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48
#847.
위협하다 (2)
“그래서 멋대로 설치고 있군.”
“네.”
어찌 보면 무례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진호는 이 무례한 말을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람은 무례할 자격이 있다.
천하의 황정후라면 감히 강진호의 앞에서도 무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 가는 대로 해보는 중입니다.”
“쯧쯧, 아랫놈들이 고생하겠군.”
강진호는 웃고 말았다.
최근 들어서야 황정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새삼 깨닫는 강진호였다. 총회라는 거대 단체를 이끌고 나서야 다른 이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강진호는 원래 황정후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인정의 정도가 달라졌다.
강진호가 황정후를 인정한 이유는 그가 한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막연히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스로 겪어보고서야 그 막연함이 피부로 와닿는 생생함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후루룩.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조금은 촌스러운 잔에 담긴 커피가 황정후의 입으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안 뜨거우십니까?”
“자네도 늙…… 아니, 늙었지. 그래, 늙어봤지.”
황정후가 아직 어색하다는 듯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 눈앞의 청년이 그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납득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납득은 이미 했다. 그 납득한 내용을 체화하는 것이 힘들 뿐이었다.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니까.
“뭐, 여하튼 좋아.”
황정후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서 한담이나 나누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아침부터 갑작스레 강진호가 방문했다. 커피를 내놓기는 했지만, 아직도 당황이 가시지를 않았다. 황정후가 미묘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원체 거물이어야지.’
예전이었다면 뜬금없이 강진호가 찾아왔다고 지금 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강진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동시에 이끌어줘야 할 손자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강진호는 황정후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커졌다.
‘후계자는 무슨.’
한때는 강진호를 후계자로 낙점해 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체급이 맞지 않는다. 얼핏 들어도 그 총회인가 뭔가 하는 곳은 재경보다 크다. 아마 벌어들이는 돈도 재경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재력이 비등하다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
‘후계라기보다는 거의 인수 합병 수준이로군.’
황정후가 낄낄 웃었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멋모르던 시절의 강진호라면 모를까, 한 단체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한 일인지를 알아버린 강진호는 절대 재경이라는 짐덩어리는 맡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저 확인하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뭘 말인가?”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혹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네.”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안에 의혹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죠. 객관적으로 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조 실장도 있지 않나?”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황정후와 강진호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조규민이 격렬하게 손을 저었다.
“저, 저는 그럴 급이 못 됩니다, 회장님.”
“쯧쯧, 한심한 인간 같으니.”
“사실이 그렇습니다만.”
“단체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평가할 눈도 없는 놈이 회사를 다녀? 이 월급 도둑 같은 놈!”
“나름 월급 값은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황정후의 눈이 불을 뿜자,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나이도 안 드시나.’
이제는 슬슬 기력이 꺾일 만도 하건만, 황정후는 정정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다.
“믿을 놈이 없다니까.”
황정후가 너스레를 떨고는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확신이라고 했어?”
“예.”
“임자.”
황정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어.”
“…….”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경영을 하는 사람이 확신을 가진다는 건 위험한 거야. 확신에 찬 사람은 열정에 불탈 수는 있지만, 반대로 시야가 좁아지지. 다가오는 위험이나 실패를 놓칠 수밖에 없어.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해.”
“하지만 회장님은 그러지 않으셨잖습니까?”
“……나?”
“예.”
인간 불도저.
이거다 싶으면 그룹의 사활을 걸고 죽어라고 매진하는 사람이 황정후였다. 그의 추진력은 재계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들 인정하는 바가 아닌가.
“그게 좀 다른 게…….”
황정후가 턱을 긁으며 말했다.
“내가 일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확신에 차서가 아니야. 이게 안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조금 이해가 안 갑니다만.”
“설명하자면…….”
조규민도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황정후의 말을 기다렸다.
황정후와 다른 성공한 사업가의 가장 큰 차이?
황정후는 자신의 성공을 떠벌이지 않는다. 보통 자타가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황정후에게는 과거의 영광이 없다. 그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덕분에 들은 이야기를 수십번 다시 듣는 고문을 당할 일은 없지만, 황정후의 입으로 그의 성공담을 들을 기회도 없었다.
“지금이야 다들 재경이 아주 잘 커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란 말이지. 재경을 처음 세우고 크게 키울 당시에는 몇 번이고 박살이 날 위기가 있었어.”
“그랬겠죠.”
