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49
#848.
위협하다 (3)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만…….”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한때 그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사장단을 쭈욱 앉혀놓고는 노한 얼굴로 이렇게 소리쳤다.
“이유는 언제나 있는 법이야! 일이 늦어지는 이유를 찾지 말고, 빨리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이 머저리들아!”
“이유는 언제나 있는 법이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좀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
아, 이런 기분이었구나.
황정후는 안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발이 성성하던 사장단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당황할 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틀린 것을 틀렸다 말하는데 주저함이 있다면, 그 집단은 썩은 것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황정후는 틀린 것을 말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니, 그게…….”
“네.”
“그게, 음…….”
“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강진호가 황정후를 바라본다.
황정후는 강진호의 다음 말도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자네들이 노력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
“회장님께서 노력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예전만큼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과가 나지 않는 노력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야.’
“하지만 결과가 조금 더딘 것은 사실이네요.”
“…….”
거, 소름 돋네, 진짜.
황정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나온 세월 동안 혹시 자신이 어딘가에 사생아라도 만든 것이 아닌가를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그는 실수를 한 적이 없다.
대기업 총수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첩을 몇이나 두는 게 당연하던 시절에도 그는 오로지 아내만을 바라보았다. 술을 진탕 먹고 필름이 끊겼을 때, 실수한 게 아니라면…….
‘뭐, 이런 생각까지.’
제 아버지가 멀쩡히 있는 놈을 두고 이게 뭔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강진호는 황정후가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변명거리를 생각하던 황정후가 입을 두어 번 뻐끔거리고는 입을 꾹 닫았다.
‘아니지, 이게 아니지.’
역으로 가자.
이놈이 그와 같은 생각으로 움직인다면, 바라는 대답 역시 그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최선의 대답은?
“그…….”
최선의 대답을 알아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황정후가 질끈 눈을 감고는 입을 열었다.
“빠르게 해보겠네. 최선을 다해 추진하지.”
“감사합니다.”
강진호가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위기는 벗어났지만, 미묘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이걸 왜 맡아 가지고는.’
물론 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강진호의 말대로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자 사라졌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일 자체로 두고 보면 매우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거…… 상황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원래는 강진호가 해야 하는 일을 그가 대신 맡아서 뺑이 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놈은 그를 재단 회장 자리에도 앉힐 셈이다. 자기가 능력이 없고, 황정후의 위명이 필요하다는 말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귀찮은 일은 다 떠넘기고 실권만 쥐겠다는 것 아닌가.
한 번 꼬아서 생각하기 시작하자 자꾸 뭔가 이상하다.
일 자체는 그와 조규민이 거의 처리한 것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 일에 대한 이득은 강진호가 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강진호에게 보고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아니, 일이 어쩌다가…….’
도대체 이 모든 것이 어디부터 꼬였는가를 고민하는 황정후였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강진호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음?”
“이번에 다시 보육원의 일을 겪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도와야 하는가, 그 도움을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하는가, 그저 지금 당장 경제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 이 아이들에게 정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가.”
황정후의 눈이 흥미를 담았다.
“그리고 도움을 받던 아이가 추후에 도움 없이 사회에 던져졌을 때, 과연 적응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아이들은 완전히 자립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허.”
황정후가 헛웃음을 흘렸다.
재단을 만들기 전에 당연히 떠올려야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진호가 이런 일을 고민했다는 사실이 꽤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강진호는 언제나 대맥을 짚는 사람이다. 이런 세세한 일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진지한 성찰을 했다는 것은 강진호가 이제 그저 지시하는 선에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하고 조율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적인 문제는 차라리 쉬운 편이겠죠.”
“정확히 아는구나.”
“머리는 생각하라고 있는 거란 걸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하핫!”
황정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이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니, 그 일을 선뜻 맡아주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진호가 고개를 숙이자 황정후가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됐다! 감사받자고 한 것 아니다!”
“그래도…….”
“됐다니까. 내가 이런 일로 생색내는 사람이더냐?”
황정후의 당황을 보며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이게 아닌데…….’
그 웃음을 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한 황정후다.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황정후가 역정을 내고, 강진호가 쩔쩔매야 하는데…….
‘낚였나?’
상황이 이리되다 보니 불만을 토로하기가 힘들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 황정후가 어떻게든 화제를 그쪽으로 돌려보려 했지만, 강진호는 틈을 주지 않고 조규민에게 말을 걸었다.
