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53
#852.
계획하다 (2)
“옳은 선택이십니다.”
나카타 유지가 바닥에 바짝 업드렸다.
스르륵.
그 말과 동시에 주발이 걷혀 올라갔다.
수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성휘와 김석일도 고개를 숙였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자연히 몸이 그리 움직였다.
‘뭐지?’
김석일은 자신의 상태에 의문을 가졌다.
왜 이리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가.
한때는 그 역시 절대자라 불리던 사람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던 존재가 아니던가.
수령과 다를 바가 없다.
영남을 손안에 쥔, 지역은 모두 제패하지 못했지만, 한국 최대의 세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영남회나, 관서를 손에 쥔 신니치카이나 별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느끼는 압박감은 어마무시했다.
김석일이 슬쩍 고개를 들어 수령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으로는 별다를 게 없다.
고풍스러운 기모노를 입고 있지만, 그거야 영화에서도 많이 보는 장면이다. 덩치는 오히려 좀 작은 편에 속했다.
‘이중걸?’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느낌이 비슷한 사람을 찾으라면, 이중걸이 적당하다. 노회함과 패기가 뒤섞여 있는 느낌.
하지만 김석일은 수령의 모습에서 이중걸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것을 찾아냈다.
잔혹함.
부드러운 미소에서도 섬뜩함이 느껴진다. 표정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너무도 자연스레 자신의 속내를 뒤로 감추고 보여줄 만한 모습만을 전면에 들이민 느낌이다.
노회한 권력자.
그리고 잔혹한 권력자.
‘이자가 수령.’
이중걸 같은 걸물이 처음부터 대문파에 태어나 자연히 자신이 쥐어야 할 권력을 손에 쥐었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세상 모든 것을 아래로 내리 깔아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김석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마 지금 저자의 눈에 자신이나 이성휘는 벌레 이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카타 유지도 마찬가지겠지.
거짓되게 만들어낸 합리로 자신을 가린 잔혹한 괴물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나마 김석일이니까 여기까지 보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냥 사람 좋은 노인쯤으로 보겠지.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이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휘날린다.
나카타 유지를 내려다보며 수령이 입을 열었다.
“지원의 조건은?”
“금액적인 부분으로는 한계를 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중국 놈들의 자금력이 그 수준에 올랐다는 건가? 전체를 지배하지도 못한 놈들이?”
“말만 그럴 뿐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금액을 내놓으라 한다면 그놈들도 꼬리를 말겠지요.”
“흐음…….”
수령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겠지.’
나카타 유지는 수령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콤플렉스.
일본의 무인계에 있어서 중국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존재다. 현실의 일본은 중국을 뛰어넘었다. 이제는 따라잡히고 되레 역전을 당하는 처지이지만, 한국전쟁 이후로 현실의 일본은 단 한 번도 중국의 뒤에 선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일본의 무인계만은 중국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무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그들이 노력했다지만, 수많은 세월 동안 대국이 쌓아 올린 저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그들이 앞서는 부분은 자금력뿐이었는데, 되레 중국에서 자금을 지원받는다는 사실이 수령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있을 것이다.
“홍왕계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은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총회를 직접 상대하느니, 우리의 세력이 넓어지는 걸 묵인하겠다는 건가? 일본을 너무 무시하는군.”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말해보라.”
“일단은 북한의 존재를 감안하고 있을 겁니다. 완충지대가 있습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도 저들은 같은 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입니다. 지금이야 한국 놈들끼리 서로 이를 갈고 있으니 저들의 사이가 격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가 남한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이상의 충돌이 벌어지겠죠.”
“과연.”
심심하면 일본 쪽으로 미사일을 갈겨 대고, 일본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도발을 해 대는 북한이다. 그런 이들과 접경지대를 가지게 된다면, 분명 지금 이상의 사고가 벌어질 게 빤했다.
“다른 하나는 혼란입니다.”
“혼란?”
“한국의 무인 놈들을 모두 쳐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아니, 설사 그럴 의도로 움직인다 해도 저들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미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병합에 성공했음에도 수십 년간 저들의 게릴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놈들이지.”
수령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놈들의 국민성을 감안한다면, 내부 소요를 다스리는 데만도 몇 년은 필요합니다. 하나로 뭉친 총회보다는 더 크고 강하더라도 내부를 다스려야 하는 우리가 등 뒤에 있는 쪽이 낫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 뒤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전에 자신들도 중국을 일통할 수 있다고 믿을 테니까요.”
나카타 유지가 말을 끝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빤한 짓을.’
지금 그가 말한 것 중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수령은 이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 그는 한국의 정보에는 무지하지만, 국제적 역학관계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나카타 유지에게 물어온 것은 그가 얼마나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떠본 것이다. 대답 중 틀린 것이 있거나,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카타 유지는 순식간에 밀려나고 실각한다.
