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08
#807.
위로받다 (2)
“벌써 자야 돼?”
“자야지.”
“좀 더 놀면 안 돼?”
“안 돼.”
“왜?”
“…….”
강진호는 말문이 막혔다.
말주변이 없는 편이기는 하지만, 논리로 누군가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허를 찔러오는 물음은 그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야 일찍 일어나니까.”
“왜 일찍 일어나야 돼?”
“그래야 시간 맞춰 준비하고 밥 먹잖아.”
“밥 안 먹으면 안 돼?”
“…….”
이마에 땀이 차오른다.
“그래야 키가 쑥쑥 크거든. 그래야 건강해 져.”
“난 키 큰 거 별로 안 좋은데.”
“……그래?”
강진호가 간절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을 재우던 보육 교사가 어찌할 수 없는 웃음을 감추며 다가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의 앞에서 멀어져 가는 작은 악마를 보며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싸우는 게 편하지.’
물리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상을 상대할 때, 강진호는 한없이 약해진다.
“이제 저희가 볼게요.”
“아뇨. 제가…….”
“놀 사람이 있으니 애들이 안 자네요.”
“아…….”
강진호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강진호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 시간이 지나도 잘 것 같지 않다.
“으음, 그럼…….”
강진호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불을 덮고 있던 아이 하나가 이불을 젖히며 벌떡 일어났다.
“오빠!”
“응?”
“오빠, 집에 가?”
“…….”
강진호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더 놀고 싶은 게 아니었구나.’
강진호와 더 놀고 싶어서 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아이들은 지금 잠이 든 사이에 강진호가 가버릴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강진호가 일어난 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진짜?”
“그래. 내일도 있을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리에 다시 눕더니 이불을 잡아끌었다.
“그럼 빨리 자야지. 자자!”
“응.”
아이들도 다들 안심했는지 눈을 감는다. 강진호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탁.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온 강진호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방문 안에서 이제 아이들은 잠에 들 것이다.
‘예전과는 조금 다르네.’
예전에 강진호는 아이들을 조금 쉽게 다뤘다. 그에게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뚝뚝하고 은연중에 사람을 짓누르는 기운을 내뿜는 강진호이다 보니 아이들이 그의 말을 잘 따랐다.
무서우니까.
보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강진호를 조금 껄끄러워했다. 입마개를 한 맹견이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그 옆으로 다가가기는 조금 찝찝한 것과 비슷한 심리다.
아이들은 기에 민감하기에 더욱 강진호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덕분에 강진호는 아이들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겠다.’
아이를 안으면 얼굴을 잡아당기고, 뒤에서 엉덩이를 머리로 들이받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빼액빼액 울어 댄다.
사방에서 백만대군이 동시에 소리를 질러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이 이제 강진호를 편하게 여긴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무엇이 옳은가는 명백하다.
강진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예전처럼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했다면 조금 편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잃은 것이 있는 만큼 얻는 것도 있다. 그게 세상의 섭리다.
강진호가 천천히 보육원 밖으로 나왔다.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은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
별이 보이지 않은 하늘이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는 그리워할 필요가 없는 하늘을 보면서도 강진호는 항상 그리움을 느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백여 년 가까이 저 하늘을 그리워했고, 이제 저 하늘을 마주한 지 십 년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움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니까.
찰칵.
담배를 빼어 문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폐 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천천히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답을 찾은 것도 같다.
정확하게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감은 서지 않지만, 보육원에 오기 전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게 느껴진다.
‘고맙다라…….’
강진호는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런 말을 들었다고 좋은 티를 내버리면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지금까지 보육원을 도운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무섭다.
아이들이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는 한결같아야 한다. 그가 대가를 바란다는 느낌을 주는 순간, 아이들은 그에게 무얼 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도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 감추는 것은 한계가 있다. 속이려면 자신까지 철저히 속여야 한다.
강진호가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이내 전화가 연결이 된다.
[웬일로 전화를 먼저 했냐는 말로 첫 인사를 하기에도 이제는 좀 빤하네요.]“…….”
지금 하는 말 역시 전화를 받는 말로는 영 부적절해 보이는데…….
“안 잤어요?”
[전화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당연히 안 잤죠. 몰라요? 여배우의 삼대요소는 불면증, 신경쇠약, 짜증이에요.]“……그거 문제네요.”
[그래도 요즘 짜증을 덜 내려고 노력 중이에요.]“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할 게 아니라 칭찬을 해줘야죠.]“……칭찬드립니다.”