“시대가 그런 시대였지. 다들 바닥에서 기어올랐단 말이야. 다른 이들이 실기하면 그 틈을 어떻게든 파고들려고 아등바등거리던 시절이었어.”
황정후의 눈이 빈 허공을 응시했다.
아마 지금 그의 눈에는 새하얀 벽면이 아니라 그가 젊었던 시절이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지. 동력을 잃은 배는 가라앉는 법이니까. 계속 노를 저어야 앞으로 나간다는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은가.”
“음…….”
“변화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변화해야지. 그리고 추진력도 갖춰야지. 하지만 그게 추진력이 아니라 아집이 되어서는 안 돼.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과감하게 추진해야 하지만, 혹여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구심마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게지.”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강진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저리 확신에 가득 찬 눈을 한 사람은 브레이크를 모른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뭐, 좋겠지.’
황정후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브레이크를 모르고 달리는 사람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것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결국 인생이나 경영이나 실패에서 배우는 것 아니던가.
황정후 역시 수없는 실패를 맛봤다. 세인들은 그의 성공만을 기억하지만, 그는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다. 실패했기에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실패했기에 실패를 기반으로 성공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열정과 의지가 있다면, 실패조차도 도움이 된다.
‘부럽구나.’
황정후는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이가 든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로부터 잃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실패한 후에 젊은 시절처럼 다시 기어 올라올 힘과 의지가 더 이상은 없다는 걸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후는 강진호가 진정으로 부러웠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진호는 아직 열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소년 같은 저 눈을 보고 있자니, 황정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도 뭔가 불길이 이는 기분이다.
“귀를 열어둬.”
“귀라면?”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가 의심된다면, 언제나 귀를 열어둬야 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면 안 돼. 어떤 말이라도 들을 수 있고, 그 말이 맞다면 인정할 수 있어야지. 그 두 가지만 지킨다면 엇나갈 일은 없을 거야.”
‘그게 가장 어려운 거지만.’
성공하는 자가 아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이들과 상의한 끝에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고, 그 의견대로 일을 추진했더니 성공이 돌아온다.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의 말이 옳다는 생각에 스스로 함몰되게 된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면 옳았으니까. 자신이 이룬 성공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타인의 말은 가벼워지고, 자신의 생각은 중요해진다.
그러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의견이 옳았던 소수, 그리고 성공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타인의 의견을 흘려듣지 않을 수 있는 소수만이 진정한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게 쉽겠는가.
권력자가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오죽하면 수많은 철학가들이 그저 남이 하는 말만 잘 들어도 성군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군이라 불릴 이가 몇이나 있는가.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황정후는 강진호라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과거, 그가 처음 봤을 때부터 강진호는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오만하고 괴이하긴 하지만, 어쨌든 관계를 맺을 줄 알고, 귀를 열 줄 안다.
“초심을 지키는 게 가장 어려운 거지. 빤한 말이지만, 빤한 건 또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그래.”
황정후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오랜만인 것 같군.’
그러고 보면 최근에는 강진호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가 강진호의 말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원수 같던 아들들의 일이라든가, 복지 재단의 일이라든가.
전부 강진호의 권유대로 결국 그가 마음을 바꾼 일 아니던가.
그러다가 이리 말할 기회가 오니, 예전의 관계를 다시 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잘 구슬리면 재경도 맡아주지 않을까?’
총회로 정신이 없겠지만, 이만한 기업을 꿀꺽 먹을 일도 흔치는 않다. 그러니 잘만 구슬리면 어떻게든…….
“그리고 한 가지 더.”
“응?”
강진호가 눈짓을 하자, 조규민이 옆에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그게 뭔가?”
“현황을 좀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현황?”
“예. 이번 재단 출범 때문에.”
“…….”
아, 보고서구나.
그래, 보고서네.
‘이게 모양이 좀 이상한데?’
이렇게 되면 황정후가 한 일을 강진호에게 보고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이건 조금…….
“회장님.”
“으응?”
“재단 출범이 늦어지고 있는 것 같던데,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살짝 날카로운 눈이 된 강진호를 보며 황정후가 할 말을 잃었다. 조규민도 그 옆에 찰싹 붙어서 황정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그게…….”
황정후의 눈이 갈 곳을 잃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아니, 그냥 늙은 범을 키웠구나.’
생전 처음 하는 현황 보고에 노회한 경영인이 목소리를 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