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12
#811.
응원하다 (1)
“꼴이 영 좋지 않아 보이는군.”
이성휘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웃고 싶겠지. 그리고 비웃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이기도 하고.”
비웃음을 받은 자가 스산한 눈으로 이성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말을 네가 하는 건 조금 웃기는 일이지. 내 꼴은 우습지만, 너만큼 우습지는 않거든.”
으득.
이성휘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핏발이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주둥아리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김석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니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일인 것처럼 말할 건 없어. 지금의 나를 죽이는 건 세 살짜리도 가능한 일이니까. 아니, 아니야. 대단한 일처럼 말해도 괜찮을 것 같군. 네 수준에는 딱 맞는 자랑거리지.”
휠체어에 앉아 있는 김석일이 이죽거렸다.
팔다리를 쓸 수 없는 폐인이 되었음에도 김석일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이성휘는 그런 김석일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질은 안 죽었군.”
“죽을 일이 없지. 사람이 성질을 죽이는 이유는 무섭기 때문이야. 내가 내 성질대로 설쳐 댔다가 피해가 올까 봐 하고 싶은 일을 참고, 원하는 것을 자제하지. 하지만 나는…….”
김석일이 이를 드러냈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거든. 그러니 참을 필요도 없지.”
섬뜩한 목소리였다.
이성휘는 지금 김석일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인이 폐인이 된다는 것은 일반인이 폐인이 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상실감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더구나 김석일은 한국의 정점을 달리던 무인이었다. 그런 이가 폐인이 되어 세상의 가장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이성휘 자신이라면 도저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김석일에게는 죽음이 삶보다 편하다. 목숨을 끊는 쪽이 살아서 미쳐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 김석일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복수심.
강진호에 대해 결코 꺼지지 않는 복수심이 지금의 김석일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었다.
‘나 역시 별다르지 않지.’
이성휘는 김석일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의 김석일은 거울이다. 이성휘를 비추는 거울. 그가 김석일을 보며 느끼는 감정을 김석일 역시 자신을 보며 느끼고 있을 것이다.
“준비는?”
“건방 떨지 마라, 이성휘. 너 따위가 내게 감히 그런 질문을 해?”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도 김석일은 대하기 어려운 자였다. 김석일이 그를 찾아왔을 때 받은 느낌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성휘다.
이 몰골이 되고서도 김석일은 그때의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날카롭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베일 것처럼 칼날 같은 예기가 흘러나온다.
“저 머저리 새끼들을 홀리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 놈들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텐데?”
“힘이 센 것과 똑똑한 건 별개의 문제이지. 그리고 오히려 똑똑한 놈들이 이용하기는 더 쉬워. 똑똑한 놈들은 절대 자신이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심지어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것 역시 자신이 고려한 바라고 정신승리를 해버리지.”
“어째서?”
“이용을 당했다는 굴욕감을 감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실의 손해를 조금 감수하는 쪽이 싸게 먹히거든. 그래서 자부심이 있는 놈들은 가지고 놀기 좋지.”
김석일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준비는 다 끝났다는 건가?”
“시간은 필요하다.”
김석일이 딱 잘라 말했다.
“일본 놈들은 단합이라는 걸 모르더군. 제멋대로 나뉘어진 조직들의 의견을 일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허세를 떨어 댄 것에 비하면 결과가 영 신통치 않군.”
“……이성휘.”
김석일이 죽일 듯한 눈으로 이성휘를 노려보았다.
“나를 너무 자극하지 마라. 제정신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힘드니까. 여기서 나를 더 자극한다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도 모른다.”
“아아…….”
이성휘가 양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네놈도 아직은 내가 필요할 테지.”
“당연한 소리. 그러니 내가 아직 너를 살려두는 거지. 나는 강진호를 가장 증오하지만, 그다음 순서로는 너를 올려두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거든.”
이성휘가 이를 갈았다.
“네가 나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까.”
“푸핫!”
김석일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내가 너를 이리 만들었다고? 큭큭큭큭, 최근에 들은 말 중에 가장 재미있는 말이로군. 이봐, 이성휘. 네가 마공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는 마공 때문에 강진호와 적대하게 된 게 아냐. 오히려 마공이 있었으니까 적대라도 할 수 있는 거다.”
김석일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네게 마공을 전수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무공도 없는 폐인이 돼서 강진호에게 손도 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겠지. 그 꼴이 더 좋다면 사과하지. 어떻게 사과할까? 혀라도 잘라 바칠까? 하하하하!”
김석일이 기침까지 해가며 크게 웃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성휘의 눈에 핏발이 섰다.
엿같은 동반자.
당장에라도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하지만, 필요에 의해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관계.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서로를 찾을 수밖에 없는 관계.