“훌륭하군.”
합격.
나카타 유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한동안 그의 자리는 다시 유지될 것이다. 이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다면, 기껏 그가 차려놓은 밥상을 다른 이가 처먹는 꼴을 지켜봐야 했을 수도 있다.
“출정을 위해서는 조율이 필요할 터.”
“신니치카이가 선두에 선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수령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가 선두에 서지 않는다고 몸을 뺀다면, 조선이라는 과실을 먹을 자격이 없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내 이름으로 소집을 내려라. 참여하는 자에게는 영토를 내줄 것이다. 하지만 물러나는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지.”
나카타 유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욕심 많은 늙은이 같으니.’
전쟁의 목적은 승리하는 것이다. 목적이 승리가 아니라 재물과 명성이 되어버리는 순간, 이물질이 끼어든다. 그런 것은 일단 승리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지금 이 전쟁을 땅따먹기로 만들어 버리고, 욕심에 눈이 먼 이들을 화살받이로 쓸 생각이다.
치가 떨리면서도 납득이 간다.
그렇게 해서 피해가 늘어난다면 일본 전체로는 손해이겠지만, 신니치카이에게 있어서는 절대 손해가 아니다. 상황을 봐서 약화된 구미들의 영역을 먹어 치울 수 있어도 좋고, 그저 그 상태가 유지되어도 좋다.
어쨌든 신니치카이의 권한과 지배력은 강화될 테니까.
불확실한 이득을 던져 주고, 확실한 이득을 챙기겠다는 속셈이다.
그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나카타 유지는 이 대세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흐름이란 게 있다. 당장은 손해처럼 보여도 그 흐름을 타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도태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턱.
수령의 손에 나카타 유지의 어깨를 짚었다.
“자네가 추진한 일이니, 자네가 끝을 봐야겠지.”
“…….”
“출정대의 수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침공을 반대하던 사람입니다.”
“전쟁을 반대하던 이가 전쟁을 이끈다는 건 꽤나 재미있는 상황이지. 그러니 누구도 자네가 무리한 지시로 자신들을 사지로 내몰 거라 생각지는 않을 게야.”
나카타 유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자네의 야마카와카이가 선두에 서주겠지?”
“……물론입니다.”
“훌륭하군.”
나카타 유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수령이 천천히 걸어 마루에 섰다. 고상하게 꾸며진 정원을 바라보던 수령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지. 공을 세운다면 그만한 대가를 준다. 그건 나의 철칙이지.”
나카타 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저 능력과 권력으로 내리누르기만 했다면 노인은 결코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조일 때는 숨 막히게 조이지만, 그 능력을 보이는 자는 확실하게 우대한다. 그리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그 공 이상의 포상을 내주었다.
그렇기에 두렵지만 따를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럼…….”
나카타 유지가 머뭇대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수령은 이미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을 내주지.”
셋.
셋이라는 말을 들은 나카타 유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넷이면 필승, 하나는 필패다. 셋이면 나쁘지 않아. 확실히 해볼 만하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직은 네가 다루기 벅찰 테니까.”
“제가 감히 그분들을 다루려 하겠습니까? 그저 부탁하고 애원할 뿐입니다.”
“좋은 자세지.”
나카타 유지가 양팔을 벌리며 몸을 돌렸다.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군. 조선에서 오신 분들께 감사드리오. 환영의 의미에서 간단한 주안상을 준비했으니, 함께 즐겼으면 좋겠군.”
이성휘와 김석일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맨쇼다.
이 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것이 저자의 손안에서 놀아났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자, 먼저 가 게시오.”
셋 모두가 안내를 받아 마루에서 사라지자, 수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카게이치.”
“예.”
천장의 음영에서 전신을 검은 의복으로 두른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부복한 사내를 보며 수령이 미간을 좁혔다.
“어찌 생각하느냐?”
“모두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을 겁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판입니다. 모두의 욕망이 수령의 손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역시나 그런가?”
나카타 유지의 말을 들을 때와는 달랐다. 카게이치의 말을 들은 수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진호라…….’
꽤나 많이 들은 이름이었다.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제 곧 그 이름을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수령이 아쉬운 듯 수염을 쓸어내렸다.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다. 내 스스로 시작하기 전에 저들이 등을 떠밀어주는구나. 대동아의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저들도 알게 되겠지.”
카게이치는 대답 없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리석은 놈들.’
모두가 그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
저 조선 놈들도, 홍왕계도, 그리고 나카타 유지마저도.
그의 전언을 듣고 모일 놈들조차 그의 거대한 세력에서 떨어질 부스러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두려운 척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로 좋다. 그게 진정으로 수령이 원하는 바이니까.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놈들처럼 써먹기 편한 장기말이 없지.’
이제 그 장기말로 어떤 판을 그려볼 것인가.
수령이 가만히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벌써부터 서쪽에서 진득한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