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17
#916.
계획하다 (1)
“워낙 혼전의 와중이라 바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강진호가 손을 내저었다.
“이 실장이 잘못한 일은 아니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강진호가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열이라…….’
적은 수다.
출정한 인원, 그리고 쳐들어온 이들의 수를 생각한다면 열이라는 숫자는 너무도 적어서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의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다.
수라고 해서 다 같은 수가 아니다. 열 개의 빵은 별게 아니지만, 열의 목숨은 그 수만으로 가치를 폄하할 수 없다.
강진호는 기이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열의 죽음.
과거의 그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희생을 담보로 한다. 서로 죽고 죽이겠다고 싸우는 이들에게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수없는 희생을 보았고, 수없는 전사자를 보았다. 그가 죽인 적뿐만이 아니다. 그와 함께 싸운 이들 역시 수도 없이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강진호는 딱히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지금은…….
강진호가 손을 들어 얼굴을 살짝 문질렀다.
“이현수.”
“예, 회주님.”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도록.”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제대로.”
강진호가 다시 한 번 끊어 말하자 이현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절대 총회가 희생자에 소흘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겠습니다.”
“그래.”
입맛이 쓰다.
이유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과거의 그가 마교를 움직이는 데 한발 물러서 있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지금의 그가 변한 것인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강진호의 기분이 꽤 얹잖다는 점이었다.
“계속해.”
“예!”
이현수가 자세를 바로 했다.
“군과 해경을 통해서 사고 지역은 통제했습니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배는 통과하게 내버려 뒀더니, 남은 생존자들을 회수해 간 모양입니다.”
“배는?”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그런가.”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민감한 문제니까.
“워낙 수심이 깊은 곳이라 드러날 일은 없을 겁니다.”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거지.”
“훗날 드러난다 하더라도 별 상관 없습니다. 배의 국적은 일본이고, 해명은 일본에서 해야 할 테니까요.”
바토르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드러나는 것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겠는데?”
“……악취미이시네요.”
이현수도 쓰게 웃었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그 강도를 피해 없이 제압했다고 해서 강도가 예뻐 보일 리는 없으니까.
그 강도가 이전에도 집을 몇 번이나 턴 놈이라면 더더욱.
“결과적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아마 곧 소문이 전 세계에 퍼질 겁니다. 이제 어느 나라도 총회를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이 훨씬 큽니다.”
“확실히.”
위긴스가 첨언했다.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의 원정대를 제압했다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을 무찔렀다는 사실만큼은 어떻게든 퍼지게 되어 있다.
“일본 놈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몽골보다는 강할 것 같습니다만?”
“뭐?”
바토르가 울컥했지만, 위긴스는 능글맞게 바토르의 화를 받았다.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팔모가지 날아간 걸 다행으로 알아라. 몸이 멀쩡했으면 곤죽을 냈을 거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위긴스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의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토르도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못 당하겠군.’
바토르를 제압한 위긴스가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하나 로드.”
“음?”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딱히 우리가 이득을 챙긴 건 아닙니다. 냉정하게 따져 보자면, 희생과 명성을 교환한 것뿐이지요. 이 명성이라는 것이 참 도움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겁니다.”
“그렇지.”
“이대로 물러나게 되면 손해를 볼 것 같은데…… 조금 더 조여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진호가 위긴스에게 눈을 고정했다.
“조인다?”
“예.”
위긴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지금 혼비백산한 와중입니다. 아마 내부 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저희가 침공에 대한 죄를 묻겠다고 나서면 더욱더 혼란스러워지겠지요.”
이현수도 동의했다.
“감당할 수준이 아닐겁니다.”
“그러니 그 와중에 물적 대가를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물적 대가라…….”
“돈이 많은 나라니 꽤 많이 뜯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이런 협상에는 제가 꽤 익숙한 사람이니까요.”
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물적 대가라…….”
왠지 웃음이 난다.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바꿀 수 있나?”
“…….”
강진호의 말에 위긴스가 입을 닫았다.
“대가라는 건 그런 걸로 치르는 게 아니야. 돈? 그래, 돈은 중요하지. 하지만 세상에는 때로 돈보다 중요한 게 있기 마련이지.”
강진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목숨의 대가는 목숨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이가 드러난다.
강진호의 일그러진 입매를 본 이들은 모두 직감했다.
이건 전후 처리 회의가 아니었다. 그들의 전쟁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강진호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면 어떤?”