“실장님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진짜 힘들었거든요. 이번 사건도 있었고.”
“그랬을 것 같네요. 언제 한 번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에헤이, 제가 뭐 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제가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헤헤헤.”
황정후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저, 저 간악한 놈.’
생색을 내야 하는데!
그도 생색을 내야 한다. 생색이란 게 나쁜 게 아니다. 생색을 내지 않으면 사람은 다른 이의 힘듦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황정후는 스무스하게 넘어가 버렸고, 조규민만 생색을 내고 있잖은가.
“그…….”
“아!”
황정후가 신음성을 내자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허가는 다 끝났습니까?”
“으응.”
“그런데 이게…… 제가 알아본 바대로라면 보육원을 운영하거나 복지 재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 회장님이 그게 가능합니까?”
“아, 그게…….”
황정후가 떠듬떠듬 대답을 하려는 찰나, 조규민이 기세 좋게 끼어들었다.
“후후, 제가 누굽니까. 다 해결을 해두었습니다. 원래는 복지 재단 설입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이 필요하지만, 지금에 와서 회장님께 공부를 권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편법을 좀 썼습니다.”
“편법?”
“재단을 두 개로 나누고, 복지 재단은 본 재단의 산하단체로 밀어 넣으면 됩니다.”
“……어?”
강진호가 머리를 갸웃했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여하튼 해결되었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조금의 편법이 있긴 했지만,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니 눈감아줄 겁니다.”
“그럼 다행이구요.”
“…….”
황정후가 멍한 눈으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키운 호랑이 새끼는 강진호가 아니라 이놈인 모양이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조규민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재단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가 맡아서 한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저는 그 일까지 맡을 여력이 없습니다. 하라면 하겠지만…… 그랗게 되면 집중도가 떨어질 것이고, 효율이 좋지도 않을 겁니다.”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규민이 재단을 중점적으로 운영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황정후 역시 이름을 올리고 방향을 정할 뿐이지, 실무를 맡기는 어렵다.
“제 주변에는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적임자가 하나 있습니다.”
“적임자요?”
조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고 재단을 굴리게 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이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당히 제어를 해줄 윗사람은 넘쳐 나니까요.”
“그렇겠죠.”
“그러니 몸으로 뛸 사람이면 됩니다. 열정이 있고, 경험이 있는, 누구보다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빤한 소리였다.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이미 조규민이 거의 마음을 굳혔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일까?
“제가 생각하기에 딱 적당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쓰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조규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쓰면 됩니다. 쓰면 됩니다만, 이 사람을 쓰기 위해서는 강진호 씨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강진호의 눈이 조금 미묘해졌다.
“이쪽 분야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리고 제 허락이 필요한 사람…….”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아마도 조규민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물론 적임자이기는 하겠지만…….”
“예.”
“아무래도 현실적인 문제가 여럿 있지 않나요? 일단은 재단의 실무를 맡아보기에는 나이가…….”
“나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보조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사실 재단이라는 것은 실무보다 열정이 더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감투를 쓴 놈이 열심히 하면, 자리만 맡고 있는 양반들도 열심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파격적인데?”
“그게 재경의 방식 아니겠습니까?”
그도 맞는 말이다. 재경의 방식이기도 하고, 강진호의 방식이기도 했다.
“나이는 그렇다 치고, 경험이…….”
“매번 경험자만 찾으면 신입 사원은 어디서 경험을 쌓습니까?”
그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이 있잖습니까.”
“뭐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데, 바꾸면 되죠.”
“음…….”
“먼 인생까지 생각을 한다면, 이쪽이 나을 겁니다. 아무래도 여러 경험을 할 수 있고, 진지하게 인생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강진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생을 논한다면 이쪽으로 데리고 오고 싶지만, 꿈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길을 잘 가고 있는 친구를 굳이 끌어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나중에 논의할 일이죠.”
“네?”
조규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꿈이요?”
조규민의 되물음에 강진호도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좀 어긋난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꿈입니까? 뭔 꿈 찾아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확실히 어긋났다.
강진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유민이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유민? 네? 박유민 씨요?”
“……네.”
조규민이 되레 황당하다는 듯 강진호를 보았다.
“박유민 씨가 우리 재단에서 왜 일합니까? 재경 사원도 아닌데.”
“…….”
그럼 누굴 말하는 거야?
강진호의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조규민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한 사람은…….”
조규민이 말한 이름 석 자를 들은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그…….
아?
“그래도 되나?”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강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