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11
#910.
침몰하다 (5)
뚝, 뚜욱.
강진호의 손끝.
길게 손톱처럼 자라난 마기의 끝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 광경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미 강진호의 전신도 피로 온통 물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다른 점 하나.
강진호의 전신에 묻은 피는 이미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다. 하지만 손끝에서 떨어지는 피는 전혀 말라 있지 않았다.
손톱 끝에 묻은 피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는 이 피가 지금 막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끄…….”
실낱같은 신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것 같은 신음 소리였다. 하지만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 보니 그 소리는 더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물론 그 신음의 주인공은 나카타 유지였다.
강진호는 혈인이 되어 있는 나카타 유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그를 살아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가만히 나카타 유지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어때?”
붉은 것들 사이에 가느다란 선이 생겨난다. 핏물로 젖어버린 얼굴 사이로 나카타 유지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눈동자는 강진호를 포착하는 순간,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주, 죽…… 죽…….”
잘려 나간 혀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여력이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제대로 말이 나오지 못했다.
강진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죽여 달라는 말이겠지.”
아주 천천히 그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멍청한 말이지.”
“…….”
강진호가 씹어뱉듯 토해냈다.
“너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 기회가 다른 이들에게도 주어졌나?”
“…….”
“죽고 싶은 놈을 죽여주는 건 별일도 아니야. 인간이란 결국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너는 저들에게서 그 선택권을 박탈했다는 거야.”
나카타 유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걱정할 것 없어. 나도 더는 할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를 죽여주지도 않을 거야. 여기서 서서히 죽어가라. 네가 한 짓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면서 말이야.”
“끄…… 끄으…….”
강진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가파른 절벽처럼 변해 버린 갑판 위를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짐승 같은 절규가 작게 들려왔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나카타 유지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볼일이 없다.
머릿속에서 나카타 유지를 지워 버린 강진호가 갑판을 거슬러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긴스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 순간, 위긴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강진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선두에 올라섰다.
“뭐 하나?”
“원래 부하는 상관을 내려다보며 기다리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다른 예라도 표해야겠지요.”
“……쓸데없는 예의는 접어두는 편이 좋겠군.”
“물론 로드께서 효율을 중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로드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은 제 입장도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음?”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강진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좀 씻어야겠군.”
“물론 좋은 생각이십니다. 마침 위치도 바다이다 보니 물이 가득하지요. 다만…… 지금 주목하는 이들이 많으니 바다로 뛰어들어 씻는 것만은 참아주십시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위긴스가 의수를 들어 올렸다. 의수가 살짝 빛난다 싶더니, 머리 위에서 거대한 물방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일제히 강진호의 몸에 달라붙었다.
강진호는 거부하지 않았다.
위긴스가 그에게 해를 끼칠 리는 없으니까. 물줄기가 그를 훑고 지나가자 강진호의 몸은 언제 피투성이였냐는 듯 깨끗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찢어진 의복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드.”
“음?”
“이제 끝내셔야 합니다.”
위긴스가 바다 아래를 가리켰다.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자들, 그리고 배 위에 올라타 있는 자들. 모두가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강진호가 슬쩍 눈을 찌푸렸다.
‘기이한 광경이군.’
전쟁이 끝날 때 그가 보는 광경은 둘 중 하나였다.
끝도 없는 시체로 뒤덮여 있는 세상에 오연히 서 있거나, 바닥에 엎드린 적들을 오시하는 것.
하지만 이 모습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무리가 필요한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강진호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에…….”
전쟁을 했고 이겼다. 그래서 전쟁이 끝났다. 그런데 할 말이 뭐가 더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강진호가 위긴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말이나 좋습니다. 저들도 딱히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이미 상황 파악은 끝났습니다. 지금 저들은 그저 자신들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처분이라…….”
강진호가 다시 고개를 내려 밑을 바라보았다.
천이 넘는 이들이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렇게나 죽였음에도 이만한 수가 남아 있다는 것이, 이번 원정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였는가를 반증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다.
이곳에 오기까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배에 타고 있는 자는 모두 죽일 것이고, 바다에 뛰어드는 이들은 살려줄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고, 저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선택이 강요됐다. 저들을 그대로 두고 간다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아무리 무인이라고 한들, 저렇게 체력을 빼버린 이상 이곳에서 일본까지 헤엄을 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일직선으로 최단 거리를 잡아 간다고 해도 어려운 일인데, 바다 위에서 방향을 잡고 일직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고 가면 모두 죽는다.
지금 위긴스는 묻고 있다.
