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92
#891.
상대하다 (1)
“…….”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눈앞에 맞닥뜨렸을 때, 인간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경악하고, 또 누군가는 분노에 빠진다.
하지만 나카타 유지는 그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나카타 유지는 결국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황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는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상황에 맞는 정확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빌어먹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그럴 수가 없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고도 침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심장이 없거나 머리가 없거나, 몸이 기계로 만들어져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등 뒤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들 역시 보고 있다. 저 악귀 같은 놈들이 날뛰는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이 누구인가.
대일본제국의 정예들이다.
중국도 아닌, 한국 따위는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쓸려 나가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다.
그것도 단 네 명에게.
“조, 조선 놈들이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은근히 나카타 유지를 재촉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카타 유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라고?
뭘?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 이상 뭘 어떻게…….
저들은 소수다. 그래, 불과 네 명뿐인 소수다.
세상에는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는 전법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다수가 소수를 상대로 쓰는 전법 따위는 포위진 외에는 딱히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
필요가 없으니까.
다수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전략이고 전술이다. 굳이 기상천외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수의 우위를 바탕으로 밀어붙이면 깔끔하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이 다수의 최대 강점이 아니던가.
하지만 적어도 이 배 위에서만큼은 다수가 다수가 아니었고, 소수가 소수가 아니었다.
천에 가까운 인원들이 동시에 소수를 상대하고 있다. 그런데도 뒤로 밀려나고, 달아나고, 패닉에 빠져 울부짖는다.
나카타 유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터진 그의 입술로 진득한 피가 흘러내린다.
‘빌어먹을.’
간과했다.
아니, 간과했다기보다는 파악하지 못했다.
수라는 것은 서로의 격이 맞을 때,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수천 마리의 개미와 한 마리의 코끼리를 비교할 때, 그 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게나 강하다는 건가? 이렇게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머리로는.
강진호는 이미 홍왕과 싸우고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중국의 쟁쟁한 무인들을 제 손으로 꺾었다.
저기에서 강진호와 함께 날뛰고 있는 바토르 역시 강진호가 자신의 손으로 꺾고 거둔 이가 아닌가. 그 모든 사실을 나카타 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체감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했다.
나카타 유지가 어찌 알겠는가.
홍왕이 얼마나 강한지.
그 홍왕과 동수를 이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귀로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람이 용이 얼마나 강한지 알겠는가. 용과 유니콘이 맞붙으면 누가 이기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는가.
나카타 유지에게 홍왕은 그런 존재였다.
강대하고 위대한 자, 그리고 더없이 강한 무인.
그런 막연한 개념으로는 홍왕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다. 그의 강대한 권력과 태산도 무너뜨릴 내력을 실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강진호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 수 없다.
강진호의 힘은 오직 홍왕이라는 잣대로만 잴 수 있다. 하지만 홍왕이 어떤 이인지 모르는 나카타 유지가 홍왕을 잣대로 활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카타 유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촤아아아악!
검이 휘둘러진다.
허공으로 목이 치솟고, 피 보라가 몰아친다.
“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저게 대체 무슨 광경인가.
나카타 유지는 일본 내에서도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지금이야 모두가 그를 인정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무력이 부족한 그가 이 위치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그건 수라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무인치고 피와 죽음을 친구처럼 끼고 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나카타 유지는 자신이 겪은 일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지금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무인계에서 강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압도적인 위력을 발하는지 모르는 나카타 유지가 아니다.
하지만 저건 결코 그런 광경이 아니었다.
도륙, 혹은 도살.
무를 가진 무인과 무인이 서로 맞부딪치는 광경이 아니다. 그저 일방적인 살육일 뿐이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성인과 걸음마도 못 뗀 아이를 맞붙여 놓아도 이런 일방적인 살육전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
신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악마, 악마라…….
웃기는 말이다.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하고, 더없이 한심한 표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지금 강진호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이상으로 강진호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악마가 날뛰고 있다.
움직이는 곳마다 피 보라가 인다. 이미 흠뻑 뒤집어쓰다 못해 피로 이루어진 욕조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전신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
한 걸음을 내딛고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의 옷가지에서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하지만 옷에서 튀는 피보다 시신에서 뿜어지는 피가 더 많아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바닥.
