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11
#810.
위로받다 (5)
우득.
움켜쥔 이불이 찢겨 나간다.
그 기이한 감각에 강진호는 눈을 번쩍 떴다.
‘꿈?’
그래, 꿈이다.
정확하게는 기억이다.
그가 강진호가 아닌, 적천마존이라 불릴 때의 기억.
세상을 패도로 물들인 악마였을 당시의 기억.
그 생생한 기억을 다시 보게 된 강진호가 저도 몰래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왜 이제 와…….’
이제는 그와 관계가 없는 기억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 이런 꿈을 꾼단 말인가. 그는 분명 과거와는 선을 그었건만.
“후우우우우.”
강진호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움직일 수가 없다.
너무도 생생한 꿈을 꿔서인지, 그의 육체에 아직 그 감각이 남아 있다.
마기가 흘러넘칠 듯 가득 몸을 채우고, 그조차도 두려운 패기가 전신을 뒤흔드는 그 감각이.
적천마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는 너무도 당연하던 그 감각이 지금의 강진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산을 한 손으로 뒤집고, 바다를 일검에 갈라낼 수 있을 것 같은 충족감.
마음만 먹는다면 하늘조차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가공할 힘.
그제야 강진호는 자신이 잃은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에 와 그 경지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도 말이다.
‘이 나약한…….’
응?
나약?
강진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
황당함이 어린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게 뭐지?’
강진호는 멍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뭐냐고?’
세상이 변해 있다.
그저 느낌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세상이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 앞을 가리고 있던 불투명한 필터를 뺀 느낌이라고 할까? 세상이 더 선명하고 맑게 느껴진다.
‘아니야.’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다.
어제까지 강진호가 보고 있던 세상이 흐릿했던 것이다. 그게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맑게 개였다.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서 깊이 고민한 강진호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심마(心魔)였구나.’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대공(大功)을 이루기 전, 악귀가 그를 찾아왔다. 무릇 드높은 경지로 나아가려는 이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심마에 들게 된다.
심마란 참 오묘한 것이어서 어떤 것이 심마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기가 위한 과정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심마라고 할 수 있다.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심마에 시달리는 이는 반드시 이전의 경지에서 퇴보한다는 점이다. 무학을 사용할 일이 없다면 스스로가 심마에 시달린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다.
강진호가 딱 그런 경우였다.
지금 눈을 뜨기 전까지 강진호는 스스로가 심마에 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지.’
강진호는 선택을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다. 선택 이전에 있어서 숙고를 하는 일은 있어도 모든 문제를 검토한 순간부터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를 결정하고 나면 돌아보지 않는 타입이다.
그런 강진호가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강진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의 한숨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이다.
심마는 무서운 일이다.
절정을 달리던 무인이 심마에 휘말려 폐인이 된 경우를 수도 없이 봐왔다. 사람들은 곧잘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앞으로 전진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나아갈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한다.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육체의 힘만으로 100m를 8초대에 주파할 수 있겠는가.
노력은 한계에 닿기 위해 필요한 요소다. 한계에 닿은 인간이 한계를 뚫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무학에서는 그 한계를 ‘벽’이라 부른다.
벽에 부딪힌 무인이 얼마나 큰 절망감을 느끼는지,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벽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점은, 이 벽을 건넜을 시에 내가 어느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열흘을 굶은 사람 앞에 세상 다시 볼 수 없는 진귀한 음식들을 끝도 없이 차려놓고 그 사이를 무슨 수를 써도 넘을 수 없는 투명한 벽으로 막아두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벽을 뛰어넘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간절함은 인간을 갉아먹는다. 시도하고 또 시도해도 넘지 못했을 때, 심력은 점점 갉아 먹혀 결국 폐인이 되어버린다. 상승으로 가는 벽은 그래서 무섭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오로지 스스로 넘어야 하기에 더 무섭다.
이 벽의 끝판왕이 바로 심마였다.
벽은 나아가지 못하게 하지만, 심마는 사람을 퇴보시킨다. 심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가진 것조차 점차 잃게 된다. 좋은 일에는 화가 깃들 듯이 커다란 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커다란 심마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넘었어?”
강진호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황당할 수밖에 없다.
심마라는 건 이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수라기를 익히며 심마에 든 강진호는 그 심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1년에 가까운 고행을 해야 했다.
외부를 단절하고 육체와 정신을 극한으로 몰아넣고 또 몰아넣은 끝에 겨우겨우 심마를 극복해 벽을 깨고 나아갈 수 있었다. 마지막엔 거의 죽을 뻔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심마에 시달린 기간이 일주일만 더 지속되었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넘는다고?
이렇게?
“별…….”
그냥 황당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다.
과거의 중원으로 돌아가 마교의 호법들이나 중원의 명사들에게 이렇게 심마를 넘었다고 하면, 그들은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 것이다.
웃겨서?
아니, 배가 아파서.
