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62
#861.
개선하다 (1)
부우우웅.
앙증맞게 생긴 하얀 소형차가 언덕길을 올랐다.
이현주는 액셀을 밟으면서 눈을 찌푸렸다.
‘차 바꿀 때가 됐나?’
총회로 올라가는 도로는 너무 가파르다. 그동안은 나름 잘 버텨주던 그녀의 애마가 요즘 들어 더욱 힘들어하는 것 같다.
“언니가 아직 빠듯하단다. 두 달만 더 버티자, 두 달만.”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금전적으로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껴 쓰고 산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됐다.
어찌 보면 이건 그녀가 자처한 일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이중걸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할 자격이 있었다. 이중걸이 숨겨둔 비자금이나 불법적인 자금처에서 나오는 돈이야 어차피 총회로 돌려줘야 하겠지만, 그가 합법적으로 마련해 둔 재산은 그녀가 상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현주는 미련 없이 그 돈을 총회의 창고로 밀어 넣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돈을 가지면 뭘 하겠는가. 그 돈으로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웃기는 소리.’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아니, 인간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현주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쓸데도 없는 돈이 통장에 쌓여 있는 것보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그녀가 이중걸의 재산을 꿀꺽했다면, 지금 이곳에서 일할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현수는 그녀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는 평생 무인계와는 관련 없이 사치나 부리며 살았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진 덕분에 그녀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넘어 나름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고, 이제는 일의 보람을 느끼는 중이다.
딱 한 가지 단점만 빼면 말이다.
“카드 값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와!”
월급이 입금되는 동시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세상에 수많은 이별이 있지만, 이렇게 슬픈 이별은 없을 것이다.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이와 스치듯 안녕이라니.
이건 비극이다, 비극.
물론 그녀가 받는 연봉이 적은 것은 아니다. 동 나이 대에 비슷한 일을…… 아니, 그녀의 나이 대에 그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하튼 동 나이 대에 나름 잘나간다는 이들과 비교해 봐도 훨씬 많은 돈이 매월 입금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그녀의 씀씀이는 동 나이 대에 비해 훨씬 많은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카드 값이 나올 때마다 기겁을 하고 명세서를 뒤져 보지만, 결론은 항상 같다. 단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주둥아리가 문제요, 이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눈이 문제였다.
카드를 긁는 손에는 죄가 없다.
“이번 달은 또 어떻게 버티나.”
그녀의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총회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제공해 준다는 정도다. 거기서 식사를 하면 식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 그녀의 벌이와 씀씀이에 식비를 줄이는 게 뭐 그리 도움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이현주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흐음.”
검은 세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형차를 타고 다니는 높으신 분들은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 모가지 잘라 버려야 돼.’
강진호와 이현수는 장로와 이사들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탄압을 펼쳤다.
하지만 장로 휘하, 그러니까 그 장로들에게 찰싹 붙어서 꿀을 빨아먹던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큰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강진호와 이현수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강진호의 이유는 간단하다. 강진호는 대가리에게는 가차 없는 사람이지만, 그 휘하에게는 딱히 가혹하지 않다. 영남회도 수뇌부는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지만, 영남회를 구성하는 무인들은 차별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혹하지 않은 게 아니라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 대한 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현수는 강진호와 다르게 그들 역시 과거 장로들의 동조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쳐내지 않는 것은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총회라는 거대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무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대량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총회는 그 특성상 바깥세상에서 놀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썩은 물이지.’
이현주 역시 그들을 지금 당장 쳐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현수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모두 도태되어야 한다. 그래야 총회가 발전할 테니까.
“후우…….”
이현주가 고개를 돌려 총회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곳이라니까.’
이중걸이 실각하고 강진호가 정권을 잡으며 총회는 꽤나 기이한 곳이 되어버렸다.
소년 만화적인 파격과 사회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 혼재하는, 마치 잡탕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빠르게 변화하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개혁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어른의 사정과 암묵적인 인정이 개혁과 동행한다. 이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보며 이현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부르르릉.
그때, 주차장으로 검은 세단 하나가 들어온다. 그녀의 앞을 지나던 세단이 멈추더니, 창문이 내려갔다.
창문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이, 이현주 부장. 오랜만이야?”
부장이라는 말에 포인트가 들어가 있다. 굳이 눈치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저 말이 비꼼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네. 오랜만이네요, 최 부장님.”
최 부장이라 불린 이가 미묘한 미소를 띠고는 이현주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현주는 그 시선만으로도 불쾌해졌다.
“요즘 얼굴 좋네.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남들은 다 죽을 판인데 말이야.”
“네, 좋네요. 더 좋았으면 좋겠어요.”
최 부장이 가만히 이현주를 바라보다가 씹어뱉듯 말했다.