강진호가 지나간 자리에 피가 고인다. 물이 빠질 곳이 없는 갑판 위는 이미 커다란 피의 욕조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턱이 덜덜 떨린다.
오연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럴 것이 아니라 뭔가 지시를 내려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카타 유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이런 것을 압도라고 부르겠지.
상대에게 압도당해 버린 자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정상적인 움직임도 취할 수 없다. 마치 전신이 진득한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댈 뿐이다.
“다 놀랐나?”
그런 나카타 유지를 현실로 끌어 올린 것은 나직한 목소리였다. 나카타 유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다. 그곳에 이성휘가 서 있었다.
“이성휘.”
“그쯤 놀랐으면 됐으니, 이제 슬슬 대책을 마련해 보지그래?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게 되면 돌이킬 수도 없어질 텐데.”
이성휘의 목소리에 이죽거림이 어려 있었다.
평소에는 반대다.
이죽거리는 쪽은 나카타 유지였다. 이성휘를 상대할 때, 그에게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급한 쪽은 이성휘였지, 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처지가 역전되었다.
“어, 어떻게…….”
“맛이 갔군.”
이성휘가 나카타 유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나카타 유지가 아무리 무력으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고 한들, 그건 동급인 이들의 수준에 비하면 무력이 떨어진다는 소리이지, 이현수처럼 반편이 무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무례를 제지하지 못할 만큼 그는 지금 넋이 나가 있었다.
이성휘가 나카타 유지를 확 잡아당겼다.
“봐라.”
그가 앞을 가리켰다.
“보이나?”
나카타 유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와 바토르가 날뛰고 있고, 그 상대가 되고 있는 이들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바빴다. 순식간에 전염된 공포는 모두를 패닉에 빠뜨리고 있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다.
누군가 달아나는 모습을 본다면 사람은 이유를 따지지 않고 달아나는 대열에 동참한다.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사람들이 달아나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뒤쪽도 그 대열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앞을 채우고 있는 이들보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은 그들이 처할 상황 역시 별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도망치는 게 아니라면?
눈물을 줄줄 쏟고, 네발로 기어서라도 달아나기 위해서 악을 쓴다면? 달아날 길이 열리지 않으면 동료를 칼로 베어내서라도 달아나려고 한다면?
누가 그 상황에서 담담할 수 있겠는가.
갑판 끝에 선 이들은 망설임 없이 바다 위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강진호와 바토르를 직접 상대하느니, 차라리 일본으로 헤엄쳐 돌아가는 쪽을 택한 것이다.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 방법은 무모하지만, 적어도 시도의 여지라도 있지 않은가.
저 미친놈들을 상대로 칼을 뽑는 건 시도나 도전이라 하지 않는다. 그건 만용이고, 미친 짓이다.
“저게 강진호다.”
이성휘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움켜잡은 나카타 유지의 머리를 강제로 돌려 강진호를 보게 했다.
나카타 유지의 몸이 움찔했다.
피 보라에 휩싸인 강진호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온다.
어두운 갑판 위.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세상.
하늘도, 바다도 모두 검게 물들어 버린 세상에 강진호가 동화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사신이 세상에 그 모습을 언뜻언뜻 드러내는 광경처럼 보인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차라리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저건 절대 환상이 아니었다.
저게 환상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허리가 갈리며 비명을 지르는 자들이 있을 리 없으니까.
“말했지, 강진호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
“인간이란 결국 제 눈으로 보고, 제 몸으로 겪어야 믿는 것들이지. 적당히 네가 전력만 만들 수 있으면 강진호의 목을 따는 것은 우습다고 여겼나? 몇 년 내로 한국의 전력이 일본을 압도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하면서도 사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나?”
나카타 유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성휘의 말은 그의 속내를 명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강진호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나카타 유지는 강진호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했다.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
강진호가 그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일본이 강진호가 제멋대로 하도록 몇 년 동안 내버려 둬야 벌어지는 일이었다.
일본은 절대 강진호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강진호는 죽는다. 그게 나카타 유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카타 유지는 지금 이 순간 깨닫고 말았다.
‘몇 년?’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저걸 몇 년 내버려 두면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강진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목에 칼을 바짝 들이밀고 있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는 죽느냐, 죽이느냐다.
나카타 유지의 눈에 핏발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