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10
#909.
침몰하다 (4)
“끝났군.”
위긴스는 가볍게 몸을 돌렸다.
이미 갑판 위는 정리가 된 후였다. 굳이 위긴스의 힘이 필요하지도 않다. 애초에 강진호가 온 이상, 이곳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에도 위긴스가 강진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는 온갖 기기막측한 것들이 난무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함이라는 게 모든 것을 초월한다지만,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분야를 처음 경험하는 이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일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이는 위긴스다.
마법사라는 그의 특성상 일반적인 무인들보다는 대처 능력이 뛰어난 편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이곳에 필요하지 않다.
‘생각보다 멍청했어.’
만약 위긴스가 일본의 원정대를 꾸리는 입장이었다면, 위긴스는 반드시 일본만의 특성을 가진 술사를 따로 편성했을 것이다. 변수라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니까.
스스로 그 변수를 포기했을 때, 이 전쟁은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르겠군. 저들이 멍청한 건지, 아니면…….”
위긴스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강진호의 뒷모습을 살핀 위긴스가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무인계의 수장 자리는 세습이 아니다. 그 시대에서 가장 강한 자가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강함은 단순히 무력의 강함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원탁만 봐도 그렇다.
마스터는 분명 강하다. 하지만 마스터가 유럽에서 가장 강한 무인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들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강진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은 이중걸과 김석일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 무인계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한국에서 가장 강한 무인은 아마 산속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었을 확률이 높다. 조직의 운영이라든가 계략 같은 것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무학만을 일로정진한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강하다는 건 너무도 빤한 사실이니까.
일본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수령이라는 자가 신니치카이의 수장이 맞다면, 그 위치는 절대 무력만으로 손에 넣을 수 없다.
무인계에서는 무력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무력이 전부는 아니다. 힘만 센 멍청이는 결국 머리를 쓰는 이에게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저들 역시 멍청해서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실감할 수 없던 거겠지.
강진호가 얼마나 강한지.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위긴스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강함이다. 그가 처음 보았을 때의 강진호도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강진호는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한다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더 강해졌다.
위긴스조차 이해하기를 포기한 일을 저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건 마냥 저들을 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이번 실패로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만약 저들이 여력이 남아 다시 한 번 한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면, 이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원정대가 꾸려질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여력이 있을까?’
여기서 이들이 모두 죽어 나간다면, 일본이 받는 피해는 어마어마하다.
전쟁은 산수가 아니다.
전력의 10%가 손실된다면 게임에서는 사소한 피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실제 전쟁에서 10%의 전력 손실은 전쟁 포기를 고민해야 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저들이 입은 피해는 10% 이상이다.
이만한 전력을 잃고도 이 이상의 원정대를 꾸린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의 무인계가 파멸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만한 의지가 저들에게 있을까?
‘모르지, 그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이차 원정이지만, 위긴스는 세상 일이 절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전쟁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일부 지배자의 광기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럼 위긴스는 뭘 해야 할까?
“슬슬 마무리를 해볼까.”
위긴스가 팔을 뻗어 노부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미 기울기 시작한 배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난간을 붙잡고 있던 노부오가 살짝 경기를 일으키며 위긴스를 올려다보았다.
위긴스는 그 광경을 보며 고소를 지었다.
‘정신이 나갔군.’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이 배에 난간이라고는 노부오가 잡고 있는 곳 말고는 남아난 곳이 없다. 쇠로 만들어진 갑판이 통째로 우그러지고 부서지고, 구석의 모서리 부분은 하나같이 뭉툭하게 깎여 있었다.
위긴스에게는 별것 아닌 광경이지만, 노부오에게는 지옥과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자, 조금 편한 곳으로 가보세.”
위긴스가 노부오를 잡고 위로 솟구쳤다.
“우아아아아아앗!”
노부오의 입에서 비명성이 터졌다. 그들이 내려선 곳은 기울어진 배의 선두 부분이었다. 배가 뒤쪽으로 기울다보니 앞부분이 위로 솟구쳐 있다.
마치 높은 탑처럼 솟아오른 선두에 올라선 위긴스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생각보다는 깔끔한데.’
이곳이 육지였다면 시체와 피로 난장판이 벌어졌겠지만, 바다이다보니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있는 건 영 보기 좋지 못했지만, 시신들이 아래로 가라앉아서인지 사람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 말고는 평소의 바다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 가득한 사람들이 그들의 배 쪽에 몰려 있다.
“이보게.”
노부오의 시선이 위긴스에게 획 돌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가?”
“……예?”
“그랬으면 좋겠는데.”
위긴스가 빙긋 웃고는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쉬이이이익!
그러고는 손끝에서 무언가를 뿜어냈다. 위긴스가 뿜어낸 것이 위쪽으로 쏘아지더니, 이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폭발.