“할아버지 따르던 사람들, 그 제자들, 삼촌 같던 사람들 배신하고 그쪽으로 찰싹 붙으니 살 만한가? 네 할아버지가 저승에서 지금 너를 보면 뭐라고 하시겠어?”
다짜고짜 명치로 치고 들어온다. 하지만 이현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당황하기에는 그녀가 겪은 일이 너무 많다.
그리고 사실 이현수라는 뒤틀린 인간을 시시때때로 상대하는 그녀에게 이만한 비꼼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었다.
“쓰레기랑 말 섞지 말고 올라가라고 하시겠죠.”
“뭐, 이년아?”
벌컥!
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최 부장이 거칠게 차에서 내렸다. 위압적인 덩치를 가진 사내가 이현주를 내려다본다.
“쓰레기?”
“네. 뭐, 거슬리시는 점이라도?”
“……너, 위에서 옹호해 준다고 너무 나대는 것 같은데, 그거 얼마 안 가. 네가 왜 쓰이는 것 같아? 이중걸 손녀도 우리한테 붙어서 주는 사료 받아먹고 개처럼 짖고 있다고 선전하는 거야, 이 등신 같은 년아.”
최 부장이 이를 갈았다.
“남들은 다 너를 보며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혼자 제 잘난 줄 알고 나대고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아는데요.”
“너 얼마 못 가. 그러다가 팽당한다고. 나중에 솥에 들어갈 때, 눈물 질질 짜면서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지’ 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네, 알죠.”
이현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저는 너무 잘 알고 있는데요? 오히려 현실 파악을 못하시는 건 최 부장님 같은데요.”
“뭐?”
“최 부장님, 연세에 안 맞으시게 너무 순진하시네요.”
최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뭐, 저 사람들이 제가 아무 간판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써줄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최 부장님은 그러실 의도가 있구요?”
“…….”
“이중걸의 손녀다. 그래서 선전에 이용한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그것도 훌륭한 스펙 아니에요?”
최 부장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예요. 기업은 능력과 활용 가치를 보고 사람을 뽑죠. 그리고 이용해요. 그 이용의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거죠. 총회는 제 능력과 활용 가치를 보고 자리를 내주고 돈을 주는 거죠. 저는 그걸 제공하는 대신에 높은 연봉을 받는 거고.”
“…….”
“정신 좀 차리세요, 최 부장님. 시대가 바뀌었어요. 이제는 최 부장님이 누구의 일파라는 이유로 자리를 차지하고 돈을 벌어가는 시대가 아니라고요.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에 걸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잘려 나가는 세상이에요. 그리고 그게 너무 당연한 거구요.”
최부장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주 세뇌가 됐군.”
“네,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보통 논리에서 밀린 사람은 인신공격을 하더라고요. 다음은 뭔가요? 너는 원래 멍청했다? 너는 어려서 사회를 모른다? 너는 지금 속고 있는 거다? 아니면 여자라서 뭘 모른다?”
이현주의 눈에 경멸이 어렸다.
“썩은 물은 갈아내야죠. 제 스스로 정수기에 처 들어갈 의지가 없는 썩은 물이라면 더더욱요.”
“…….”
“한때 삼촌이라 불렀던 정을 생각해서 한 번 더 충고를 드리죠. 최 부장님, 그렇게 계시다가 곧 잘려 나가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이제는 그런 시대니까. 그런 꼴 당하고 싶지 않으시면 일이나 똑바로 하세요.”
이현주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버렸다. 등 뒤에서 씩씩대는 거친 숨소리가 똑똑히 들려왔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달려들지도 못할 텐데.
“너만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
‘아, 네에, 네에.’
“너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테니까!”
이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
‘등신들.’
시대가 변화하면 낙오자들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낙오하는 사람들이 힘없고, 배우지 못한 이들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힘이 없고 배우지 못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변화에 적응하려 한다.
오히려 도태되는 이들은 어설프게 힘을 가진 이들이다.
지금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데 왜 바뀌어야 하느냐를 외치는 이들, 변화된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서 스스로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이들.
뒤처지고 도태되고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은 이런 부류들이다. 그래, 저 최부장처럼.
이현주가 고개를 들어 총회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같은 건물이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지금의 건물은 달라진 게 없다. 총회가 위치한 곳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느낌이 든다.
익숙한 곳임에도 익숙하지 않다. 낯익은 곳임에도 낯설다.
이현주는 그 위화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다르다. 분명 달라졌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치열하게 매달릴 것이다. 그래야 이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중걸의 손녀.
그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떼어내고, 인간 혹은 무인 이현주로 인정받는 그날까지.
“후우…….”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었다.
최 부장의 말대로 시작은 이중걸의 손녀라도 상관없다. 시작이야 어떻든 결과를 내놓는다면 모두가 그녀를 인간 이현주로 바라볼 테니까.
“오늘도 힘내볼까.”
이현주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