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88
#887.
섬멸하다 (2)
“끄으으윽.”
고통이라는 것은 이상한 면이 있다.
고통을 받는 당시에는 괴롭고 또 괴롭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을 받는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언제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고문을 받는 이는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뱉어내서라도 고통이 끊기기를 바라고, 병이 있는 이들은 진통제를 먹어서 고통을 약화시키기를 원한다.
하지만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지금의 노부오처럼 말이다.
“후욱…….”
그는 지금 고통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의 몸을 짓이기던 나카타 유지의 무지막지한 손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노부오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지는 못했다.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끝났지만, 그의 정신에 가해지는 고통은 조금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잠시 그에게 손을 뗐을 뿐이다. 노부오는 저들의 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들은 배신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큭큭큭.”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 개 같은 새끼들을 욕하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겠는가. 해주는 것도 없이 아랫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주제에 당연하다는 듯이 충성을 요구하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무슨 충성을 하란 말인가.
그럼에도 노부오는 저들을 욕할 수 없었다. 그 충성을 맹세하고 스스로 그 아래로 기어 들어간 것은 노부오 자신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어야 한다. 걸을 수 없는 길이라면 걷지 말았어야 한다.
떨어지는 오물을 묵묵히 감내하고 걸을 게 아니었다면, 그 오물이 더럽다고 절벽 아래로 뛰어들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그 길에 들어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오물을 감내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노부오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노부오가 무슨 자격으로 저들을 욕하겠는가. 그가 저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 역시 당연하게 배신자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을 것이다.
“끄으…….”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밀어 넣은 것은 노부오 자신이다. 그러니 누구도 욕할 수 없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크흐흐흐흐.”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은 문지른다.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 있다. 바닥에 잘린 손가락이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봉합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리고 그깟 손가락은 이제 문제도 아니었다. 곧 죽을 놈에게 손가락이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부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가 저들에게 연락을 했다는 걸 나카타 유지가 알아버린 이상, 나카타 유지는 반드시 그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반도에 접어드는 순간, 기습을 하게 만들려는 그의 계획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럼 남은 건 무엇일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여 반도에 상륙하거나 일본 열도로 돌아갈 것이다. 전자가 선택된다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도로 돌아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선택을 한다면, 노부오에게는 최악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시간을 가지고 느긋하게 노부오를 괴롭힐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데 있어서는 저들을 따라갈 이들이 없다. 노부오 역시 몇 번 그런 것을 겪은 적이 있었다. 저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인간을 손에 넣었을 때,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불행한 것은 그 잘 알고 있는 일을 겪을 이가 바로 노부오라는 점이다. 저들의 눈에는 지금 노부오가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생선처럼 보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죽이지 않고 얇게 회를 떠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겠지.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게 낫지 않을까?
노부오가 낮게 웃었다.
혀를 물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도시 괴담일 뿐이다. 인간의 육체는 의외로 강해서 혀를 깨무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냥 혀가 잘려 나갈 뿐이다.
혀를 물게 되면 혀의 근육이 말려 올라가 목을 틀어막는다느니, 과다 출혈로 죽는다느니 하는 것은 그냥 꿈같은 이야기다. 그렇게 간단히 죽는 방법이 있다면 감옥에서 자살을 막기 위해 벽을 우레탄으로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부오의 몸이 축 늘어졌다.
팔다리가 묶여 있는 지금 그에게는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는다는 선택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저들에게 모든 운명을 내맡긴 채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왜 그랬을까?
노부오의 머릿속에서 그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대체 그 모든 것이 노부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기에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말인가.
결국은 이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반쯤은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무슨 배짱으로 그런 모험을 저질렀단 말인가.
노부오를 더욱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설사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노부오가 저들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걸 나카타 유지가 몰랐다면, 지금쯤 노부오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도착하는 그곳이 사지라는 것을 노부오만이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해서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게 옳은 건지를 고민했겠지.
웃음이 난다.
결국 노부오는 이 정도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만한 의지가 없다. 누군가는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노부오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저 소시민에 불과하니까.
뚜렷한 목적도 의지도 없는 소시민.
그래.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 불행을 불렀다.
