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04
#803.
약동하다 (3)
“주인, 내가 새 아이디어를!”
회주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선 바토르는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책상에 앉아 있던 이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뭐야? 왜 네가 거기 앉아 있어?”
“오해이십니다!”
이현수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제가 건방지게 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게 아닙니다. 회주님이 휴가를 가셔서 제가 업무를 대리하고 있는 겁니다!”
이현수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죽겠네, 진짜.’
바토르를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마 전, 강제적으로 회주에 대한 예의를 바토르로부터 주입받은 이현수가 아닌가. 저 솥뚜껑 같은 손을 보니 절로 뼈마디가 쑤셔왔다.
바토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휴가?”
“예. 그렇습니다.”
“뭐가 이리 갑작스러워?”
“아, 그게…….”
이현수가 조규민과 얽힌 사정을 설명하자, 바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예. 그렇게 된 겁니다.”
“확실히 주인에게는 휴식이 필요하지.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쉬지 못했으니까.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에도 바로 일했지.”
딱히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일을 손에 놓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체력을 얼마나 사용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강진호의 체력이라면 삼 일이 아니라 삼십 일을 연속으로 잠 안 자고 일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와 스트레스는 체력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조규민이라고 했나?”
“예.”
“대단한 사내로군.”
“…….”
바토르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 있는 우리가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챙기지 못한 일을 외부인인 그가 챙겼군. 다들 반성해야 한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특히 너는.”
“예?”
바토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현수를 쏘아보았다.
“보좌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이현수가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목소리가 크다.”
성량이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강진호의 주변에 포진한 이들이 다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뜻이다.
“물론 주인 역시 목소리 크기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다들 그런 사람들만 모여 있다 보면 제 상황을 챙기지 못하고 휩쓸리기 쉽다. 너는 잘 지켜보고 있다가 주인에게 무리가 간다 싶으면 확실하게 막아야 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바토르 역시도 살짝 반성하는 중이었다.
‘이현수에게만 떠넘길 일은 아니다.’
지금의 총회는 강진호 개인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었다. 모든 계획과 모든 일이 강진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강진호가 빠져 버리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의 9할 정도는 일거에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강진호를 좀 더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주인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믿음이 바토르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살아오면서 타인의 과도한 의지 때문에 본인을 잃고 무너지는 이들을 수도 없이 봐왔으면서, 바토르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던 것이다.
‘조규민이라고 했나?’
바토르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확실하게 박아 넣었다. 짧은 만남만으로 강진호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내놓았다면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 고집 센 양반이 두말없이 말을 들었다는 게 중요하지.’
어마어마한 신뢰 관계다.
총회 내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바토르나 위긴스가 그런 말을 했다면 강진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규민의 말은 바로 수용을 했다.
어쩌면 외부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주인에게 브레이크를 걸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거지.’
조규민이라는 사내에게 흥미가 간다. 어쩌면 총회에서도 전략적으로 조규민이라는 존재를 활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음, 여하튼 그럼 주인은 지금 자리에 없다는 거로군.”
“중요한 일이십니까? 연락은 가능합니다만.”
“아니.”
바토르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휴가 간 사람에게 일적으로 연락을 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설마 그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이현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바토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 마라.”
“……예.”
“흠, 여하튼 주인이 자리를 비운다라……. 문제로군.”
바토르가 턱을 긁었다.
강진호가 자리에 없으면 문제가 여럿 생긴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새로운 계획을 입안할 수 없다.
‘이 중요한 시기에.’
바토르는 살짝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또한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자각 역시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룹 총수가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그룹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된다. 그건 총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무능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나 역시 주인에게 의지하고 있었군.’
헛웃음이 나온다.
바토르는 평생을 혼자서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다.
바토르가 강진호를 만나 그를 모신 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강진호에게 의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매력 터지는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바토르가 손을 내저었다.
“그럼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겠군. 별수 없나?”
“아니요. 보고해 주십시오.”
“음?”
바토르가 이채를 띠고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이현수가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회주님에게 일이 과중되는 이유는 모든 사안이 회주님에게 직접 보고가 들어가는 시스템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누군가 먼저 회주님에게 들어갈 보고를 정리하고 핵심을 뽑아내 추가적인 조사와 함께 보고하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회주님께 쏠리는 업무도 줄어들겠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공식적인 보고 채널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보고가 왜곡될 경우에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겁이 난다고 윗사람에게 일을 떠맡길 수는 없는 거죠.”