위긴스가 의문을 표하자 강진호가 무뚝뚝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담배에 불이 붙는다. 타오르는 담배 끝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전쟁의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
모두의 시선이 강진호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내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깊게 빨려 들어간 담배 연기가 천천히 뿜어져 나온다. 연기에 반쯤 얼굴을 가린 강진호가 씹어뱉듯 말했다.
“쳐들어온 적은 죽인다. 달아나는 적은 쫓지 않는다.”
“…….”
“그게 원칙이라면 저들은 어떨까?”
강진호가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쳐들어왔나?”
“아닙니다.”
“그럼 달아났나?”
“……아닙니다.”
강진호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전쟁을 시작한 건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이 아니지. 전쟁을 시작한 이는 다른 이야. 하지만 그들은 대가를 치르지 않았어.”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고 있었다.
이내 살짝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피해를 입었다고?”
웃는다.
강진호가 나직하게 웃고 있었다.
“피해라는 건 피를 말하지. 제 피를 흘리지 않는다면, 그건 피해가 아니야. 아무리 큰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야. 제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강진호가 하는 말의 의도는 명백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하, 하지만 회주님.”
이럴 때 입을 열어야 하는 것이 이현수다.
“회주님의 의도는 알겠지만, 저들은 강대합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다음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전면전을 치루는 것은 보류해 주십시오.”
위긴스도 느긋함을 내려놓았다.
“저도 동의합니다, 로드. 정 그들을 징죄하고 싶으시다면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저들을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 곧 갖춰집니다. 동양 속담에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마존께서 공격을 받으셨소.”
장민의 얼굴은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한국을 노렸다고는 하나, 그 목표가 무엇이었는가는 너무도 명확한 바. 마존을 공격하여 했던 이들이오. 어찌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있소이까!”
장민이 강진호를 향해 부복했다.
“마존이시여, 명을 내려주십시오. 교도들을 이끌고 저들의 목을 쳐 마존의 위엄을 깨닫게 하겠나이다.”
바토르도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 영감의 말에 될 수 있으면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동감한다. 우리는 얻어맞은 거다. 잘 막아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지. 이번 일을 이대로 넘기게 된다면 한국과 총회는 힘만 있다면 한 번 건드려 봐도 되는 곳이라 인식될 게 빤하다.”
위긴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 극단적인…….”
“네 입에서 나올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잊었나? 무인계는 원래 그렇다. 만만한 자는 잡아먹히는 법이지. 그리고 그 만만함이라는 게 꼭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약해서 얻어맞는 와중에도 발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독종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더라도 얻어맞고 보복하지 않는 이는 모두가 한 번씩은 찔러보기 마련이지. 보여줄 때 보여주지 못한다면 결국은 타깃이 된다.”
바토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그게 중요하다. 이제 총회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홍왕과 엮이고, 일본과 엮이면서 모두의 시선이 총회로 쏠려 있다. 이럴 때 단호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단호할 수 없는 법이다.”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원론적으로 볼 때, 바토르의 말은 틀리지 않다. 무인계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곳은 없다.
문제는 그 ‘약’이라는 것에 여러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힘이 센 순둥이는 때때로 나약한 독종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볼 때, 시기가 맞지 않다.
지금 총회는 한창 발전하는 와중이다. 마공이 전수되고 새로운 무학을 창안했다. 그리고 체계도 효율적으로 뒤바꾸고 있다. 그리고 총회 자체를 합법화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 와중에 전쟁?
‘무모하다.’
승리와 패배는 중요하지 않다. 이기든 지든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어쩌면 다시는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는 상대다. 그런데 왜 다급하게 굴어 피해를 자초한단 말인가.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것을.
그때,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오해가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강진호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꽂혔다.
“전면전을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지.”
“예?”
이현수가 멍하게 되물었다.
적은 일본, 그 자체다.
이번 일을 꾸민 이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신니치카이, 관서 최대의 구미다. 그런데 전면전을 치르지 않고 어떻게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단 말인가.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결국 하나겠지. 그렇지 않나?”
“……신니치카이의 수장 말입니까?”
“그래.”
강진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죽은 사람이 있다. 노부오가 아니었다면 죽은 사람은 더 늘어났겠지. 목숨의 빚은 목숨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진호가 대답했다.
“내가 간다.”
강진호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현수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피는 피로, 이빨에는 이빨로.”
싸늘한 살기가 장내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