 그런데 여전히 어렵지.”
박유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전히 긴장되고, 여전히 떨리고, 게임하는 와중에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냥 정신없이 하다 보면 이기거나 지는 거라…… 아직 갈 길이 멀어.”
“원래 그랬지 않아?”
“…….”
“음?”
“……그래. 원래 그랬다, 원래.”
박유민이 어울리지 않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된 거잖아.”
“옛날보다는 잘해야지, 내 나이가 몇인데. 이 동네에서 내 나이면 엄청 노장이야. 예전처럼 하면 절대로 예전처럼 못해.”
박유민이 확고하게 말했다.
“옛날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 더 잘해야 하고, 그래야 겨우 따라갈까 말깐데.”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은 박유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금 박유민에게도 자신만의 확실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을 따라가기 위해 지금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확고한 계획이라…….’
강진호에게는 없는 것이다.
목표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목표를 어떤 식으로 이루어 나갈지에 대한 명확한 과정은 강진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너는 표정이 왜 그러냐?”
“음?”
“세상의 모든 불만은 네가 다 가지고 있다는 얼굴인데?”
“얼굴?”
강진호가 손을 들어 얼굴을 주물렀다.
굉장히 이상한 말이었다. 강진호는 표정으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누군가 자신의 표정만을 보고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인생에 걸쳐 흔히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고 상태를 짐작하는 건 겨우 청마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굴이라고 했다고 얼굴 주무르는 것 봐라. 인마, 그게 표정 하나만 보고 하는 말이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런 거지.”
“…….”
강진호가 어색하게 얼굴을 주무르던 손을 뗐다.
“쯧.”
주영기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강진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말해봐라. 해외여행도 다니시고, 잠수도 타시는 우리 친구분께서 무슨 고민이 있는지 이 형님이 한 번 들어주지.”
“아니, 뭐, 딱히…….”
주영기의 고개가 박유민에게로 돌아갔다.
“유민아.”
“응?”
“우리 친구분께서는 본인의 고민을 우리에게 털어놓기는 싫으시단다. 영 못 미더운 모양이시지.”
“음, 하긴 그럴 만도 해.”
박유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호는 알아서 잘하잖아. 굳이 우리가 뭐 돕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데, 고민 이야기 같은 거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렇지? 내가 괘애애앤~한 걱정을 했네. 알아서 잘하시는 분에게 내가 무슨 상담을 하겠다고. 아이코, 내가 오버를 했네. 오버를 했어.”
“그래. 이건 네가 좀 너무 나갔다.”
강진호는 멍한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주영기야 그렇다 치고, 박유민까지 저리 쿵짝을 맞추며 사람을 압박할 줄이야. 과거의 그 순수하고 착하던 박유민은 어디로 가버리고, 이런 능구렁이가 앉아 있단 말인가.
“아니, 이게…….”
“괜찮아, 괜찮아.”
“에헤이~ 됐어, 됐어! 뭘 부담스럽게 또 말하려고 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괜찮다니까. 우리가 또 그런 걸로 마음 상해하는 좀생이들은 아니잖아. 넣어둬, 넣어둬.”
“응, 진호야. 정말 괜찮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강진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영기와 박유민이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빼는 시늉을 했다.
“두 번 물어봤다가는 사람 죽이겠네.”
“영기야, 진호가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러게 왜 그런 걸 물어봤어.”
“나는 걱정돼서 그랬지.”
강진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가 제대로 연락하지 못한 사이에 이 둘은 끝도 없이 호흡을 맞춰온 모양이었다. 아주 쿵짝이 제대로 맞는다.
“그런 게 아니라…… 이게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운 일이라 그래.”
그 말을 들은 박유민이 자세를 고쳤다.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건만, 강진호에게 뭔가 고민이 있기는 일다는 결론이 나와 버리자 조금 진지해질 모양이었다.
“심각한 거야?”
“모르겠다.”
강진호도 한숨을 내쉬었다.
“방향성의 문제기는 한데, 이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무슨 소린데?”
“말로 하기는 어렵다니까.”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조금 풀어보면 그런 거야.”
강진호는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머릿속의 고민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둘은 강진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그럼 내가 달라져야 하는 걸까?”
조금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