저들을 모두 죽일 것인지, 아니면 살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인지.
그리고 강진호의 선택은 간단했다.
머리카락에 흘러내리는 물을 털어낸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노부오를 바라보았다.
“한국어?”
“예? 아…… 아! 가능합니다! 일본어 통역도 가능합니다. 편한 대로 써먹어주십시오!”
뜬금없이 자기소개를 한 판이지만, 그 말은 강진호의 의도를 정확하게 캐치한 답변이었다. 강진호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전해.”
“예!”
“배에 뚫린 구멍은 막아두었다.”
노부오가 목청껏 강진호의 말을 통역해 소리쳤다. 증폭 마법을 통해 퍼지는 말이라 굳이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지만, 긴장한 노부오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너희는 두고 간다.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는 너희의 몫이다.”
말이 전해지고 나자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웅성거림을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할 말을 전할 뿐이다.
“운이 좋다면 살아날 수도 있겠지.”
말이 끝나자 다들 눈을 부릅뜨고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이 바다에 남겨진다는 공포가 일시적으로 강진호에 대한 공포를 능가한 것이다.
“그게 아니면…….”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다시 시작해 보지. 이번에는 생존자가 없는 전쟁을 말이야.”
그 말이 결정타였다.
빠른 죽음과 느릿한 죽음 중, 빠른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살아날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진호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그때였다.
“로드.”
위긴스가 강진호에게로 다가와 뭔가를 속삭인다.
위긴스의 말을 들은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우로 뻗어 아공간에서 적루를 뽑아 들었다.
“하나 서비스 해주지.”
우우우웅.
검집에서 뽑혀 나온 적루가 검명을 토해냈다. 검이 우는 소리가 적막한 바다를 따라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적루를 타고 검은 불꽃이 타오른다. 손끝에서 뻗어 나간 불꽃이 일시에 적루를 뒤덮으며 세 배 이상 늘어났다.
그런 후에…….
촤아아아아아아악!
강진호가 몸을 살짝 띄워올리고는 적루를 아래로 내리그었다. 검은 화염이 마치 화살처럼 뻗어 나가 배를 그대로 갈라 버린다.
콰득! 콰드드드득! 기이이이잉!
귀를 찢을 것 같은 금속음과 둔탁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설마?’
지켜보는 이들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강진호는 그들의 의도를 그대로 벗어났다.
배가 천천히 좌우로 벌어진다.
일격.
단 일격만으로 거대한 여객선이 반으로 갈려 버렸다.
경악, 그리고 공포.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격한 이들은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는 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뱃머리가 좌우로 갈라지며 배가 요동친다. 그러더니 이내 배가 순식간에 물에 잠겨들었다.
“……아!”
노부오는 입도 열지 못했다. 지금 그가 본 게 무슨 광경인지 머리가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해.”
“아?”
“여객선이니 구명조끼 정도는 있겠지. 잘 찾아보라고.”
“……예.”
노부오가 더듬더듬 통역을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이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여전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하고 멍하니 떠 있는 이들과 눈치 빠르게 잠수해서 배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
그 상반된 반응을 두고 강진호가 몸을 돌렸다.
“가시지요.”
“음.”
노부오를 낚아챈 위긴스와 강진호가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배를 옮겨 이명환과 이현수가 있는 배 위에 내려섰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개와 허리가 격하게 꺽인다.
배 위에 올라탄 강진호를 본 이들이 다들 최대한의 예를 표했다.
“음.”
강진호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수많은 이들이 바다 위에 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더 이상의 무인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무인이란 단순히 강하고 약하고로 결정되지 않는다.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이들은 아무리 강해도 무인일 수 없다. 그리고 무인이 아니라면 강진호의 적이 될 수 없다.
전쟁은 끝났다.
“돌아간다.”
“예!”
바다 위에 남아 있는 수많은 이들을 두고 배가 머리를 돌렸다. 그러고는 한국을 향해 최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망망대해에 남겨진 이들은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강진호의 배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들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붉게 물들어 있는 바다와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여객선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실감해야 했다.
“찾았다!”
바다 위로 솟구친 이가 구명조끼를 들어 올렸다. 그 구명조끼를 본 순간,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몇몇은 바닷속으로 잠수해 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다른 몇몇은…….
“이리 내놔!”
“당장 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쟁탈전을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한 쟁탈전.
구명조끼를 놓고 바다 위에서 다시 한 번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어울리지 않게 멀리서 해가 떠오른다.
전쟁의 끝을 알리는 일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