아니, 폭발이라기보다는 폭죽에 가까웠다. 굉음과 함께 화려한 빛들이 허공에서 명멸했다. 조금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만,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 위긴스의 목적에 부합했다.
머리 위에서 터진 폭죽을 본 이들이 시선을 위긴스에게로 향했다.
“자, 지금부터 일본어로 말을 해주면 되네. 따라 하게. 전쟁은 끝났다.”
노부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 전쟁은 끝났다!
확성 마법을 통해 목소리가 우렁우렁 퍼져 나갔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바다에 그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듯 말이다.
하지만 바다를 채우고 있는 이들에게 말이 어떻게 전달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말에 실린 의미였다.
끝났다.
믿고 싶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이미 거의 기울어 선두만이 솟아 있는 여객선 위에 위긴스가 홀로 서 있다. 그 말인즉, 저곳에 위긴스가 오르는 걸 저지할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너무도 빤한 일이다. 모두 죽었겠지.
배 위에 남아 있던 이들은 각 구미의 수장과 최정예들이다. 그런 이들이 모조리 죽어 나갔다는 건 정말 이 전쟁이 더는 이어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말의 의미가 피부로 와닿는 순간, 더 이상 저항할 의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러니 의미 없는 저항은 그만두도록. 남은 이들을 다 죽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마음이 고와서가 아니니까. 짜증이 귀찮음을 넘는 순간, 친절하게 숨통을 끊어줄 수 있네.
무심한 목소리.
한 번 번역된 말이다. 그렇기에 말의 의미를 억양으로 담아내지 못했다. 기계적인 어투로 말이 퍼진다.
이 상황과 맞물려 그 말투가 시너지를 일으켰다.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 들었다면 조금 우스울 수도 있는 말이, 지금 상황에서 들리니 더없이 소름 끼치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스르륵.
손을 놓는 이들이 생겨난다.
그와 함께 한둘 정도가 먼저 손을 놓고 배에서 떨어져 나가자 다른 이들도 우수수 배에서 멀어졌다.
“휴…….”
이명환이 그 광경을 보며 이마를 훔쳤다. 식은땀이 턱 끝까지 흐르고 있었다.
‘좀 더 끌었으면 위험했겠어.’
배 위로 올라오는 이들을 저지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냐마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오르는 이들 역시 무인이다. 그리고 저들의 능력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배 위에서 공성전을 치르는 형식이 아니라, 평지에서 만났다면 절대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이명환이 이리 느낀다면, 다른 배는 더 심각한 상황까지 몰렸을 게 빤했다.
그런 와중, 적절한 타이밍에 위긴스가 저들의 의지를 꺾어준 것이다.
하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뭐? 끝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뭔 소리야! 이제 겨우 시작해 볼 참이었는데!”
바다 위에 동동 떠 있으면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 물 위에 떠 있는 상체를 보면 마치 고래가 물을 뿜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바토르가 선두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쯧쯧, 그러게 누가 내려가라고 했나.”
위긴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스스로 해놓고 남 탓을 하는 분이시다.
“자, 계속하세나.”
“예? 아, 예!”
노부오가 침착하게 위긴스의 말을 기다렸다.
― 배에서 모두 물러나라. 너희의 처분은 회주님께서 정할 것이다.
그 말이 결정타였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일본의 무인들이 딱히 총회의 체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회주라고 지칭되어야 할 사람이 누군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강진호.
그 악마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몸에서 힘이 풀렸다.
저 배 위에서 강진호를 막으려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면, 그 악마가 풀려났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배를 탈취하기 위해서 전쟁을 지속한다면, 이제 그들이 강진호를 상대해야 한다.
그들은 강진호를 피해서 바다로 뛰어든 이들이다. 몸에 차가운 바닷물이 닿는다고 해서 사라졌던 의지가 다시 돌아올 리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전쟁은 끝난 것이다.
배에서 무인들이 멀어져 갔다. 그와 동시에 바다가 싸늘한 침묵으로 물들어갔다.
‘기다리고 있군.’
죽고 도망가서 끝난 전쟁이 아니다. 서로가 전력을 보존한 채 끝나는 전쟁이다. 그럼 이 전쟁에는 마무리가 필요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기에 지금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전쟁을 마무리할 사람을 말이다.
“꽤나 오래 걸리시는군.”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겠지.
전쟁의 와중에 저런 행동을 하는 게 그리 옳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강진호인 것을.
위긴스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갑판의 한구석에 있는 강진호를 본 위긴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살짝 돌렸다.
한 번씩 저런 강진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저 양반은 내면에 괴물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괴물이 한 번씩 저렇게 고개를 치켜든다.
괴물을 내보인 강진호는 절대 자극해서는 안 된다.
위긴스는 입을 닫고 가만히 강진호를 기다렸다. 모든 바다 위의 사람이 침묵한 채 강진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