그 망할 심마를 넘기 위해서 자해를 하고, 폭포에 몸을 던지고, 곡기를 끊고, 동굴에 처박혀서 십 년씩 면벽을 하는 경우도 흔한데, 보육원에 들어와서 삼 일 구르고 전화 한 통 했더니 싹 나았다?
눈에 핏대를 세우고 칼을 뽑아 달려들 이들이 보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 것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혼란스럽다. 심지어 지금의 이 상황조차도 심마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심마에서 벗어난 징후가 너무도 명확하다. 시야가 밝아지고, 머리가 개운해졌다. 그동안 그의 정신이 얼마나 흐려져 있었는지 바로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삼 일 밤낮을 야근하다가 죽은 듯이 쓰러져 24시간을 자다 깬 것처럼 세상이 또렷해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뭔가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입을 뻐끔거리던 강진호가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모르겠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심마에 빠졌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전에 빠져나와 버렸는데,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를 무슨 수로 분석하겠는가.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쨌든 이건 좋은 일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말이다.
첫 번째로 심마에 빠졌다는 것 자체도 분명 좋은 일이었다.
심마는 더없이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심마에 빠졌다는 것은 그가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벽에 부딪힌다는 것은 나아가야 가능한 일이니까.
방진훈과 새로운 무학의 창안에 대해 고민하면서 강진호가 본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새로운 체계는 그가 뻗어 나갈 길을 완벽히 닦아내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잡을 수 있다.’
확신이 선다.
더없이 멀어 보이던 적천마존의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멀디멀어 아득하기까지 하지만, 이대로 걸어 나간다면 언젠가는 저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진호의 입가에 더없이 환한 미소가 새겨졌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음.”
“오! 오빠, 진짜 기분 좋은가 봐?”
“음.”
강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자꾸 입가가 실룩인다. 심마를 넘었다는 것은 강진호에게도 정말 기쁜 일이었다.
과거, 그가 마교의 교주였을 때라면 삼 일 밤낮을 웃고 떠드는 잔치를 열었을 것이다.
“좋은 일 있어?”
“그래.”
조미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좋은 일? 오빠, 연애라도 해?”
“…….”
강진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대답이 터져 나온다.
“원래 연애는 하고 있잖아!”
“연하 언니가 들었으면 지금 니 머리채가 남아났을 것 같아?”
조미혜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아니! 연하 언니는 지금 중국에 가 있잖아, 이 바보들아. 혹시 바람피우나 떠본 거야! 왜 초를 치고 그래!”
무서운 여자.
강진호가 오 년을 넘게 공들여 장악해 둔 보육원이다. 그런 곳에 두어 번 들르더니, 순식간에 여자아이들을 정보원으로 써먹고 있었다.
새삼 최연하의 두려움을 실감하는 강진호였다.
“오늘 뭐 해?”
“응?”
난데없는 물음에 조미혜가 강진호를 빤히 보았다. 강진호가 이런 걸 묻는 건 처음 봤다.
“뭐 하기는. 오늘 일요일이잖아. 학교도 안 가니까 딱히 할 건 없지. 어제 청소도 다 해놨고, 오늘은 그냥 뒹굴대고 놀아야지.”
조미혜의 시선이 한쪽으로 칼날처럼 박혔다.
“너는 안 돼. 공부해.”
한진성의 고개가 아래로 푹 처졌다.
가련한 고3이여.
“할 일이 없다, 이거지?”
평소의 강진호였다면 여기서 물러난다. 그러고는 구석에서 대충 시간을 떼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강진호는 평소의 강진호가 아니다.
오늘은 더없이 기쁜 날이 아닌가.
“내가 쏜다.”
“……응?”
“오늘 내가 쏠 테니까, 계획표 준비해.”
“오늘?”
“음.”
강진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아침은 여기서 먹어야겠지. 그 뒤에 나간다. 그리고 저녁까지 먹고 돌아올 거야. 계획표 짜서 제출해.”
“오빠, 몇이나 나가는데?”
“전부 다.”
“응?”
“전부 다.”
“…….”
조미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에 있는 인원을 다 데리고 나간다고?
“어디 가는데?”
“그건 너희가 정해야지.”
“헐…….”
조미혜는 당황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딱히 별 계획이 없던 아이들은 외출, 그것도 강진호라는 전설의 호구…… 아니, 전설의 보호자와 함께 나가는 외출에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었다. 기이한 열기가 조미혜를 압박했다.
“아니…… 오빠, 나는 오늘 쉬려고…….”
벌떡벌떡.
사방에서 일어난 아이들이 조미혜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어낸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걸어와 조미혜의 자리를 차지한 한진성이 구십 도로 폴더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한 시간 내로 결재 서류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음.”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는 쉬어야지.’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지만,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복귀하겠다는 말을 해봐야 조규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오늘 하루 확실하게 막 나가 버리는 것도 좋겠지.
아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계획표가 올라오자 강진호는 두말할 것 없이 폰 카메라로 계획표를 찍어 전송했다.
전송받는 이의 비명이 보육원까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