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29
#928.
마중하다 (3)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미소 띤 얼굴처럼 편하지는 않았다.
‘영 어색하군.’
타 국가를 방문하는 것은 확실히 달갑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마스터처럼 VIP 취급을 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공항을 통과하는 일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처음 이런 의전을 받는 이들에게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과정일지도 모르지만, 마스터에게는 그저 귀찮기만 한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그런데 누구시래?”
“글쎄,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기는 했는데, 신분은 절대 묻지 말라고 하던데?”
“아랍 왕세자라도 되나? 복장을 보면 그쪽은 아닌 것 같고. 영국에서 왔다고?”
“그렇다는 것 같은데?”
속삭이는 의전 요원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딴에는 작게 속삭인다고 한 말이겠지만, 무인인 마스터에게는 코끼리의 발자국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어투만으로도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래서 일반 루트로 가고 싶었건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전용기를 타고 온 이에게 시선이 쏠리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어려운 요구다. 게다가 마스터처럼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추장스럽고, 조금은 부담이 되더라도 VIP용 게이트를 통과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이런 문제 때문에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 자체를 스킵하고 차량으로 바로 공항을 빠져나가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것도 어려웠다.
공항에서 만날 사람이 있으니까.
“이쪽입니다, 마스터.”
“음.”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마스터가 걸어갔다. 하지만 이내 마스터는 또 다른 문제 하나를 직면할 수 있었다.
“지금 안 된다구요? 그럼 언제부터 가능한데요?”
“음?”
마스터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뭔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가 트러블을 직감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셔야…….”
“아니. 미리 예약을 했는데…….”
“죄송합니다.”
일남일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검은 슈트를 입은 공항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투를 보니 저 일남일녀가 공항 관계자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중인 모양이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라도 확답을 주시죠.”
“그게 지금 특정이 안 돼서…….”
“환장하겠네.”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남자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야, 왜 이렇게 오버해? 기다리면 되지!”
“아니, 누나. 우리가 먼저 예약을 했다니까. 이 시간에 통과할 거라고 예약도 했는데 무작정 기다리라고 하니까 그러잖아요.”
“예약이 별거냐? 예약했다고 해서 제시간에 뭐가 다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중국에서 수도 없이 경험해 놓고 왜 그래?”
“여기는 중국이 아니니까 그러잖아요. 중국이면 전 벌써 자리 깔고 누웠어요.”
“됐어, 됐어. 그러니까 일반 게이트로 통과하자고 그랬잖아! 쪽팔려 죽겠으니까 그만 좀 해.”
“일반 게이트요? 저번에 우리 일반 게이트로 가다가 무슨 일 있었는지 잊으셨어요? 사람들이 엄청 몰려들어서 게이트 마비됐잖아요.”
“……그랬지.”
남자가 슬쩍 공항 직원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게 우리가 요구한 거면 말도 안 해요. 그 일 있고 나서 공항 측에서 업무에 방해가 되니까 다음부터는 일반 게이트 말고 다른 게이트 이용해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확인을 세 번이나 했는데 기다리라고 하니까 사람이 빡치는 거잖아요.”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저희도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 있어서.”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으면 다른 쪽이 기다려야 하는 게…….”
“한은솔.”
“…….”
여자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흘러나오자 남자가 움찔하여 입을 닫았다.
“내가 오버하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신경 써야 하는 문제를 별게 아닌 걸로 여기는 것도 잘못됐지만, 별것도 아닌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야. 너, 지금 뭐, 갑질하니?”
“아, 아니, 갑질이라뇨. 누나, 제가 그런 걸 할 입장이 아니잖아요.”
“니가 지금 하는 게 갑질이야.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 거 아냐. 이쪽도 어찌 못하는 문제 같은데, 그걸 자꾸 잡고 늘어지면 어쩌자는 건데?”
한은솔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한은솔도 이런 일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는 갑질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본인이 갑질을 당하는 입장이니까. 연예인의 매니저라는 게 그런 직업 아닌가.
잘나신 연예인들과 정말 잘나신 피디나 감독들 사이에서 처신을 해야 하는 한은솔이니만큼 갑질을 당하는 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은솔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은솔이 슬쩍 고개를 들어 팔짱 낀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이만큼 함께 지냈으면 이제 저 미모에도 익숙해질 만한데도, 여전히 이 여자는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물론 한은솔과 함께 있는 사람의 이름은 최연하였다.
