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899
#898.
정화하다 (3)
바다가 격전지로 바뀌었다.
어찌 보면 해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해전이란 결국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통칭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바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통상적인 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배에 오르느냐, 오르지 못하느냐.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간단한 문제가 너무도 간절한 이들이 있었다.
“올라가! 올라!”
“밑에서 싸우지 마! 올라가야 해! 아니면 다 죽는다!”
배 위에서 막아내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 차디찬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바다에 뛰어들 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파트 고층에 사는데 집에 불이 났다면?
입구가 막혀서 불길이 점점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아파트 고층에서 탈출하려다 실족하여 떨어진다면 거의 대부분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살아날 확률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가만히 앉아서 불에 타 죽는 결말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운에 목숨을 맡겨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들의 심정이 딱 그랬다.
배 위에 있으면 틀림없이 죽는다. 그러니 도망가야 한다. 바다에 뛰어드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지만,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 게 더 위험하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은 정당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실족하여 고층에서 떨어지는 이들이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을 하겠는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무모한 선택을 내린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냐, 이 말이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다로 뛰어들 때까지는 좋았다. 합리적이고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차가운 물이 육신을 적시기 시작하자 실감이 났다.
살아 돌아갈 수 없다.
파도가 밀려오고 한기가 몸을 파고드는 순간, 느껴진다.
일본.
너무나 멀고도 멀다. 인간이 헤엄을 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아무리 그들이 무인이고 평범한 인간의 수십 배를 더 헤엄칠 수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리고 이 차가운 수온은 체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제야 모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서서히 물에 빠져 죽는 결말뿐이라는 것을.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다른 배였다.
그들이 타고 온 여객선만큼 크지는 않지만, 적당한 크기의 배. 오르려고 한다면 수백은 더 오를 수 있는 배들.
저곳에 모두 올랐을 시에 배가 버틸 수 있냐고?
알 게 뭔가.
당장 죽어야 할 판인데.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저기에 있다. 설사 너무 많은 이들이 오른 탓에 배가 뒤집어지더라도 살아 있는 순간을 조금은 더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뭘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
그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얼굴로 밀려 들어오는 파도와 어둠이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들을 죽여 없애고 저 배를 쫓지 못하면, 여기서 모두가 죽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적어도 싸워보고 죽어야 한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끌어내!”
“다 죽여 버려!”
무인들의 싸움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원초적인 전쟁이었다. 배에 오르려 달라붙는 이들에게 병장기가 들쑤신다. 팔이 잘려 나가고 목에 칼이 박히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뛰어올라!”
이대로는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들이 작전을 바꾼다. 스스로의 몸을 발판으로 내주고, 동료가 자신을 밟고 배 위로 뛰어오르게 만든다.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들은 가능했다. 그들은 일본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니까. 발을 디딜 곳만 있다면 얼마든지 저 높은 갑판 위까지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다.
누군가는 기어오르고, 누군가는 솟아오른다.
해전. 그래, 해전이다.
하지만 실상은 기묘한 공성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방어하는 측이나 공격하는 측이나 배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치열하고도 잔인한 공성전이 벌어진다.
새하얀 포말이 붉게 물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구분이 잘 가지 않을 뿐, 이미 바다는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린 후였다.
깔끔한 전쟁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오직 한 곳.
바다가 모두 치열한 전쟁의 흐름으로 변한 뒤에도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나카타 유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지금 배 아래 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카타 유지는 못내 그들이 답답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조금만 기다리면 될 일이다.
배에서 뛰어내린 놈들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그들도 살기 위해 택한 방법이니까. 괜히 강진호를 막겠답시고 설치다가 희생을 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전력을 온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훌륭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럼 기다렸어야지.
나카타 유지를 위시로 한 대장급들이 강진호들을 쓰러뜨리고 배 위를 탈환하는 것을 기다렸어야지. 그럼 그 뒤에 다시 배에 오르면 끝 아닌가.
그런데 그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저런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해 대다니.
멍청하고, 또 멍청하기 짝이 없다.
저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긴다고 해도 피해가 너무 큰 싸움이었다. 애초에 공성이라는 건 방어를 하는 쪽이 몇 배는 더 유리한 싸움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열 배가 넘는 대군이 공성에 실패하기도 한다.
전력이 열 배 이상이니 괜찮지 않겠냐고?
천만에.
그 몇 배의 차이가 난다는 개념조차도, 공성에 드는 시간을 이쪽에서 조절할 수 있고, 휴식과 공격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를 전제로 한 것이다.
