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81
#780.
안정되다 (5)
왜 나는 발전하지 못하는가.
왜 미리 전화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을 했으면서도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한단 말인가.
강진호는 순간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져들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에!
최연하가 전화를 걸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놓고도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통한의 실수.
뼈가 시린 실수였다.
액정으로 다가가는 강진호의 손길이 답지 않게 머뭇대고 있었다.
‘그냥 내일 받을까?’
십만의 대군을 앞에 두고도, 그 강하던 정파의 연합 공격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단 한 번 물러서지 않고,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모르던 마존이 지금 전화를 앞에 두고 물러서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두렵지 않다. 아무리 강한 힘이 그를 침탈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고, 싸울 수 있다면……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저항할 수 없는 종류가 아니다.
살짝 심호흡을 한 강진호가 가만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연결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기다려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강진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최연하 씨?”
조심스레 먼저 말을 걸어보지만, 답변이 오지 않는다.
침묵.
낮은 침묵이 수화기 너머로 넘어온다.
강진호의 몸이 기름이 말라 버린 기계처럼 거걱댄다.
‘아무것도 아닌 침묵이 사람을 이리 몰아갈 수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앞으로 누군가를 괴롭힐 일이 있으면 이건 꼭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진호가 헛기침을 했다.
“전화받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침묵이 끊기지 않는다. 강진호가 한 번쯤 말을 더 해봐야 하나를 고민하던 순간, 휴대폰 너머에서 을씨년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알긴 하는데, 그걸 말로 정확하게 하기는 어렵네요.”
[뭐라고 생각해요?]“……이성?”
형식은 질문과 답변인데, 왜 회초리를 맞는 느낌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성은 얼어 죽을 이성!]장르가 순간적으로 하드보일드에서 액션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최연하의 목소리 톤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빠른 템포에 맞춰서 강진호의 심장도 동시에 바운스를 시작했다.
[이성이 있다는 양반이 왜 말귀를 못 알아먹지? 왜? 내가 그만큼 연락 좀 하라고 하는데, 왜 연락을 못하죠? 우리 엄마 집에 있는 뽀삐도 욕을 세 번 들어먹으면 말귀를 알아먹는데, 왜 강진호 씨는 그만큼 말을 듣고도 이해를 못하시죠? 왜? 왜?]“……죄송합니다.”
[당신, 정말 이러기예요?]“아니, 그게…….”
강진호는 변명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수많은 일이 지나고 나서도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었다.
[사람이 좀 패턴의 변화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이번에는 얼마 만에 연락을 하는지 세고 있었어요. 신기록 세우겠네, 신기록!]“으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강진호는 고언(古言)은 틀린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눈을 감았다.
내리는 비는 맞아야 한다. 괜히 피하려다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기러기 아빠에 특화된 사람은 처음 봤어. 마누라가 애 데리고 해외 나가 있으면, 마누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 사람이네, 이거.]최연하의 디스 실력도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신기한 공격은 처음 당해본다. 얼마나 신기한 공격이었는지, 강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제가 그런 강점이 있었네요’라는 대답을 할 뻔했다.
[별일 없죠?]“네?”
[그래서, 그동안 별일은 없었냐구요.]“어…… 음, 그렇긴 한데?”
아직 강진호의 화술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끝난 건가요?”
[끝?]왜 인간은 입 밖으로 생각을 뱉어놓고 나서야 후회를 할까?
강진호는 인간의 뇌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네, 끝났어요. 잔소리 타임.]“…….”
이상하다?
이게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강진호가 아는 최연하라면 그동안 꾹꾹 눌러놓은 울분을 앞으로 10분간은 더 뿜어내야 했다. 잔소리 지수로만 따지만 어머니도 능가하는 사람이 최연하 아니던가.
그런데 벌써 끝?
“진짜요?”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와 기가 차다는 탄식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말을 말아야지.’
입을 열 때마다 사태를 끔찍하게 몰아가는 것도 재능이다. 강진호는 최대한 말을 아껴야겠다고 다짐했다.
[네, 진짜요.]하지만 의외로 최연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자 강진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쉽게 용서를 받으면 쾌재를 부르며 넘어가는 것이 똑똑한 일이라는 것쯤은 강진호도 안다. 그 정도 머리는 있었다.
하지만 물어보고 싶지 않은가.
왜 사태가 이렇게 흐르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인간은 이성이 있는 동물이지만, 호기심에 미쳐 사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호기심이 강진호의 이성을 앞섰다.
“왜…….”
그래도 한 줄기 이성이 남아 있어서 목소리가 죽어가긴 했다.
[해도 안 되는 걸 계속 붙들고 있어서 뭐 하겠어요. 아무리 말해도 안 되는데, 그거 안 고친다고 내가 강진호 씨하고 떨어지진 않을 거거든요. 그럼 괜히 매번 말해봐야 서로 감정만 상하니,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야죠.]“아…….”