팔짱을 낀 채 한은솔의 행동에 불만을 토해내고 있는 최연하였지만, 한은솔은 그런 최연하의 눈가에 살짝 초조함이 어려 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답답하게 됐네.’
정말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평소의 그들이었다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일단 한국의 공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요즘 한국은 중국에서 몰려온 미세먼지 때문에 난리라고 하던데, 막상 중국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청정국가였다.
본토의 미세먼지 맛을 봐야 한국 사람들도, ‘아, 우리는 아직 살 만한 거구나’ 하겠지.
그렇기에 일단 공기가 맑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다려 줄 용의가 있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조국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니까.
문제는 지금 그들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마중객이 없다면 자리에 앉아서 놀면서 기다리면 된다. 급한 일도 없고, 바쁠 일도 없다.
하지만 지금 공항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공항 밖에 있는 이는 최연하나 한은솔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니 지금 최연하가 이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제일 초조해하면서.’
한은솔이 입맛을 다셨다.
예전에 최연하가 이런 꼴을 당했다면?
어쩌면 한은솔은 속으로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최연하는 당해도 싼…… 아니, 꼭 당해봐야 하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최연하는 다르다.
이게 한은솔이 서서히 끓는 냄비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감각이 마비되어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의 최연하는 정말 사람이 됐다.
물론 타인이 보기에는 여전히 마녀 수준이겠지만, 예전의 대마녀 최연하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가 최연하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연기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만큼 달라졌다.
그러니 더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참고 또 참아서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홀가분하게 돌아온 사람이 이런 상황을 또 겪다니.
힘든 중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최연하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다시 고초를 겪게 만드는 것 같아 속이 답답한 한은솔이었다.
“기다려. 뭐, 어쩔 수 없지.”
“아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건데…….”
“톡으로 사정 설명하면 되잖아. 우리 잘못도 아닌데 뭐.”
‘그 좋은 연기력을 이럴 때도 발휘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카메라가 돌 때의 최연하는 연기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평소의 최연하는 영 연기가 서툴렀다.
지금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손톱 물어뜯지 마세요. 그게 비싸게 주고 한 네일이잖아요.”
“응? 내가?”
최연하가 화들짝 손을 내렸다. 그 광경을 보며 한은솔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도리가 없네.’
상황이 답답한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일반 게이트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장 통과시키라고 강짜를 부릴 수도 없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기다리는…….
“실례합니다.”
한은솔이 고개를 돌렸다.
‘응?’
그들의 옆에 어느새 몇몇 사람이 다가와 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럿 중에 한 사람이 특히 눈에 띈다. 살짝 예스러운 턱시도에 검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
‘코스프렌가?’
그보다는 무도회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
어찌 보면 살짝 우스꽝스럽지만, 어찌 보면 품격이 배어나는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가면의 아래로 보이는 입가의 자잘한 주름이 이 사내의 나이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사내의 옆에 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저희 때문에 문제가 생기신 것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수속을 밟으시겠습니까?”
“……아!”
한은솔이 살짝 커진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들의 수속을 뒤로 미룬 이유가 이 사람들 때문인 모양이다.
‘VIP겠지.’
그것도 특급 VIP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최연하가 일개 연예인 나부랭이라고는 하나, 먼저 예약한 이를 한정 없이 뒤로 미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빨리 수속을 마쳐 버리는 쪽이 나으니까. 겨우 두 사람 통과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
그런 간단한 일조차 먼저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사람이 공항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만전을 기해야 할 정도의 VIP라는 뜻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쭈어도…….”
“아니요. 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저 시간을 지체하지 않게 함께 통과하는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때, 노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목소리가 조금 강압적인 것 같은데?”
‘영어?’
노인이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단숨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뜻은 대충 짐작이 간다. 노인이 말을 끝내자 사내가 격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피해를 끼쳤다면 우리가 사과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언성을 높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통역하게.”
“예!”
“피해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저희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기다리는 이가 있어서 차례를 양보하지는 못하지만, 수속을 같이 받는 선에서 제 사과를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가 좋겠군.”
“네, 좋아요.”
통역이 미처 이뤄지기도 전에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때, 땡큐 포 유어 케어.”
한은솔이 더듬더듬 통역을 하자 노인이 빙긋이 웃으며 앞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한은솔이 작게 말했다.
“누나, 영어 알아들어요?”
“모르지.”
“근데 어떻게 알고 대답한 거예요?”
“‘고 투게더’라메?”
“…….”
“못 먹어도 고지. 그럼.”
“…….”
답이 없다.
이 여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