노부오가 벽에 머리를 댔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머리로 전해진다.
이 서늘함.
노부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죽는다.
그래, 죽는다.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저들은 결코 노부오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울고불고 빈다면 그 모습을 즐기며 죽일 것이고, 이를 악물고 버틴다면 그가 눈물을 뺄 때까지 고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고통을 받을 대로 받다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병신같이 죽지는 말자.’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찌질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음을 피할 수 있음에도 당당히 자신의 신념으로 죽음을 택하는 열사들처럼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쓰레기 같은 죽음을 맞지는 않아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말이다.
‘절대 비굴하게는 안 죽는다.’
그렇게 다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노부오의 몸이 튕겨 나갔다.
“뭐, 뭐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갈라진 목이 다시 터지며 피가 터진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몸이 튕겨 나가고 귀가 얼얼할 정도의 폭음이 터져 나온다. 어둠으로 가득 찬 방 안이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쿠웅! 쿠웅!
바닥에 처박힌 고통이 채 머리로 밀려 올라오기도 전에 연이어 충격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노부오가 눈을 번쩍 떴다.
배가 통째로 뒤흔들리는 진동이 그를 당황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공격인가?
아니, 절대 그럴 리는 없다. 이건 여객선이다. 아무리 한국이 무대포라고 해도 민간인이 타고 있는 여객선을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뢰라도 직격했다면, 절대 이 정도 충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배가 기우는 느낌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귀를 기울인다.
“……아!”
들려온다.
비명 소리, 그리고 고함 소리.
저 먼 어딘가에서 혼란이 가득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이 배에!
* * *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곁에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뉴스만 틀어봐도 하루에도 수십 명이 자신의 잘못과는 상관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그 죽음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남의 불행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럼 인간은 언제 자신의 곁에 죽음이 와닿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는가.
바로 이럴 때다.
촤아아아악!
물이 세차게 뿜어지는 소리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채찍으로 고여 있는 물을 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리의 정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휘두른 검이 인간의 육체를 자르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물러선다.
정신없이 뒤로 물러난다.
양다리로 갑판을 밀어젖히고, 바닥에 닿은 손으로 몸을 뒤로 날린다.
알 수 있으니까.
지금 바로 곁에 죽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음을 실감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웃고 함께 떠들던 이들이 시체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면 된다.
그냥 시체도 아니다.
멀쩡하던 이의 목이 잘려 하늘로 솟구치고, 몸이 반으로 잘려 토막 난 팔과 허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갑판을 붉게 물들인다.
지옥도.
세상 어느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생생하기 짝이 없는 지옥도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런 광경이 눈에 들어오면 인간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지금 자신의 곁에 지옥이 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찰방.
헛웃음이 나온다.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너무도 산뜻하게 들린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의 괴리가 너무 극심하여 멀미가 날 지경이다.
피 웅덩이를 밟으며 한 사내가 걸어온다.
아니, 저자를 사내라 지칭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 사내라는 것은 인간의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보라.
저자를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전신을 피로 물들인 혈인(血人).
일부러 피를 발라 분장한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과,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카락의 끝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만 보더라도 저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 모습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저런 몰골로 저리 웃을 수는 없다.
붉고 검게 물든 형태 사이로 유일하게 보이는 하얀 부분.
사내의 입가로 드러난 새하얀 이가 심장을 멎게 만들 것처럼 섬뜩하다.
“아…….”
사내가 걸어온다. 아주 천천히.
그렇겠지. 급할 필요가 없겠지.
이곳은 배 위다. 그리고 이곳은 바다 위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그러니 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내에게 이곳은 잘 차려진 만찬장과 같은 곳이니까.
사내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멈춰 선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지만,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사신이 눈앞에 서 있는데 누가 바지 따위를 신경 쓰겠는가.
사내, 그러니까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회는 줬어.”
“아으…….”
서걱.
기이한 일이다.
지금 그의 목에서 난 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사내는 공포에 떨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지도 않았다.
그가 느낀 것은 차라리 거대한 해방감이었다.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의 등과 머리가 없는 목을 보는, 일생에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경험을 하는 와중에도 사내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떨지 않아도 되니까.
때로는 죽음이 인간을 구해주기도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