[노답일세.]전화기 너머로 최연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리 꿍해 계실까?]“네?”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요’……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그건 아니고…… 빤하잖아요. 강진호 씨는 뭔가 일이 있지 않으면 나한테 먼저 전화 안 하니까.]강진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최연하에게 전화할 때마다 그에게는 항상 어떤 문제가 있었다.
“그게…….”
[아아, 변명은 됐어요. 기분 나쁜 거 아니니까. 저번에 이야기했다시피 뭐, 그 정도는 내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까, 이게 꼭 나쁜 건 아니더라구요.]“네?”
[사람이 힘들고 문제가 있을 때 찾는 사람이란 건 굉장한 거잖아요. 그건 거의 엄마급 아닌가? 강진호 씨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감동, 감동.]“…….”
어디까지 가는 건가.
아니, 어쩌면 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강진호는 문제가 있을 때, 어머니에게도 상의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상담을 해야 할 때, 그가 찾는 사람은 조규민과 박유민, 그리고 최연하였다.
‘불효자네.’
그리 생각하자 죄책감이 슬그머니 밀려온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 드리기는 싫은데.
“여하튼 미안한 일이네요.”
[쓸데없는 사과로 시간 잡아먹지 말자구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에요. 자자, 걱정하지 말고 이 누나한테 다 털어놔 봐.]누나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어쩌면 최연하는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강진호가 지금의 상황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바본가?]“…….”
강진호의 세상은 넓어졌다.
명성과 그를 아는 이의 수로 따지자면 지금의 강진호는 과거의 강진호에 미치지 못한다. 과거, 그가 적천마존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당시, 그의 별호는 전 중원을 떨쳐 울렸다.
황제는 몰라도 마존은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세상이 미치는 영향력으로 따진다면 감히 그때에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강진호는 자신의 세상이 더 넓어졌다고 믿었다.
중요한 건 그를 아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다. 그가 알고자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다.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이름이나 명성 따위는 가치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세상의 넓이가 바뀌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강진호의 삶은 분명 넓어졌다. 수많은 이들이 그와 교류하고, 그와 대화하고 있으니까. 말을 나누는 사람이 청마 하나에 한정되던 과거에 비하면 세상이 수십 배는 넓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넓은 세상에서도 이런 말을 강진호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최연하 하나뿐이었다.
[그걸 왜 강진호 씨가 고민해요?]“네?”
[다른 사람들이 고민해야지.]“…….”
강진호는 최연하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문제를 왜 다른 사람이 고민한단 말인가.
[잘 들어요, 강진호 씨.]“예.”
[나는 배우거든요.]“예?”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오지?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최연하는 강진호의 의문이 깊어지기 전에 말을 이었다.
[배우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냥 연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배우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죠. 배우의 연기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죠?]“예.”
[작품은 수많은 요소가 합쳐져야 좋은 게 나와요. 각본, 촬영, 감독의 능력, 심지어는 홍보까지. 그런데 여기서 배우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 없어요. 내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감독이 바보면 망작이 나오고, 아무리 좋은 걸 만들어내도 이게 제대로 홍보가 안 되면 흥행이 엎어지죠.]“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럼 내가 작품을 흥행시키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 것 같아요?]“아…….”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네. 연기죠. 그거밖에 할 게 없어요. 내가 어떻게든 성공하겠답시고 감독이 하는 일에 간섭해서 언성 높이고, 촬영 각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콘티 뜯어고치고, 홍보사에 쳐들어가서 돈 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숨겨야 할 성격이 드러나나요?”
[내 성격이 왜, 인마!]아, 이게 아닌가?
강진호가 어물어물 할 말을 찾을 때, 상기된 최연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품 나가리 되는 거예요. 망하죠. 그렇게 나대다가 완전 망하고 찍혀서 사라진 배우들도 많아요. 그런데 이게 꼭 그 인간의 성격이 더러워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간섭할 수 있는 건 모두 간섭하고, 손댈 수 있는 일은 모조리 손대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같아서 거품을 물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의가 낳는 악행이죠.]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자신의 눈에 더 좋아질 방법이 보이면 상대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고 뛰어든다. 그러면 결과가 나아질 것 같으니까. 그 간섭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바닥에 있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그거예요. 내 할 일을 하자. 내가 연기를 더 잘하자. 감독이 등신이면 내가 연기를 더 잘해서 사람들이 연출에 신경을 쓸 틈을 주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그 연출에 간섭할 시간에 내 연기 한 번을 더 보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강진호 씨.]“예?”
[당신, 사람이에요.]강진호의 눈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