그게 김석일과 이성휘의 관계였다.
‘같이 썩어가는 거지.’
이성휘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결과는 낼 수 있다, 이건가?”
“빤한 걸 묻는군. 결과를 낼 수 있느냐가 아니다. 결과는 반드시 내야 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면 내가 이 질긴 명줄을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의지를 듣고 싶은 게 아냐. 현실을 듣고 싶은 거다.”
“현실?”
김석일이 이죽였다.
“홍왕계가 제안한 조건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차피 이 쪽발이 새끼들은 한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 그들이 지금까지 참은 이유는 내부 계파의 정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발을 뻗었을 때, 홍왕계가 어찌 나올지를 몰랐기 때문이지.”
김석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홍왕계에서 한국을 먹는 걸 인정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지원까지 해주겠다는 판인데, 이걸 물지 않는다고? 그럼 애초에 일본 놈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머리에 뇌 대신 우동 사리만 차 있는 놈들을 이용할 수는 없으니까.”
이성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김석일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저 꼴이 되었다는 하지만, 김석일의 머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머리로만 따진다면 이성휘는 감히 김석일을 따라가지 못한다. 한국을 통틀어도 이현수 정도가 아니라면 김석일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말이지.’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 괴롭히는 데 있어서는 악마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김석일이 아닌가.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이성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아. 이 기회마저도 살리지 못한다면, 사이좋게 손잡고 바다에 뛰어들어 뒈지는 게 나을 거다.”
“큭큭큭.”
김석일이 발작하듯 몸뚱아리를 뒤틀었다.
“죽인다, 반드시. 강진호만은 죽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혼을 팔아서라도! 내 육체를 개먹이로 바쳐서라도 반드시 그 개자식만은 죽인다. 내 삶은 오로지 그걸 위해 존재한다.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낸다.”
지독한 집념이었다.
이성휘마저 눈을 찌푸릴 정도다.
가만히 김석일을 바라보던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군.”
이성휘가 몸을 돌렸다
이 음울한 공간에는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다. 용건이 끝났으면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았다. 그들은 함께해야 하지만, 함께함으로써 서로를 괴롭히는 사이니까.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이성휘가 발을 멈췄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성휘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물을 게 있는데.”
김석일이 이죽거렸다.
“언제부터 그런 허락을 맡았지? 꽤나 예의가 발라졌는걸? 내가 특별히 화장실은 내 허락을 맡지 않아도 갈 수 있게 해주지.”
“개소리 집어치워.”
이성휘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김석일을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일본 놈들이 한국으로 처들어가 강진호의 목을 딴다면, 결국 한국 무인계의 지배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겠지.”
“호오, 똑똑한걸? 이제는 다섯 살 수준은 된다고 해주지. 손이 있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야.”
“그럼 한국 무인계는 어떻게 되지?”
“몰라서 묻나?”
김석일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 머리로는 생각하기 힘든가? 그렇다면 말해주지. 모조리 죽어 나가겠지. 예전에 우리가 당한 것처럼 말이야. 협력하는 놈들은 노예로라도 살아남겠지만, 협력하지 않는 놈들은 거름이 되겠지. 그래도 다행이라면, 과거처럼 대놓고 수탈해 먹지는 못한다는 것 정도? 하지만 뒷세계를 장악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너도 알 텐데?”
“…….”
이성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애국지사라도 되어보실 생각인가? 그건 좀 심하니까? 여기서 멈추겠다고?”
“그럴 생각은 없어.”
이성휘가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그리고 확연하게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성휘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옷 안에 끈적이는 뭔가가 잔뜩 달라붙은 것처럼 기분 나쁜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다.
차이커창이 날린 비웃음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김석일의 말이 맞다.
그런 것 때문에 주저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미 시작한 이상 되돌릴 길은 없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에 올라타 버린 이상,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건물 밖으로 나온 이성휘가 고개를 들었다. 빼곡이 들어찬 건물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다. 화려하고 눈부신 네온들이 이성휘의 눈을 찔러 들어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성휘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은 어쩌면 그를 다시없을 매국노라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보다 더한 개자식으로 역사에 남겠지.
이해를 구할 생각은 없다.
그의 가슴속에 타고 있는 이 활화산 같은 증오를 다른 이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성휘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투욱!
거리를 가던 이가 이성휘와 어깨를 부딪쳤다.
욕설이 날아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욕설을 내뱉는 이를 보며 이성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콰악!
내뱉는 욕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목을 움켜잡고 비틀어 버린 이성휘가 쓰레기처럼 사람을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내 앞에서는 감히 욕할 수 없게 해주지.’
쓰레기로 불려야 한다면 철저하게 쓰레기가 되어준다. 그게 이성휘가 택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