“그 일을 네가 하겠다고?”
“예.”
이현수는 단호했다.
“그러기 위해서 관리실을 만든 겁니다. 그 일을 위해 실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거구요.”
“그냥 월급 올려 달라는 거 아니었나?”
“……약간은 그런 것도 있는데.”
바토르가 피식 웃었다.
‘역시 이놈은 간덩이가 부었다니까.’
막중한 업무다. 하지만 누구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업무였다. 강진호에게 들어가는 보고를 필터링하겠다는 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강진호가 처리하기 곤란한 일을 미리 맡아서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주인의 업무를 줄이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맞나?”
“역시 바토르 님은 속일 수가 없군요.”
이현수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여긴 조직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조직의 이득이 사회의 선과 합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죠.”
“그렇지.”
“그럴 경우 조직이 선택해야 하는 건 빤하다고 생각합니다.”
바토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손수 더러운 일을 맡으시겠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죠. 그냥 회주님이 신경 쓰실 일을 덜어드릴 뿐입니다.”
바토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일이지.’
사람은 이슬만 먹고 살 수 없다. 선의와 실리가 양립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더러운 일도 해야 할 경우가 온다.
하지만 그런 일을 강진호가 직접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애송이, 생각보다 적극적이잖아?”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중국 놈에게 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 중국 놈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차이커창.
‘자존심인가?’
냉정하게 봤을 때, 이현수와 위긴스는 모두 차이커창에게 휘둘렸다. 얻어낸 것이 적지는 않지만, 책사의 입장에서 볼 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허벅지를 움켜쥘 만큼 짜증 나는 결과다.
패배를 직면했을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를 축하해 주는 것, 그리고 구질구질하게 집착하면서 복수하기 위해서 이를 악무는 것.
세상은 첫 번째가 옳다고 가르치지만, 바토르는 두 번째를 선택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라면 그래야 한다.
“좋아, 애송이.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내가 밀어주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일처리를 똑바로 해야겠지. 일어나라.”
“예?”
“나와 함께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네가 눈으로 본 것을 어떻게 정리해서 회주께 보고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시험에 통과한다면 전폭적으로 밀어준다.”
이현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건방지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으응?”
이현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격적으로는 몰라도 능력적으로는 아직 누군가를 실망시켜 본 적이 없습니다.”
“큭큭큭, 아주 건방지고 좋군.”
바토르가 이현수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뼈마디가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그럼에도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참아내서가 아니라 소리를 낼 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꾸 이러시면 저 죽습니다.”
“약해 빠져 가지고는……. 너도 내 밑에서 수련을 좀 받아야겠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람은 잘할 수 있는 게 다 다른 법이니까요.”
바토르를 따라 밖으로 걸으면서 이현수가 눈을 빛냈다.
‘원하는 건 다 갖춰졌다.’
다소 무리하게 지금의 체계를 밀어붙인 이유는 단 하나다. 위긴스는 이현수가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탐탁찮게 여기는 모양이지만, 그건 이현수를 전혀 잘못 판단한 것이다.
‘권력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지.’
이미 영남회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힘이 없는 권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톡톡히 느낀 이현수다. 반쪽짜리 무인인 그는 태생적으로 독자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강진호의 권력이 곧 그의 권력이다. 그런데 왜 권력에 욕심을 내겠는가.
그가 지금의 체계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다. 강진호에게 향하는 부담을 덜어주어 그를 프리롤로 놓아주기 위해서다. 강진호는 나름 노력하는 모양이지만, 그 사람은 태생적으로 조직에는 맞지 않다.
자유롭게 자신이 생각나는 일을 하고, 아랫사람들이 그 일을 따라갈 때 가장 시너지가 나는 타입이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일들은 내가 맡아야지.’
심지어 위긴스나 바토르, 혹은 장민이 하는 보고조차도 이현수 자신을 통하게 만들 것이다. 이건 그 첫 번째 과정이었다.
‘쯧, 내가 이렇게 충성하는 걸 회주님이 아실까 모르겠네.’
알아주길 바라고 하는 충성은 진짜 충성이 아니라지만, 이현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일일이 PPT로 만들어 보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알아줘야 힘이 나지. 남이 모르는 선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너 말이다.”
“예.”
“요즘 소문이 이상하게 나던데?”
“예?”
“너, 그 이름 비슷한 여자한테 완전 잡혔다고 소문 쫙 났더라?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
이현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