[오해 말아요. 어차피 안 되는 인간이라 포기했다는 뜻 아니니까. 그냥 그런 거예요. 사람이 장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단점도 있는 게 당연한 거니까. 적당히 고쳐 보고 안 되면 내가 그 단점을 이해하고 껴안아야죠. 내가 먼저 연락하면 그만이니까.]강진호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최연하의 말이 강진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조금 자존심 상하는 문제이기는 한데, 사실 그런 거예요.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우리가 이제 누가 먼저 연락하느냐로 자존심 상해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렇죠?]“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기로 했어요. 그게 강진호 씨니까. 나도 알아요. 강진호 씨가 나한테 많이 맞춰주고 있다는 것. 그럼 나도 그만큼 맞춰야지. 이거 하나 이해 못해줘서 매번 전화해서 화내고 잔소리하면 내가 너무 나쁜 여자잖아요.]이제 와 말을 하기에는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다행히 강진호의 머리는 이성을 되찾았고, 이 무시무시한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강진호는 다른 것을 이야기했다.
“그게 저니까, 이해한다구요?”
[네.]“이해한다라…….”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강진호에게 이상한 감정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나를 이해해 준다?”
“……예.”
[무슨 일 있어요?]“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저…… 네, 아무 일도 아니에요.”
[흠.]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침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조금 전의 침묵과는 달랐다. 불만 어린 기색이 아니라 걱정이 엿보인다.
[강진호 씨.]“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하고 상담할 건 아니더라도 이건 알아둬요.]“네?”
[무슨 결정을 내리든 저는 강진호 씨를 믿어요.]“…….”
[설사 그 결정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더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한 번 ‘이 바보야’ 하고 웃고 말겠죠.]“그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이네.]“네?”
[내가 그런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눈 딱 감고 저질러 버려요.]“…….”
[전화해서 투정 엄청 부리고 싶었는데, 투정도 못 부리게 만드시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대신 내일 전화하면 하루 종일 붙들고 투정 부릴 테니까, 각오해 둬요.]“아, 아니…….”
끊지 마.
아직.
강진호가 멈칫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다. 누군가와 전화를 더 하고 싶다.
지금껏 그리 느낀 적 없던 감정이다.
기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등을 맞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강진호는 지금까지 제대로 등을 기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등을 기댄 사람이 물러나도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건 등을 기댄 게 아니다. 강진호는 등을 기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기대오는 등을 지탱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어져 있다고, 서로 간의 유대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유대는 한쪽으로만 흐르는 일방적인 관계에 불과했다.
지금에 와서야 강진호는 다른 이들에게 등을 내주고 있는 거다.
“조금만 더…….”
최연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최연하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 정말 무슨 일 있구나.]“…….”
[한국 가요?]“네?”
[지금 내가 한국으로 가면 되냐고.]“어떻게?”
[그냥 그것만 말해요. 영화니 뭐니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강진호 씨는 신경 쓰는 게 너무 많아. 내 스케줄도 신경 써야 하고, 주변 사람들도 신경 써야 하고, 일도 신경 써야 하고…… 하루하루 쓸데없는 것들로 머리가 가득 차 있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계속 그렇게 살아요. 다른 사람 그리 생각해 주고 살았으면 때로는 자기가 투정 부릴 때도 있어야지. 말해봐요. 지금 한국으로 오라고 한마디만 하면 영화고 뭐고 다 날려 버리고 내가 지금 갈 테니까.]“……그래도 되는 겁니까?”
[네. 당신은 그래도 돼요. 적어도 내게 있어서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얼마든지 투정 부리라고. 내가 받아줄 테니까.]강진호는 웃고 말았다.
이걸로 됐다.
그래, 이걸로 됐다.
혼자서 걷는 걸음이 너무도 무겁고 힘들어 뒤돌았을 때, 넘어지는 그를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걸로 충분하다.
결국은 혼자 걸어야 한다.
함께 걸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아요.”
[아니, 이 양반이 내가 지금 장난하는 줄 아나. 지금 가요. 거기서 딱 기다려. 야, 은솔아! 비행기 표 끊어! 지금 당장!]“아, 아니, 일단 진정하시고!”
강진호는 한참이나 최연하와 실랑이를 해야 했다.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 당장 출발하려는 최연하를 달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지만, 어찌어찌 진정은 시켰다.
“진짜 문제가 있으면 이야기할게요.”
[아뇨. 그거 아니에요.]“네?”
[진짜 문제가 있으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자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이랬다고 다음에도 이럴까 봐 이야기 못하면 그게 더 문제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요?]“……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하긴, 그게 당신이니까. 나름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많은 것 같으니까 여기서 끊을 거예요. 대신 하나는 꼭 잊지 마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강진호 씨. 그게 제가 진짜 바라는 거니까. 자기 인생에 투정 부린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이제는 내가 받아줄 때도 됐으니까, 그냥 저질러 버려요. 알았어요?]“……명심하죠.”
[그럼 굿 나잇.]전화가 끊겼다.
강진호는 끊긴 전화를 손에 잡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화에서 온기가 전해져 온다.
달궈진 전화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대로라…….’
최연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한다.
박유민은 강진호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었다.
결국 답은 하나다.
무엇일까?
강진호가 원하는 삶은?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차마 따라가지 못할 삶을 산 사람.
그래서 동경했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던 사람.
그 사람이 해준 한마디가 끝없는 사막의 밤에 홀로 떠오른 북극성처럼 이정표를 밝혀주고 있었다.
“나는 진호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이미 정해져 있다.
머릿속을 헤매던 짙은 혼란을 밀어낸 강진호가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멈췄던 삶이 다시 움직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