단시간 내에 무조건 배를 탈환해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발판조차 없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온갖 방해를 뚫고 배 위에 올라야 한다.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학살.
일방적으로 죽어 나간다. 군을 지휘하는 입장이라면 그 누구도 이런 병신 같은 전쟁을 치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저놈들이 멍청하다고 해도 그 정도의 생각도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왜 저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까?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카타 유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그그극.
검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너무도 섬뜩하게 그의 귀를 자극하고 있었다.
전신을 피로 물들인 강진호가 양손에 든 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나카타 유지는 그 광경을 보며 심혼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저자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미 충분히 느꼈다.
하지만 이 순간, 나카타 유지는 새삼 한 가지를 더 느껴야 했다.
저놈은 전투에 관한 한은 천재라는 말로도 미흡하다.
어떤 전략을 구사하느냐.
얼마나 효율적으로 싸우느냐.
그런 게 아니다.
전술가의 영역으로 전투를 논하는 게 아니었다. 검을 잡고 휘두르는 전사의 영역에서 논해야 할 일이다.
강진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상대가 가장 공포를 느끼는지를 간파하고 있다.
저 행동 하나, 저 표정 하나, 손짓 하나.
머리로 계산하고 나오는 게 아니다. 어쩌면 지금 강진호는 자신이 상대를 위협한다는 자각조차 없을 수도 있다.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산 없는 움직임이 지금 나카타 유지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그그극.
저 검이 끌리는 소음조차도 그의 심장을 옥죄어온다.
이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렵고 공포스럽다.
으득.
이를 악다문 나카타 유지가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그렇기에 죽여야 한다.’
죽여야만 그들이 살 수 있다.
지금 나카타 유지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영역까지 끌어내려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미학의 일종이었다.
전력과 전력을 준비하고, 그 전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한다. 그리고 상대의 허를 찔러내 이쪽의 이득을 극대화시키고 상대의 전력을 갉아먹는다.
바둑이 그렇고, 장기가 그렇다.
서로 대등한 전력으로 맞부딪치는 게 아니라는 점만 뺀다면 애초에 전쟁과 장기는 그리 다르지 않다. 애초에 장기가 전쟁을 본따 만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달랐다.
강진호는 그의 발목을 움켜잡고, 그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전술과 전략의 예술.
머리와 머리가 맞부딪치는 전술의 영역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원초적인 영역으로 강제로 돌입한다.
전술?
그따위 것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리 기기묘묘한 책략을 짜낸다고 해도 저자를 막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상대의 어디를 타격할까 하는 고차원적인 고민 이전에 누가 희생을 무릅쓰고 저자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판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카타 유지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전력이 안 된다.
이들 중 가장 약한 그로서는 전투에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는 다른 것을 해야 한다.
“준비.”
나카타 유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결코 강진호를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이럴 때이기에.
전술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영역으로 끌어내려졌기에,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써야 한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무기니까.
누구나 자신의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카타 유지의 눈이 빠르게 뒤를 훑었다.
강진호에게 압도된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강진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지배한 전장을 짓누른다. 문제는 그 압력에 짓눌리는 이들은 아군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바토르도, 위긴스도, 그리고 방진훈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진호를 따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저들이 강진호의 좌우를 지키기 시작하면 확률은 극도로 희박해진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모든 힘을 다해서 강진호를 덮쳐야 한다.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처가 이쪽에서 나온다면, 천하의 강진호라도 당황할 것이다. 그 한순간을 노린다.
처음부터 이거였다.
그가 이곳으로 오며 준비한 계획.
강진호는 반드시 혼자 나선다. 결코 뒤를 기다리지 않는다. 차례차례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을 상대하다 하나하나 쓰러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 그대로 당해주지 않는다. 그 오만함이 강진호를 죽일 것이다.
나카타 유지가 눈을 부릅떴다.
“지…….”
그가 원래 하려던 말은 ‘지금이다!’였다.
신호를 주기만 하면 미리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이곳의 모두가 일제히 강진호를 덮칠 것이다. 모두가 목숨을 도외시하고 그에게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설사 이번 일격에 반이 넘는 이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강진호를 죽일 수 있다면 절대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뭔가 희뿌연…….
명확하게 알 수 없는 희뿌연 무언가가 작은 점처럼 그의 시야 한중간에 나타나더니, 이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이윽고…….
나카타 유지의 뇌가 그 희뿌연 것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검의 끝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피할 수 없게 된 후였다.
‘이…….’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나카타 유지의 얼굴을 강진호의 검이 가르고 지나갔다.
섬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